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극작가 중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베르톨트 브레히트다. 소위 ‘거리두기’라는 연극적 장치로 알려진 이 극작가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라는 연극에서 이 장치를 통해 관객이 극에 몰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관객은 관객이라는 별도의 주체로서 연극이 이어지는 내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깨어있을 것을 요구한 이유는 바로 감정이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함으로써 비판정신이 깨어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주인공인 억척어멈은 가장 끔찍했다는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에서 세 자식을 모두 잃는다. 그렇지만 그 전쟁터가 억척어멈에게는 삶의 터전이었고, 세 자식을 모두 잃었음에도 여전히 전쟁의 허무함을 깨닫지 못한 채 전쟁을 따라다니며 하는 장사를 멈추지 못한다.

감정이입이 허락되는 상황이라면, 대부분의 관객은 이 억척어멈의 비련한 삶을 동정하고, (전쟁이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그녀의 바람 역시 “그래 어쩔 수 없지.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저 어미 마음이 어떻겠어”라는 이해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련한 여인, 전쟁에서 자식 모두를 잃은 어미를 보는 관객들에게 작품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비판의식을 살아있게 함으로써 사실은 이 여인이 자기 자식들뿐만 아니라 남의 자식들까지도 전쟁으로 몰아넣고, 자신은 그 속에서 삶을 유지하는 오히려 군수자본과 같은 인물임을 느끼게끔 한다.

사실 이와 같은 장치는 관객에게는 매우 불편하다. 연극이라는 장치를 통해 다른 세계를 만나고 다른 인물이 되어 보고 싶은데 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레히트는 이러한 바람이 지극히 위험한 것임을 경험한 바 있다. 바로 1930년대 후반 나치의 득세이다. 정상적인, 아주 평범한 사람들조차 특정 부류의 집단에 대한 증오를 공유하고 키워나갈 수 있다는 비이성적인 상황은 무비판적인 수용이 얼마나 잔인한 결과로 번져갈 수 있는지를 본 것이다. 브레히트는 그래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인위적으로 방해함으로써 비판정신을 유지해야만 보이는 것들을 심지어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최근에 공연이 이루어졌던 작품 중에 시인 김수영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 있었다.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첫 시작이기도 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를 제목으로 한 이 작품은, 작품 안에 또 다른 현실과 또 다른 연극이 존재하는 소위 액자식 구성을 통해 김수영의 족적을 따라가본다. 김수영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 재미있을 수 있다. ‘풀이 눕는다’로 시작하는 시 ‘풀’의 작가, 시인, 문인인 김수영은 사실 6·25전쟁에서 가슴이 산산이 부서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인민군 강제징집과 반공포로생활 중 모진 고문과 구타로 육체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을 뿐 아니라 부인이 김수영의 친구와 살림을 차리는 모습까지 보아야 했다. 포로생활을 마치고 부인과 재결합을 하였지만 부인이 김수영에게 돌아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 기다림은 하루에도 수십번 희망과 좌절, 평정과 격분, 사랑과 증오를 오가면서 그는 전쟁이 만든 괴물이 되기도 했다. 그의 시 중 부인을 길거리에서 우산으로 구타하는 ‘죄와 벌’이라는 작품도 사실 쓸모 없는 이념 전쟁이 빚은 기형적인 형태의 사랑일 수 있다.

연극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는 김수영의 삶을 쫓으며 사실은 의미 없는 것들 사이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브레히트의 장치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고통에 수긍하지 않도록 한다. 이승만은 서울시민들에게 가만있으라고 하면서 다리를 끊고 피난을 간다. 인민군에 강제로 징집된 이는 반공포로가 되어 이념전선의 끄트머리에서 모진 고문을 받는다. 지금도 우리는 가만있으라고 하고 선장은 탈출하고, 대통령은 행적이 묘연한 일들이 생긴다.

연극에서조차 비판의식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브레히트의 정신이 요구되는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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