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채프먼 박사는 오랜 기간 연구하고 조사한 결과 보통의 사람들에게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가 있음을 발견했다. 인정하는 말, 선물, 봉사, 함께하는 시간, 육체적인 접촉 이렇게 말이다. 누구나 이 다섯 가지 언어 가운데 하나를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서로 깊이 사랑하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그 사랑을 전달하지 못하는 부부가 많다고 한다. 즉 배우자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방법을 동원한다 해도 상대방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새삼 지난 이별을 떠올려 보니 나는 과연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로서 충분히 사랑을 표현했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나 역시 서운함과 불만이 쌓여 폭발해 버린 걸 보면 그 역시 내 사랑의 언어를 알지 못했는지도. 서툰 연애였다.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이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나를 좋아한다는 것. 실로 기적 같은 일이다. 하지만 두근두근 설렘과 고민의 시간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커플이 되도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크고 작은 의견 차이 끝에 때로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고 감정을 표출해 버린 뒤 다음 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 자신 법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비합리적이었나 싶어 양심적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간신히 나를 두둔하는 말. 왜 내 마음을 몰라 주냐는 거다. 왜 너는 나한테 그렇게밖에 못 하냐는 거다. 어쩌면 상대방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당신도 위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를 균형 있게 고루 사용하면 참 좋으련만 보통은 능력 밖이다. 그는 내게 충분한 시간을 내어(어쩌면 그가 혼자서 무언가 하고 싶은 그 시간을 포기하고) 늘 함께 해 주었다. 언제나 당연한 듯 늘 내 손이 닿는 거리에 있었던 그와의 시간은 내게 사랑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나는 눈에 보이는 그 무언가로 입증된 사랑을 확인하길 원했다. 무심코 들어보았던, 사랑의 진정성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제언은 나를 깊이 사로잡고 있었다. 이런 내게 공기처럼 익숙한 ‘함께하는 시간’이 어떻게 사랑으로 느껴질 수 있었을까. 돌이켜 보면 내게서 진정으로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선고를 들은 그는 참 답답하고 억울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그것은 남도 좋아하게 마련이라고 쉽게 생각을 한다. 거기서부터 오해가 싹을 틔울 여지가 있다. 비단 남녀 사이 뿐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따뜻한 밥상을 받아보지 못해 서운했던 엄마는 딸에게 상다리가 휘어지는 저녁 식사와 넘치는 먹거리로 사랑을 표현했고 일년 내내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는 딸은 자신이 그토록 갖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거금을 모아 엄마에게 값비싼 가방 선물을 했다. 당장 여기 저기 돈 들어갈 곳이 많았던 엄마는 못내 아쉬웠다. 둘도 없는 모녀지간이었지만 사랑의 언어는 달랐고 실상 서로 효과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원치 않는 그 무엇을 상대방이 사랑의 이름으로 내어 놓을 때 그것을 다시 내 안에서 사랑의 언어로 번역해 입력하기까지는 일말의 순화 과정이 필요하기까지 하다. 그게 귀찮아지는 상황이 오면 그만 사랑이고 뭐고 신경질이 나는 수도 있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 간의 사랑 뿐 아니라 자신을 낳은 어머니와의 사랑도 그처럼 쉽지는 않았다. 사랑이란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라고 톨스토이가 말했다. 실제로 사랑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게 꼭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한 변호사가 되어 참 좋았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할 수밖에 없는 변호사 생활이 한해 두해 흘러갈수록 조금씩 고갈되어 갔다. 그게 체력인 것도 같았고 열정인 것도 같았다. 취미 생활을 하며 밸런스를 맞춰보려 애썼지만 그것도 한때뿐인 듯 했다. 늘 사건 기록 속에 파묻혀 일하지만 그 속엔 언제나 사람이 있고 무수히 많은 사람과 소통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일하려니 나 자신 먼저 충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충전은 다름 아닌 나를 소중히 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관심과 사랑의 충전이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그저 먹고 자는 것처럼 당연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일 수도 없었다. 특히 서로 사랑하면서도 이내 상처를 주는 패턴은 종종 반복되었다. 이제 내 사랑의 언어를 조심스럽게 말해 주고 또 상대방의 사랑의 언어가 무엇인지 관찰하는 노력이 가미된다면 그 소통의 벽이 조금은 낮아지지 않을까. 일단 한 쪽에서부터라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에서는 주인공 모모를 통해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중략)… 사랑해야 한다”고 말이다. 앞으로도 나는 힘들지만 보람 있는 내 직업 변호사 일을 계속 할 것이다. 그리고 또 계속 ‘사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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