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개항은 빨랐다. 1897년 그 문을 열었고 일본인들이 떼로 몰려와 살았으며 일제 시대 때에는 조선의 5대 도시로까지 불렸다고 하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호남선의 종점이자 바다에서 떨어지는 첫 호남 땅 목포의 전성기는 단연 일제 강점기였다. 그리고 그 절정에 달했을 때는 1930년대였다고 한다.

“내 고향은 남쪽 목포항입니다. 어디든지 그렇지마는 항구에서 자라난 처녀들은 노래를 무척 즐기지요. 나도 그랬습니다. 망망한 대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외로운 바위 위에 홀로 앉아서 석양이 어물어물 떨어지는 서쪽 하늘을 우러러 희망의 노래를 부른답니다. 그러면 비단결 같은 푸른 물결은 내 노래를 싣고 하느적 하느적 이 항구에서 저 항구, 저 항구에서 또 다른 항구, 이렇게 전 세계의 항구란 항구에는 모조리 들려서 나의 노래를 전해 준답니다. 아니 전해주는 것 같이만 생각되지요(1939년 인터뷰 기사- 오마이뉴스 2006. 3. 31. 중)”라고 얘기했던 한 여가수도 그 정기를 받고 자랐다.

그녀의 이름은 이난영이었다. 그녀는 목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 복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듯 아버지는 주정뱅이였다고 전해지고 그녀도 초등학교 4학년 이상 교육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일하고 있던 제주도로 건너가면서 그녀의 음악적 재능이 눈에 띈다. 그녀가 아이를 봐 주던 일본인 집주인은 극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이를 보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이난영의 목소리에 혹한 것이다. “아, 이 아이노 목소리노 좋다데스.” 그녀는 막간 가수로 주인의 극장 무대에 서게 된다. 또 이를 계기로 가극단의 가수로 발돋움하게 된다.

1930년대 가장 두드러진 ‘민족지’라면 조선일보였다.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기자들이 판을 쳤던 그 시대 조선일보는 동아일보를 능가하는 항일 민족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전국의 주요 도시의 ‘애향심’을 주제로 한 노래 공모를 한 것은 그 숱한 활동의 하나일 뿐이었다. 수천편의 응모작 가운데 1위를 한 것이 목포 출신의 시인 문일석의 ‘목포의 노래’였다.

여기에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레코드사에서 제목을 살짝 비튼 것이 ‘목포의 눈물’이었으며 이 노래를 부른 영광을 차지한 것이 이난영이었다. 공전의 히트라는 말 외에는 이 노래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식민지 조선의 그 팍팍한 현실에서 25만장의 레코드가 팔려나갔다면 말 다한 것이다. 그 노래가 흘러나오는 곳 어디서건 조선인들은 귀를 기울이며 가사를 달달 외우고 눈을 감고 젓가락을 두들겼다. 그 주인공이 이난영이었으니 가히 톱스타랄 수밖에.

그러나 해방과 전쟁은 그녀의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했지만 전란통에 김해송은 납북됐다. 당시 북한의 문화예술인에 대한 집착은 꽤 대단했다. 최은희같은 배우도 납북당했다가 구출됐고 신카나리아 같은 경우는 납북 도중 폭격을 받는 틈을 타서 탈출했다. 김해송은 납북되었다고도 하고 월북했다고도 하는데 분명한 것은 얼마 못가 죽었다는 것이다. 한편 납북자와 월북자를 구분할 만큼 눈이 밝은 세상이 아니었기에 ‘오빠는 풍각쟁이야’의 김해송의 노래는 된서리를 맞았고 작곡가를 바꿔서 살아남기도 했다. 그 가족, 이난영의 가족들의 형극이야 더 보탤 것도 없었으리라.

그 고생 속에 이난영은 부모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아이들을 화려하게 길러냈다. 김시스터즈가 그들이다. 그들은 미 8군 무대에서 활약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라스베가스에서 고액 납세자 랭킹을 다툴 만큼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냈다. 빌보드차트 7위까지 올랐다고 하니 오늘날 싸이나 한류가수들의 대선배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난영은 그들과 영화를 같이 하지 못했다. 한국에 남은 그녀는 후배 가수 남인수와 사랑에 빠진다. 김시스터즈는 어머니의 발목을 잡은 남인수를 못마땅해했다고 하지만 이난영은 잠시나마 남인수와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폐병 환자였던 남인수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한다. 그런데 남인수에게는 본처가 있었다. 작곡가 손목인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날 마지막 소원처럼 그 본처를 불러들인 남인수는 이난영과 살던 집을 덜렁 본처에게 줘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난영은 끝까지 그를 버리지 않았고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한다.

남인수가 떠난 후 그녀는 술로 살았다. 아마도 그때마다 목포의 눈물이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1965년 4월 11일 이난영은 갔다. “이별을 서러워하는 눈물도 없이 홀로 누운 침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조선일보 1965. 4. 13.).” 고인의 시신 주변에는 양주병이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장례식은 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 집회와 시위가 여의치 않았던 시절, 그녀의 장례식은 특별 케이스로 허가됐다고 전한다. 그리고 회현동의 그녀의 집에서 오늘날의 세종문화회관 근처까지 거의 모든 연예인들이 상복을 입고 행진했고 시민들은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며 그녀를 보냈다고 한다. 목포의 눈물 하나로 한 시대를 장식했던 가수는 그렇게 갔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