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작(趙善作)이란 작가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의 가파른 외길을 걷던 1970년대 초반에 ‘영자의 전성시대’라는 소설로 등장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당시 뜻을 같이 하는 몇명의 평론가들이 신문사 신춘문예를 통한 작가발굴의 한계를 느끼며 신춘문예에 탈락했으면서도 문학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을 한번 찾아보자고 하여 등단시킨 것으로 안다. 작가는 현실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 그중에서도 소외된 저변층의 모습에 앵글을 맞추며 우리의 이웃인 그들이 겪는 아픔을 리얼하게 그려냈다.

영자는 당시만 해도 너무나 흔한 여자이름이었다. 소설에서의 영자는 식모, 버스차장, 창녀로 전락을 거듭한다. ‘전성시대’라는 말이 또 묘하다. 버스차장을 하다 팔 하나를 잃어버려 손님을 잘 받지 못하는 창녀인 영자에게 화자인 ‘내’가 조언해준 대로 나무 팔을 하나 대니 손님을 많이 받게 되었다는 의미로 ‘전성시대’를 누렸다는 것이다.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지독한 반어법적 묘사이다.

그런데 이 반어법적 표현을 쓸 수 있는 영역을 우리 주위에서 여럿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 하나로 명예훼손분야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도저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로 명예훼손에 관한 주장이 크게 늘었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권리신장에 크게 도움이 된 측면이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반면 명예훼손의 전차가 거칠게 지나간 곳에는 ‘언론의 자유’라는 고즈넉한 들판이 엉망진창으로 바뀌어버릴 수 있다.

미국의 스튜어트 대법관이 말한 대로, “어떤 개인이 그의 평판에 관하여 불법적 공격이나 잘못된 침해를 당했을 경우 보호받아야 할 권리는 바로 모든 인간존재가 가지는 본질적 존엄과 가치에 대한 기본적 관념, 정돈된 자유를 갖춘 품위 있는 제재의 근원에 있는 관념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명예훼손을 이유로 한 소송을 통해 제한되는 언론의 자유는 민주국가로서 우리의 공동체가 가지는 가장 고귀한 핵심이다. 요컨대 양자가 적당한 조화를 이루어야 공동체의 이념을 살리면서 개인 인격의 일체성을 담보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는 지금 명예훼손의 피해구제 쪽에 과도하게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명예훼손의 전성시대’라는 반어법적 표현을 쓴 것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적 조류와 동떨어져 명예훼손에 대해 너무나 가혹한 처벌을 하는 ‘절해고도(絶海孤島)’이다.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선 형사고소부터 제기한다. 대부분의 문명국에서 민사적 손해배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 법체계는 형사책임까지 지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찰이나 검찰에 고소해두면 국가의 수사력이 고소인을 대신해 처벌의 근거를 찾아주기 때문에 피해를 당했다고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용이 너무나 손쉽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한국의 수사기관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헌법적 신념을 결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헌법적 고려는 빼먹은 채 눈앞의 피해에 정신을 빼앗기며 고소인 측에 유리한 결정을 하기 십상이다.

그동안 우리 대법원은 명예훼손의 영역에서 언론의 자유와의 균형을 꾀하기 위한 방책을 끊임없이 강구하여 왔다. 미국 연방대법원의 이론을 받아 우리 현실에 변형시킨, 한국식 ‘현실적 악의론’, ‘의견과 사실의 이분론’ 및 ‘진실오신 상당이유론’ 등 섬세한 조정의 손길을 미쳐왔다. 그런데 이런 대법원의 선구적 태도는 하급법원에서조차 충분히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을 뿐더러 경찰이나 검찰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시야를 좀 더 넓혀보자. 국제법적으로 우리의 명예훼손법제 및 처리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유엔인권위원회가 그 준수 여부를 정기적으로 또 문제가 생긴 경우 수시로 평가하는 ‘UN 시민 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ICCPR: 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에서 명예훼손에 관한 부문을 읽어보면, 우리의 명예훼손 전성시대는 그 방향을 대단히 잘못 잡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이 규약에서는 명예훼손의 비형사범화를 촉구하며, 아주 심각한 경우에 한하여(in the most serious cases)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되 구금형은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사회의 명예훼손사범에 대한 취급은 중요한 국제법규인 위 규약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다. 하루 빨리 우리도 위 규약의 취지에 맞게 절해고도의 상태를 벗어나, 글로벌 기준을 충족하는 보편타당한 명예훼손 처리방식을 수립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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