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 ‘미생’이 인기다. 원작이 이미 크게 흥행한 뒤라 지금 와서 이야기하자니 뒷북인 감이 있지만, 드라마는 또 새롭다. 주인공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맑아지고 한 주의 피로가 풀리는 것만 같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회사생활과 그 안에서 나뉘는 거미줄 같은 촘촘한 인간관계와 권력구조는 흥미롭다. 조직 내 희생을 강요하고 미화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마음 속 깊숙한 곳을 묵직하게 찌르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곳에는 현실에는 가능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인물인 오 차장이 있다. 그는 일에 있어서는 분명하고, 사업상 만연해 있는 거래처와의 뒷거래나 리베이트 같은 부정에는 단호했다. 자신의 일에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고, 자신의 출세나 이익보다도 자신의 사람을 아꼈다. 드라마 안에서 그는 비웃음거리다. 실적보다는 양심을, 자신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사람들을 챙겼기에 출세도 더디고, 그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도 늘 고생을 한다. 그 오 차장 밑에는 주인공인 계약직의 말단 직원이 있다. 아무런 스펙도, 기본적인 관련지식도 쌓지 못한 그는, 그러나 그렇기에 더 열심히 일했고, 불만이 없었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자기검열이 없었다. 그리고 오 차장은 그런 말단 직원이 더 일을 할 수 없음에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는 일만 성사되면 계약직도 정규직이 될 수 있는 힘이 주어지는 위험한 일을 강행하려 했다. 팀원들은 오 차장을 알기에 그를 만류했다. 하지만 오 차장은 강행하려 했고, 이 어울리지도 않는 위험한 일을 왜 하려는 것인지를 알게 된 말단사원은 자신 때문에 전체 팀이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며 진심을 담아 오 차장에게 말했다. “저를 구제해 주시려고 하는 그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그 마음, 우리가 어느새 잃어버린 그 마음이 거기에 있었다.

보는 사람은 알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현실은 냉정하고, 관행이라는 것은 공고하며,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정말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그리고 잠시나마 그런 사람을 바라보고 싶다는 바람이 우리의 가슴을 적신다.

요즘이라고 할 것도 없이 계속해서 양보 없이 서로 대립으로 치닫고, 잊어서는 안 될 일들을 쉬이 놓아버리는 많은 현실들을 보면서 관용과 측은지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타인에 대한 이해, 단순한 동정이 아닌 안타까운 공감. 모두 밥벌이를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서도 누군가의 절규에는 결국은 돈벌이나 밥벌이 때문이 아니냐며 차갑게 외면했고, 부당함을 알면서도 결국은 나랑은 상관 없는 일이라며 생각을 접었다. 사회의 각박함은 한 세대를 지나 아직 사회에 나오지 않은 자들에게도 전해졌고, 생각과 사유를 위해 충분한 시간이 허여되어야 할 젊은 사람들은 진지한 고민을 할 시간이 주어지기도 전에 사회로 내몰렸다. 그리고 그렇게 쫓기고 쫓긴 사람들은 언제나 하루하루도 녹록지 않았기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고, 포기한 대신에 관용을 잃었다. 다 그런 거라며, 현실은 냉정하다며, 이 일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거나 그래야 배우는 게 있을 거라며, 자기합리화하던 것을 당당한 명분으로 굳혀갔고, 서로는 서로에게 할퀴고 상처를 주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 받았다. 따뜻한 말 한 마디로 충분했을 것을 감정을 실어 모진 말로 토해내기도 하고, 타인에게 가혹한 것이 조금씩 아무렇지 않아지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당장 내가 낭떠러지에 떨어질 순 없다는 생각에 내가 먼저 사는 것만 생각했고, 내가 힘이 들기 때문에 나에게만 관대했다. 내 말과 행동이 어디까지 뻗어가고 있는지를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측은지심이라는 인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마음은 점점 모자란 자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과 짜증으로 변해갔다.

미생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오 차장 같은 상사, 장그래 같은 팀원을 바라는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가. 결론은 같을지라도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는 그 마음 한번 보여준 적이 있었던지.

새해라고 다를 것이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새해라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보자면, 새해에는 좀 더 너그러워 졌으면 좋겠다. 짜증과 교만, 속단을 버리고 그만큼 넓어진 마음에 신뢰와 관용, 온정이 깃들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가족들에게도, 함께 하는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더 따뜻해야 한다. 많은 것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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