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는 무한한 정보가 제공된다. 출처를 알 수 없고, 진실성 여부도 불분명하지만 어딘가에서 청소년의 장래희망을 조사한 글을 읽었다. 부유층 청소년의 장래희망은 남자는 국제변호사(정확한 표현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이고, 여자는 법조인이며, 저소득층 청소년의 장래희망은 남자는 프로스포츠 선수이고, 여자는 연예인이라고 했다.

부유층 청소년의 장래희망은 어느 정도 가시적이고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비교적 높은 반면, 저소득층 청소년의 장래희망은 달성여부가 매우 불투명한 대신 아주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직업이라고 이 통계는 지적했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거칠게 표현하면, 저소득층의 청소년은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과 비견되는 매우 낮은 가능성의 모델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6·25 전쟁의 포화 이후 우리나라는 실로 기적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필자가 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는 전쟁이 끝나고 30년이 지났을 때에 불과하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이라고 해봐야 1985년이니까, 지금 1985년을 돌아볼 때 별로 멀게 느껴지지 않는 만큼, 1980년대 당시 시점으로는 6·25 전쟁의 잿더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생하였을 것이다. 전쟁 이후 아무것도 없는 맨땅이지만 우리도 한번 잘살아야 봐야 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과서는 “우리나라는 지하자원이 부족하고 산업의 기반이 부실하나 인적자원이 풍부하다. 우리나라는 사람이 재산이다. 인적자원을 키워야 한다. 그런 만큼 열심히 실력을 연마해서 앞으로 잘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해마다 학력고사가 끝나고 나면,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과외 한번 받지 않고 교과서 중심으로 학교 수업에 열중해서 수석의 영광을 안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신문에 나왔다. 그리고 그 중 많은 분은 법조로 진출해서 지금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 돈이 없어도 자신만 열심히 노력하면 사람들이 선망하는 지위에 오를 수 있었고, 지금처럼 서울과 지방, 고소득과 저소득의 차이에서 다른 출발점이 설정되지는 않았다. 전국에 있는 모든 학생이 동시에 한번 학력고사를 봐서 그 점수에 맞추어 대학을 가는 방식은 너무나도 획일적이지만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람은 자신이 걸어왔고 이룩하여온 방식이 가장 공정하고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긍정이 사람 삶의 원동력이므로 비난할 바 못된다. 학력고사가 가진 그늘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여 온 많은 사람들이 종전의 방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미련을 가지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필자도 아이들을 키우지만 도대체 어떻게 대학을 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입학사정관제니 논술이니 하는 말들이 익숙하지 않다. 왜 학교에서의 공교육이 붕괴되었는지, 모두들 왜 심야까지 학원에서 고생을 해야 하는지, 초등학생이 고등학교 과정을 선행학습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참으로 생경하다. 할아버지의 경제력, 어머니의 정보력 등등이 아이들의 인생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설명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무엇이 참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장래 희망을 성취하는 길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업계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필자는 많은 사람이 학벌과 나이를 따지지 않는 동등한 조건에서 시험을 보아 합격생을 선발하던 사법시험이 희망의 사다리이자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길이라는 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다. ‘개천’이 무엇이고, 법조인이 무슨 ‘용’씩이나 되며, ‘개천에서 용이 나와야 하는 당위는 있는가?’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앞서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에 관한 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소득격차에 따라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조차 꾸지 못하는 세상은 너무도 불편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실현의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밖에 보이지 않고,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하게 하는 이 세상이 우려스럽다.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이 복권에 당첨되기만을 바라는 세상이 어떻게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사법시험을 통해 미래를 꿈꾸어 온 사람들의 희망을 절멸시키는 것이 순수히 공정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예전에는 부유하냐 가난하냐에 따라 장래희망을 다르게 설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부자가 아니더라도, 부모가 충분히 받쳐주지 못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꿈을 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공정에 관한 방법론은 다르겠지만, 적어도 집이 어려워서 꿈의 선택지를 가려야 하는 세상이 불공정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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