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예술극장은 감회어린 공간이다. 객석에 앉으면 언제 저 무대에 오르나 싶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끔 연극무대에 섰었다. 어린 시절을 보낸 대구에 구멍가게만한 TV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인연이 되었다. 나중에 ‘대구MBC’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지만 ‘영남TV’가 대구백화점 8층에 세를 들었다. 백화점 건물에 스튜디오를 설치하였으니 카메라를 뒤로 빼면 천장에 설치한 조명이 화면에 다 걸리던 시절이다. 아마도 처음부터 MBC 프로그램을 받아서 편성을 할 생각이었을테고, 자체 제작 프로그램으로는(‘로컬’ 프로그램이라 불렀다) 어린이 시간과 지역 뉴스가 전부였던 시절이다. 얼마 지나서 야심차게 쇼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니, 가수로 활동하던 왕손(王孫) 이석 선생이 사회도 하고 중간 중간 노래도 불렀다.

어린이 시간에는 주로 단편 어린이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드라마의 주인공 자리를 한번도 내 주지 않았다. 방송사는, 어린이용이지만 어쨌든 드라마 흉내를 내려니 성인역(役)에는 연극배우들을 섭외하였고, 연출로는 당시 지역 연극계의 기둥이었던 이필동 선생을 모셨다. 이필동 선생은 전 문화부 장관 이창동 감독의 맏형님으로서 명문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로 진학한 특이 경력자였다. 선생은 후에 당신이 연출하는 작품에서 아역이 필요할 때마다 나를 부르셨다. 덕분에 대학극에서는 대학생 누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고, 직업 극단에서는 궁핍한 연극배우들의 일상을 명료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국내 첫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의 작가 황유철 선생님은, 대구에서 초연을 한 연극 ‘배비장전’에 원작에 없는 ‘서동’이라는 배역을 일부러 만들어 주셨으니(주인공 ‘애랑’의 동생이다) 지금 생각하면 황송스러운 일이다.

그렇게 수업 끝나면 연극 연습하러 가고, 일주일에 한번씩 녹화하러 조퇴하고, 공연이 있는 때면 뭉턱뭉턱 결석을 하며 제 멋대로 살다가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 교육열과 전혀 무관하게, 아버지 직장을 옮기게 되면서 어거지로 끌려온 타향이었다.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황량한 환경에 떨어지면서 번잡한 명동과 국립극장이 위안처가 되었다, 수업 끝나면 버스 타고 명동에 가서 미도파와 신세계 백화점을 쏘다니는 게 일과였고, 가끔씩 국립극장 매표소에서 제값내고 표를 사는 유일한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유신을 풍자하는 정치극 ‘우보시(市)의 어느 해 겨울’을 보면서, 우회적이라고는 해도 강한 정권 비판이 허용되는데 오히려 의아하였고, 뮤지컬 ‘철부지들’ 공연 때 사둔 대본으로는 고등학교 연합동아리 시절 내가 연출을 맡아 친구들을 무대에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남산에 ‘국립극장’이 새로 생겼다. 명동에 있던 원조 국립극장이 잠시 ‘명동국립극장’이라고 불리는가 싶더니 이내 민간에 팔려 증권사 사무실로 내부 수리가 되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크게 공분하였다. ‘국립극장’으로 사용되던 유서 깊은 건물을 증권사 건물로 팔아먹는 정부의 단견에 상처가 컸다. 이건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일기장에 분을 푼 기억이 있다(총독부 건물이라는 이유로 중앙청을 깨부술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역사의 정통성은 해방 반세기 뒤에 새삼스럽게 중앙청을 깨부수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흥분했다). 다시 세월이 흘렀다. 나는 변호사가 되었고, 명동의 옛 국립극장을 복원하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우연히 복원 운동을 주도하던 분들을 만난 기회에, 국립극장을 기업에 팔아먹는 한심한 행정에 분노하던 고등학생의 울분을 추억하였다. 유인촌 당시 문화부 장관께도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정말 의미 있는 복원이라고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말을 보탰다.

남산 국립극장과의 ‘영업주체 혼동’을 막기 위하여,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을 한 후 중학생 시절의 들뜨고 꿈꾸는 심정으로 명동을 찾는다. 내부 구조는 달라졌지만 어린 시절 추억의 극장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영혼에 위로가 된다. 이제 살아온 세월의 더께가 약간 있어서인지 로비에서는 극장장부터 원로 연극인들까지 반가운 분들을 한꺼번에 만난다. 오늘은 ‘위대한 유산’에서 내 친구 길해연의 무대 위 모습을 보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카리스마 좋았다’고 문자를 보냈다. 답이 안 왔다. ‘팬 문자 씹는 배짱은 어디서 나오냐’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 밤 늦게서야, 얼굴 안 보고 가서 삐졌다고, 다시 꼭 와야 한다고 답이 왔다. 극장이란 이렇게 역사가 묻어나고, 사람 냄새가 나는 애틋한 공간이어야 제 맛이다. 오래 오래 명동예술극장을 즐기고 싶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