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도를 기록한 토요일 해거름에 ‘짜장면 번개팅’을 하자고 초등학교 동기 밴드가 부산하였다. 다리를 다쳐 못 움직인다는 친구의 석고붕대 사진이 올라오고 지방에 와 있다고 하루만 미루자는 답글이 붙으면서 그것도 잠잠해졌다.

밤 9시쯤 ‘지금 출발할 테니 얼굴이나 보자’는 연락이 왔다. 개포동에서 달려 온 초등학교 동기 문 사장은 배우 문채원의 아빠이다. 선화예고에서 그림을 그리던 딸이 고3 무렵에 배우를 하겠다고 선언하자 말려달라고 하소연을 하였다. ‘번듯한 대학 가서 해도 늦지 않다’고 전화통화도 하고 만나서 달래기도 하였으나 채원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삽시간에 딸이 스타가 되자 요즈음은 문머시기라는 본인 이름은 간 데 없고 세상이 자신을 ‘문채원의 아버지’로 부른다며 애매한 미소를 짓는다. 채원이는 말리고 혼만 내던 아저씨가 야속하였던지 내 전화도 받지 않고 격려 문자에도 답이 없다.

여전히 공기가 뜨거워 길바닥에 주차한 친구를 붙잡고 에어컨이 훌륭한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자정 무렵, 젊은 아이들이 빼곡한 카페에 아저씨 둘이 앉았다. 친구는 그 전날 본 ‘연평해전’에서 내 얼굴이 반가웠다고 했다. 두어 시간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 두시가 가까워서 헤어졌다.

‘연평해전’이 500만명을 넘어가고 있다고 감독에게서 카톡이 왔다. ‘전반부 편집이 미흡하여 200만은 까먹었다’고 답을 보내자, ‘2월부터 4개월간 후반작업하면서, 녹음·CG·3D 컨버팅·해외수주에 시간을 쓰느라 편집을 1개월에 끝내야 했던 악몽 같은 스케줄’이었다고 해명하였다.

‘연평해전’은 영화진흥위원회 3D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행정소송을 거쳐서 10억원을 지원받은 영화이다. 지원사업 요강에는 지원금 수령 후 일정기간 이내 개봉이 의무이고 그 마지노 라인이 6월29일이었을 게다. 6월 11일로 개봉을 확정지었다가 메르스 여파로 2주일을 연기하였으나 실제로 2주일 이후 극장에 관객이 몰릴지는 전혀 예측불가였다. 6월 초 각 언론은 중세 유럽의 페스트 창궐이 한반도에서 재연된 듯 호들갑을 떨었고, 북적이던 대학로도 폭풍 전야의 을씨년스러운 거리가 되어 공연장 운영자들의 한숨 소리가 전부였다.

그 와중에 ‘연평해전’ 제작과 감독을 겸한 김학순 교수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을 게 뻔하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살던 아파트도 담보로 넣었으니 여차하면 개인 파산이 눈앞에 와 있었다.

250만명을 넘기면 배급사 NEW는 돈을 번다는 기사가 나왔지만 제작사는 400만을 넘겨야 했다. 갚아야 할 영화진흥위원회 지원금 10억원 등 온전히 제작사의 부담인 채무가 더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 편하게 즐기고, 정산 끝나면 장기 여행 떠날 수 있도록 항공권 예약이나 해 두시라’고 문자를 찍었다.

실제로 ‘터진’ 영화의 제작자는 정산이 끝나면 몸을 숨긴다. 제작사 입장에서 주요 배우의 러닝 개런티며 고생한 스텝들의 보너스를 챙긴다고 하여도, 받는 상대방의 느낌은 또 그렇지 않다. 그만큼 벌고도 이것 밖에 더 안 주냐고 심술을 부리고, 왜 누구는 보너스를 주고 나는 빼 놓냐는 시샘도 있다. 그러니 제작자는 당분간 머리카락도 안 보이게 꼭꼭 숨을 수밖에.

김 교수는 ‘연평해전’에 7년간을 매달렸다. 촬영이 중단되고 투자자를 구하느라 고초를 겪던 중 조선일보의 칼럼이 시민 성금을 이끌었다. 7년 세월을 아는 나로서는 영화의 완성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었다. 그런데 묵직한 여운이 남는 전투씬까지 압권이라 나는 이를 ‘인문적 전투씬’이라 이름 붙였다. 슬리퍼 끌고 동네극장에서 다시 보았을 때는 느낌이 더 좋았다. 편집이 아쉬워보이던 전반부도 나쁘지 않았다. 이영욱 변호사가 “세번을 보았는데 볼수록 좋다”기에 감독에게도 그대로 전했다.

‘연평해전’은 개봉 전부터 이미 시비거리였다. 제2차 연평해전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에 신경질적인 반응이 나왔다. 시비꾼들은 이제 와서 영화의 완성도와 연출력을 걸고 넘어진다. 영화의 평가는 관객의 몫이다. 단기간에 500만명 고지를 가뿐히 넘기고 1000만명을 향해 달리는 영화가 완성도가 떨어지고 연출력이 부족하다면 어떤 영화가 완성도가 높은 영화이고 연출력이 뛰어난 영화일까? 뚝심으로, 정공법으로 도전한 ‘연평해전’의 성공이 ‘정의의 승리’인 양 기쁜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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