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를 떠올리면 어른들 엉덩이가 전부였다. 초등학교 입학 이전에 가족이 함께 군항제를 다녀 온 기억, 벚꽃이 만개한 거리를 부모님 손을 잡고 하염없이 걸었다. 꼬맹이 눈높이가 어른들 무릎과 둔부 사이였으니 눈앞에는 항상 앞사람 엉덩이가 가득했다. 그렇게 후루룩 다녀왔지만 이후 ‘진해’라는 지명은 생짜배기로 낯설지는 않았다.

50년 만에 진해를 찾은 것은 영화 ‘연평해전’ 때문이다. 감독(겸 제작자)을 소송대리 하여 제작비 10억원을 만들어 준 사건을 기화로, 소송 진행 중 일찌감치 주요 배역을 약속 받았었다. 감독은 ‘연평해전’ 시나리오를 쓰면서 ‘2차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윤영하 소령 부자를 주인공으로, 그에 대응하는 가상의 북한 측 부자를 조연으로 설정하였다(실제로 윤영하 소령의 부친도 해군 장교 출신이다). 나는 윤영하의 북측 카운터파트의 아버지로서, 젊은 시절 대남 침투 작전에 참여하였으나 노년이 되어 체제 모순에 회의를 느끼는 매력 있는 역할이었다.

침투조를 이끌고 서해 밤바다로 몸을 던지는 전쟁영웅이지만 세월이 흘러서는 혈기방장한 북한군 장교 아들과 이념을 두고 다투는 장면이 그럴 듯했다. 웃통을 벗고 물에 뛰어드는 청년의 몸을 만들겠다고 절식과 운동으로 복근을 키웠다. 시도때도 없이 끼니를 거르며 매일 두 시간 트레드 밀(tread mill)에서 걷고 달리고 300회 팔굽혀 펴기로 단련하였다. 가슴 근육도 그럴듯 하고 허릿살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북한 해군 출신 탈북자 여성으로부터 북한말 과외도 성실히 받았다.

감독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영화는 망해도 나는 애잔한 연기 인생에 전기를 이루겠다는 의지였다. 투자자가 변변치 않아 난항을 겪으면서 내 촬영 스케줄이 몇번 미뤄졌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전해 오는 촬영장 분위기는 흉흉하였다. ‘연평해전’ 제작비가 바닥났다는 조선일보 칼럼이 상황을 바꿨다. 성금이 모이고, 대형 배급사가 관심을 보이고, 새로운 스텝으로부터 인사 전화가 왔다. CJ E&M과는 투자비 규모로 이야기가 멈칫멈칫하기에 중재를 시도했으나 진전이 없었다. 그 사이 ‘NEW’가 나서면서 ‘NEW’와 급속도로 투자배급 계약이 이루어졌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NEW’가 대본을 시비하였다. 현재 대본대로 촬영을 하면 3시간짜리 영화가 되어서 통제 밖이라는 설명이었다. 북한측 배역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내 배역도 날아갔다. 뱃살은 살짝씩 오르고 짜증은 나날이 심해졌다. 감독이 보내 온 최종 대본에는 도대체 연령대가 맞는 배역이 없었다. 기껏 던져준 게 ‘2함대사령관’, 타이틀은 화려하나 대사는 한 문장에도 모자랐다.

약속한 촬영일이 하루 연기되더니 저녁까지도 현장 집합 시각이 오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서 ‘11시50분 콜’이라는 문자가 왔다. 잠시 후 조감독이 현재 머리모양을 핸드폰으로 찍어 보내 달랬다. 헤어 담당이 전화를 했다. 머리카락을 왕창 잘라야 하니 10시 반까지는 진해 시내 미용실에서 만나야 슛시간을 맞출 수 있다며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촬영 시간에 부담 주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쳤다. 두 시간을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시동을 걸었다. 진해시 미용실 주소를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하니 경남에는 ‘ㅈ’으로 시작하는 도시가 아예 없었다. 수입차의 덜떨어진 내비게이션을 욕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급하여 일단 경부고속도로에 올랐다. 대구 가까이에서 휴게소로 들어갔다. 지도를 살폈다. 창원과 진해가 인접해 보였다. 창원까지 가면 출근 무렵이라 택시가 다닐 테니, 택시를 앞세워 미용실을 찾아야겠다 싶었다. 내비게이션에서 창원을 찍었다. ‘창원시’ 다음 화면에서 ‘진해구’가 확 눈에 들어왔다. 허무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였다.

해군사령부 내에서 촬영이 진행되었다. 사령부 풍광은 하와이 이상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별 둘을 단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지나가던 영관 장교들이 모두 경례를 붙였다. 우아하게 받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오후 스케줄은 내 씬 하나가 전부였다.

2002년 연평해전 당시 현장에서 근무하였다는 해군장교가 그날의 급박하던 순간순간을 세밀하게 스케치하였다. “우리 사령관님보다 더 사령관 같다”고 놀렸다. 상황실 한 씬을 위해 오후를 꼬박 소비하고, 밥차에서 저녁을 먹으며 촬영팀과 작별인사를 하였다. 화물트럭 사이를 곡예하며 집에 오니 새벽 2시 40분, 대사 한줄을 위해 12시간을 운전하고 12시간을 대기한 셈이다. 언제나 제대로 배우질을 하나, 한숨이 훅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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