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갑인 변호사님이 6월 24일 소천하셨다는 메일을 서울지방변호사회로부터 받았다. 물론 내가 개인적으로 모르는 분이다. 일본고등고시 출신이기에 법조인명부에서 찾아보니, 1923년생으로 92세로 천수를 누리셨고, 2012년에 변호사 50년상을 받으셨다. 내 나이만큼 변호사를 하셨고, 남자로서 90살을 넘겨 건강하셨으면 변호사로서 최고의 삶은 사셨으니 변협의 숨은역사 코너에서는 좀 알아드리는 것이 후배들의 예의일 것 같아서 오늘은 “추모 임갑인 변호사”로 제목을 잡았다.

1940년 순천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지금의 순천대학교의 전신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고인이 2012년 2월 20일 변호사 50년상을 수상하면서 순천대 후배들의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1000만원을 기탁했다는 순천대학의 기사 덕분이다.

좀 더 기사를 보자. “임갑인 변호사는 지난 1935년 순천대의 전신인 순천농업학교에 입학해 1940년 5월에 졸업한 후 법조인의 꿈을 안고 도일해 일본 명치대학교 법과에 입학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임 변호사는 1943년 일본 고등시험 사법과에 최연소로 합격해 1952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해왔다. 임 변호사는 사회정의와 인권옹호에도 앞장서 국민훈장모란장을 수상한 바 있다. 임갑인 변호사는 “지난 50년을 돌아보면서 자신을 키워준 모교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장학금을 기탁하게 됐다”고 밝혔다. 임 변호사는 지난 2000년에는 ‘자랑스러운 순천대인상’을 수상한 동문이기도 하다. 순천대는 기탁자의 뜻에 따라 기탁금을 장학관련 사업에 의미 있게 쓸 계획이다.”

1952년 변호사 개업은 부산에서 했다. 전쟁때이다. 1953년에 군법무관으로 임관하여 육군소령으로 예편을 했다. 해방후 1946년에는 잠시 조선대학교 교수를 하셨다. 1957년에 다시 서울에 개업을 하였고, 1960년에 대전지검장으로 하시고, 1961년에 다시 변호사 개업을 하시고, 1976년에는 서울제1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하셨다. 정말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다. 어떻게 대전지검장이 되셨을까? 궁금하다. 감투 운도 좋으시다. 한일변호사협의회장, 법률신문사 이사 및 감사, 대한공증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셨다.

2010년 법률신문 창간 60주년을 맞아 고인이 인터뷰한 기사가 있다. 이사, 감사를 하여 인터뷰 하였다기 보다는 1960년대초 법조계에서 벌어졌던 '법률신문 살리기운동'에 열심히셨다. 당시 법률신문은 심각한 경영분쟁에 시달렸다. 창간사주인 고 최대용 변호사시절부터 자금을 투자했던 비법조인 주주그룹과 십시일반 법률신문을 살리기 위해 참여했던 법조인 주주그룹과의 분쟁이었다. 그 공로가 인정되신 것같다.

내 눈에 가장 눈에 뛰는 업적은 지난 1986년 변호사들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조직된 법률실무연구회의 초대위원장으로 서울회에서 판례연구발표회를 이끄신 것이다. 2007년 그 700회 기념식에 참석하여 감격스러워 하시며 이런 말씀을 하였다. “그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속에서도 22년째 이어온 판례연구발표회는 변호사들의 열정과 땀이 담겨있다. 판례연구를 마치고 해장국을 먹고 각자 사무실로 출근할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700회를 맞았다”. 세월을 이겨내는 모습은 어디서나 아름답다.

최근까지 건강하셨던 것 같다. 원래 1986년부터 법무법인 대종의 대표로 계셨는데 은퇴하시고 2012 변호사 임갑인 법률사무소를 오픈하신 것을 보면 말이다. 원로 선배들이 나이가 들어 은퇴하시면 자기 개인사무실을 내고, 그곳에서 변호사업무가 아닌 소일과 출퇴근을 하시면서 건강을 유지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고인의 명복과 훌륭한 아버지를 둔 가족(3남 3녀)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면서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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