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서울대 총장을 지낸 형법학자요 법철학자인 월송(月松) 유기천(劉基天)박사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유기천기념출판재단에서는 오는 가을에 프레스센터에서 큰 학술심포지엄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한국인으로 최초로 미국에서 법학박사(JSD) 학위를 받고 1950년대부터 한국법과 법학을 세계적으로 알리고, 최신의 법이론으로 법학수준을 올리는 견인차였던 그는 한국 법학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학자이다.

유기천은 1915년 7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1943년 동경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도호쿠(東北)대학에서 조수로 있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교수를 거쳐 새로 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한편 법학자 유기천의 생애는 정치에 의해 운명지어졌다. 부친이 공산당에 희생된 그는 항상 정치에 주목했는데, 해방 후 1946년 한국청년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회장 김규식, 부회장 엄요섭과 김태욱, 총무부장 이규석, 조직부장 김익준, 연구부장 유기천, 선전부장 김동리, 정훈부장 선우기성, 조사부장 장준하, 체육부장 김은배였다. 지식계층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애국운동을 하였다.

6·25동란에는 서울법대 학장 서리로 부산에서 행정을 맡았고, 1952년에 유학하여 하버드와 예일에서 연구하였다. 1960년대 초에 서울법대에 비교법연구소를 세워 지금도 법학연구소로 내려오고, 사법대학원을 세워 12년간 운영하다 오늘날은 사법연수원으로 변모되어있다.

학자로서 한국형법을 영어와 독어로 번역하여 세계법학계에 알렸고, 부인 실빙박사와 함께 영독어로 서양 학술지에 발표하여 한국법학의 위상을 높였다. 1959년 하와이의 동서철학자대회(East-West Philo sophers Conference)에서 기조발제를 하기도 하였다.

이런 그가 박정희의 개발독재와 인권유린에 저항한 것은 용기있는 학자상을 보인 것이라 하겠다. 서울대 법대 학장, 교무처장을 거쳐 1965년 제9대 서울대 총장직을 맡았다. 한일회담 반대가 대학가를 풍미하던 당시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역설해 어용총장이란 비판도 받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학에 병력을 투입하지 말라는 발언을 한 뒤 신변안전을 위해 권총을 소지하겠다 하여 ‘쌍권총 총장’이라 풍자되기도 했다.

1971년 경찰의 학생 시위 과잉진압에 대해 “백주에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횡행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등 정권과 대립하다 망명길에 올랐다. 1972년 초 푸에르토리코대학의 객원교수를 거쳐 샌디에고 로스쿨 교수를 지냈다. 1981년 ‘서울의 봄’ 때 일시 귀국했으나 5·17 군사정변을 보고 황급히 도미했고, 1990년대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를 중재하다 실패했고 대통령 출마를 결심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도합 26년을 살며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염원하다 1998년 6월 26일 작고하였는데, 그것은 세계적 형법학자인 부인 헬렌 실빙(Helen Silving, 1906~1993)이 작고한 5년 후였다. 두분 다 한국의 포천 산정현교회 묘지에 묻혀있다.

작고 후 후학과 제자들은 바로 유기천기념사업위원회(회장 노융희)를 만들고 기념재단(초대 이사장 황적인, 현재 이사장 유훈)을 세워 각종 기념사업을 하고있다. 무엇보다 유기천의 논문을 모은 ‘자유사회의 법과 정의(2003)’와 추모문집 ‘영원한 스승 유기천(2003)’을 내었고, 필자의 전기 ‘자유와 정의의 지성 유기천(2003)’도 나왔다. 예일대 박사학위논문을 중심한 영문저서 ‘Korean Culture and Criminal Responsibility’(2012)와 ‘유기천과 한국법’(2013)도 나왔다. 매년 가을 월송기념심포지엄이 열려 금년에 제9회에 이르고, 유기천법률문화상과 연구비지원을 하고 있다.

이처럼 법학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기념하는 것은 그가 생전에 주창한 이념이 한국법과 법학의 정신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의(justitia)와 신의(fides)를 강조하였고, 이러한 정신 아래 철저한 법률가양성교육을 주장하였다. 1995년부터 시작된 로스쿨제도의 논의에서 유기천의 법학사상이 자주 언급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로스쿨이 이루어졌다고 그의 정신이 실현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그 이상의 것을 꿈꾸고 설계하였다. 그 꿈이 정치권력에 의해 좌절되었는데, 그 꿈은 아직도 한국법학과 사법의 과제이다. 금년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깊이 되돌아보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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