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드로 공항에서 런던시내로 들어가는 길. 차창 밖으로 잿빛 하늘에서 아직은 차가운 부슬비가 내렸다. 역시 런던다운 날씨로 환영해주는군. 시가지로 들어서자 일요일 오후인데도 교통체증으로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데, 덕분에 주택가가 늘어선 켄싱턴(Kensington)과 나이츠브리지(Knights bridge)를 천천히 구경할 수 있었다.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자마자 곧바로 택시를 타고 전야 행사인 환영리셉션으로 향했다. 장소는 홀번(Holborn)에 있는 왕립재판소(Royal Courts of Justice). 대리석 모자이크 바닥에 드높이 치솟은 아치형 천장과 기다란 스테인드글라스들로 둘러싸인 널따란 중앙홀은‘서울촌놈’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래도 대한변협을 대표해서 왔으니 주눅들면 안 되지! 스스로를 다잡으며 낯선 인파를 헤집고 세계 각국에서 온 법률가와 외교관 등 만나는 사람마다 준비해 간 명함을 건네면서 우리 신임 집행부의 출범을 알렸다. 일요일 밤이었으므로 아직 서울에서 월요일(2월 23일) 집행부 취임식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이었지만.

다음날 아침은 좀 쌀쌀하지만 너무도 쾌청해서 행사가 시작되는 회의장까지 걸어가는데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Global Law Summit 2015’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내걸린 행사장은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Westminster Abbey) 바로 앞의 현대식 건물이었는데, 좌측 건너편에는 국회의사당(House of Parliament)과 빅벤(Big Ben)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회의장에 들어서니 이번 행사에 대한 안내가 눈에 띄었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제정 800주년에 그 전통과 가치를 기념’,‘영국 법무장관 주최의 행사’,‘전세계 로펌들과 사내변호사, 법학계와 비즈니스 및 정·관계 인사들이 참여’ 등등.

‘마그나카르타’라니! 고등학교시절 세계사 수업이 떠올랐다. ‘대헌장’으로 번역되는 이 문서는 사자왕 리처드 1세의 동생인 존 왕이 즉위한 후 프랑스에 패하여 노르망디를 빼앗기고도 과도한 세금까지 매기자 귀족들이 들고일어나 1215년 6월 15일 존 왕으로부터 승인을 받아낸 것으로, 귀족들의 봉건적 권리를 재확인한 것일 뿐 정작 민주주의적 요소는 없다. 그렇지만 무려 800년 전에 국왕한테 압력을 넣어 비록 귀족들의 보호를 위한 것이긴 하나 세금징수와 인신의 체포, 구금, 재산박탈을 국왕 마음대로가 아니라 오늘날로 치면 의회의 동의나 법정재판 비슷한 절차에 의하도록 성문화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영국인들을 목에 힘주게 만드는 자랑스런 역사임에 틀림없다.

그처럼 오래 전부터 ‘법치주의(rule of law)’를 일궈낸 나라이건만, 오늘날 영국에서도 법률가와 법률문화는 여러 곳에서 도전에 직면한 듯했다. 회의의 주제들은 경제활동이 세계화되고 생활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법의 지배가 어떻게 유지·관철될 수 있을지를 다각도로 다루고 있었다. 사법제도의 접근성(access to justice)과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은 현대 영국은 물론 유럽 법조계에 팽배한 화두로 보였다. 나아가 정보접근성의 증대와 소셜네트워킹, 인공지능과 로봇공학 등의 여파로 법률영역에서도 인터넷을 통한 법률진단, 원격법률자문(tele-lawyering), 온라인 분쟁해결제도, 가상변론(virtual hearing) 등의 도입이 논의되고, 수많은 법률 관련 직업들이 기계에 의해 대체되는 등 지난 100년보다 더 많은 변화가 앞으로 다가올 10년 내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경고를 들으면서, 법조경력 20여년에 이제 나름 직업적 여유를 꿈꾸어 온 나로선 일종의 현기증에다 약간의 짜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사는 게 끝이 없네!

회의 도중 짬을 내어 영국변호사회 두곳의 회장들을 면담했다. 법정변호사회(Bar Council of England and Wales)는 대한변협과 청년변호사의 연수교류를 3년째 해오고 있고, 사무변호사회(Law Society of England and Wales)에서는 올해 1월 말 회장단이 내한하여 ‘영국 법의 날(English Law Day)’ 행사를 가진 바 있다. 양쪽 협회장 모두 한국법률시장의 현황과 대외개방 및 영국 법조계와의 교류협력 확대에 큰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들으며 역시나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실감하였다.

3일간의 짧은 일정을 끝내고 다시 히드로공항으로 향하는 날, 또다시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며 환송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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