고려 중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뒤를 이어 조계종의 2세(世)가 된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

주술적 폐습과 부패, 권력과의 결탁에 찌들어있던 불교계의 부조리를 직시하고 정혜결사(定慧結社)의 새로운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던 당대의 고승이다. 그는 출가 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해 태학에서 수학하였을 만큼 문학적 조예도 갖추고 있어서 선교상쟁(禪敎相爭)을 불식해 선풍(禪風)을 널리 떨쳐나가면서 곳곳에 많은 시를 남기었다. 우리 국문학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선시인(禪詩人)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자호는 ‘무의자(無衣子)’이다.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자기 멋대로 뛰어노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모습이 파격적인 시형과 시어의 사용으로 깊은 깨달음의 선사상을 드러내는 노승의 모습에 겹쳐진다.

“한 조각 구름에 몸은 상쾌 활달하고, 구름 걷힌 달빛에 마음은 맑고 한가롭네(片雲身快活 霽月性淸閑).”
“뜬구름같은 부귀가 날 어찌하랴, 분수 따른 내 생애 또한 아름답구나(浮雲富貴奈吾何 隨分生涯亦自佳).”
“인간 세상은 몇 해나 살 수 있겠나? 한바탕 꿈은 되지 않으리라(人間世能幾歲 無來一夢場).”

그의 시구 하나 하나가 생생한 형상으로 변모해가면서, 이윽고 “확 트여 무의하고 무상한 몸을, 선가에선 냄새로 본래인이라 알아보지(廓落無依無相身 禪家嗅本來人)”라는 구절에 이른다.

범어로 ‘anālambya’라 하는 ‘무의(無依)’는 번뇌에 얽매인 경계를 멀리 벗어나 어떠한 속박에도 구애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데 그렇다면, ‘無依’나 ‘無衣’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아무런 옷을 걸치지 아니한, 모든 욕심을 벗어던진 삶을 그려냄에 있어서는 ‘無衣’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800년 가까운 긴 세월이 흐른 후 또 한분의 무의자가 이 세상을 디뎠다 가셨다. 바로 고 권옥연(權玉淵) 화백(1923∼2011)이다.

한국 추상회화의 1세대 작가로서 서구적인 모던 아트의 틀에 한국적인 향토성을 도입한 비사실적 회화로 개성적인 화풍을 일구어냈다.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으로부터 “동양적인 쉬르(sur)가 있다”는 평을 받았을 만큼 그의 작품은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 초월적인 환상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북청에 유배됐던 추사 김정희가 함흥에 들를 때면 반드시 찾았다는 명문의 후손답게 서예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새해가 되면 그의 글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댁에 몰려들었을 정도이다.

2011년 12월 초, 배우자이신 한국 연극계의 큰 어른 이병복(李秉福) 선생께서 자택으로 나를 불렀다. 그 분들의 자식과는 어려서부터 한 동기처럼 자라났기에 내게는 부모님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권 화백께선 그 해 봄까지만 해도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모습과 놀라울만한 기억력을 보이셨건만 89세의 고령에 기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며 병원행 또한 잦아져 걱정이 깊어지던 중이었다.

당시 나로서는 그 해 9월 1일자로 법조공직을 마치고 퇴임을 한 인생전환의 무렵이었다. 몇몇 로펌의 타진을 마다하고 스스로 전관예우 사절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자유’의 내음을 맡아오다가 법조인이란 천직(天職)을 멋대로 방기하면 되느냐는 주위의 따가운 질책을 받아들여 해 넘기기 전에는 ‘자유직업인’으로서 사무실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으로 바쁘게 지내던 중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분들이 나를 오도록 하였던 것은 뜻밖에도 권 화백께서 나를 위한 글을 미리 준비하셨던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法有情’이라는 옥필(玉筆)이었다. “법에도 정이 있어야 하느니….”

나 스스로는 지난 공복(公僕)의 세월 동안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했노라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지만 왜곡된 엘리트의식에 냉소적이고 탐욕스런 부류로 매도되기까지 하는 법조인들의 이미지가 의외로 넓게 퍼져있다는 현실에 비추어 당신이 남겨놓으신 경구는 나의 폐부를 찔렀다. 그로부터 불과 1주일여 후인 같은 해 12월 16일 그분은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다음 해에 들어 어느 노서예가가 경상북도 오지에서 힘들게 구해다 준 회화나무, 즉 괴목(槐木)이란 귀한 나무로 당신의 절필(絶筆)을 부조시킨 목판을 만들었다. 그 이래 그 목판은 사무실 출입문 바로 안쪽에 세워져 있어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암묵의 메시지를 내게 보내주고 있다.

시인 무의자는 화가 무의자가 저세상으로 가신 후 그의 옛적 시집을 통해 불현듯 다가왔다. 그러나 그 분들 모두 늘 가까이 계셨고, 앞으로도 늘 함께 하시리라는 믿음이다.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세속의 덧없는 구속과 멍에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은 그 분들만의 꿈이 아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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