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금 새해를 맞는다. 을미년(乙未年), 푸른양(靑羊)의 해란다. 이른 아침 수변공원 산책로를 찾았다. 빼곡한 갈대숲 사이로 이어지는 이 길을 걸으며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인생의 한 겨울을 맞는 나이여서 그런지 올해는 새해를 맞는 감회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농구로 치면 4쿼터 중반, 풀코스 마라톤에 비유하면 40㎞지점을 힘겹게 지나고 있는 나이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마음을 텅 비우라고 한다. 일응은 맞는 말이다. 근심, 걱정한다고 꼬인 일이 풀릴 것도 아니고 뼈저린 후회를 되풀이 해봐도 잘못 살아버린 인생을 다시 살 수도 없다. 욕심을 부린다고 바라는 대로 이룰 수도 없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얼마 남지 않은 살날을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지? 정말 답은 없는 것일까? 아무래도 주어진 현실, 현재의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체의 모든 조직과 그 기능은 쇠퇴해지고 저하된다. 검던 머리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팽팽했던 얼굴엔 주름살이 깊게 패인다. 치아도, 시력도, 청력도 그 기능이 전과 다르다. 이 모든 변화가 자연의 섭리요 이치라고 순순히 받아들이자.

우선, 다행한 일, 감사해야 할 것부터 찾아보자. 귀는 아직까지는 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 감사하고 눈은 침침하지만 그래도 신문도 보고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다. 아침마다 제 발로 한 시간쯤 산책을 할 수 있으니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고 느낀다.

같이 늙어가는 마누라도 두개의 암을 이겨낸 후 더는 재발하지 않고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잘 움직이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자다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끔씩 내 손목을 더듬어서 짚어본다는 평생 도우미가 여태껏 내 곁에 있으니 이 또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자식들은 어버이가 어디가 성하고 아픈지 건성이다.

고희가 휠씬 지난 이 나이에도 아직은 자식들한테 손 벌리지 않고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 할 수 있는 일터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여지껏 내 가족만을 생각하고 내 잇속만을 챙기면서 아등바등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인생이고 죽으면 썩을 육신이다. 가진 것이 없어 나누고 베풀 처지가 못 된다면 몸으로라도 움직여서 터득한 지혜와 경험을 밑천으로 누군가 삶의 밑바닥에서 애타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 손발이라도 씻겨주고 눈물을 닦아주며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 한 마디라도 들려주며 살고 싶다.
생을 마치는 그날까지 제발 치매 걸리지 않고 잔병치레 덜하고 추한 모습 안 보이고 눈을 감으려면 건강관리에도 신경을 더 써야겠다.

제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가까운 공원도 수시로 거닐고 동네 동산이라도 자주 오르내리면서 맑은 공기도 마시고 때로는 명상 혹은 사색도 하면서 무조건 많이 걷자. 금연 절주는 필수이고 뜻이 맞는 지인들과 자주 대화도 나누는 것이 노화방지에 좋다고 한다.

얼마 전 ‘힐리언스 선마을’의 촌장인 이시형 박사의 ‘이젠, 다르게 살아야한다’는 책자를 읽은 후 이제 그만 세상 번거로움 다 잊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공기 좋은데서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들으며 그야말로 자연을 벗삼아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도 진지하게 해 보았다. 그러나 이미 몸에 배어버린 안일한 타성과 가족들의 반대가 뻔할 것 같아서 일단은 그 생각을 접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자연스레 사후세계를 자주 생각하게 되고 종교에 관심을 갖게도 된다. 일부에서는 날로 세속화되어가는 종교계를 헐뜯고 개탄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비리와 타락을 두고 종교 그 자체를 폄훼하거나 종교계 전체를 매도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선행을 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한다. 불가에서는 이승의 업보대로 저승에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영생복락을 누리던지 극락왕생을 하던지 자기가 선호하는 종교를 택해서 신실한 믿음생활을 계속 하면서 기왕이면 착실하게 사는 것이 나약한 인간이 사후를 대비하는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앙상하던 나목에 하얀 눈꽃이 탐스럽다. 왠지 몸과 마음이 시리고 서글프다. 그렇다, 곱게 물든 단풍이 봄꽃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인생 여정은 순간의 모음이다. 순간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 하루가 모여 일생으로 이어진다.

오늘 하루를 삶의 마지막 날처럼 여기고, 깊이 감사하며 아름답게 마무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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