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은 당대를 기술복제시대라 정의하고,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로 사진기술의 발달과 그로 인한 예술 작품의 아우라 상실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대상을 끊임없이 복제, 재생산할 수 있는 사진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기존의 회화 예술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아우라는 붕괴되지만, 거꾸로 예술은 대중성을 획득하여 확산, 발전하게 된다고 벤야민은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사유는 1930년대라는 특정한 시기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일어난 미디어, 정보 등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복제’라는 개념이 한 세기에 가까운 시간차를 극복하고 현재까지도 그의 철학이 힘을 갖는 이유에 대한 실마리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 철학자의 사유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만큼, 19세기 초 급속히 발달한 ‘복제’기술은 여러 분야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건축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기 사용되기 시작한 청사진은 건축에서 작동한 복제기술로, 이전보다 손쉬운 사본 재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당시에 복사기 같은 장비가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복잡한 설계도면의 사본을 그려내는 일이 설계를 새로 시작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당연히 도면의 수도 적었고, 이를 접할 수 있는 사람도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영국에서 청사진이 개발되어 보급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도면을 일일이 손으로 베끼는 대신, 반투명한 용지(트레이싱지)에 도면을 그리고 나서 인화지에 겹쳐 놓은 뒤 일정시간 빛에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사본을 얻을 수 있었다. 그만큼 시간과 인력을 덜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필름 사진의 인화 과정과 매우 흡사한 이 청사진 기법은 1990년 초까지만 해도 대형 도면의 사본 제작에 주로 사용되는 방법이었다. 복사기와 출력기가 수용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선 도면은 청사진을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가 다니던 대형 설계사무소에서도 도면 검토, 납품, 협력 업체와의 협의 시 주로 청사진 도면을 사용했다. 대형 트레이싱지에 직접 손으로 그린 원본 설계도만큼은 아니어도, 이 청사진 도면에는 원본 제작자의 미세한 감각까지 복사되었다. 선의 굵기와 선명도를 통해 드러나는 손끝의 완급 조절까지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바로 청사진이었다. 최근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진행된 건축 전시회에서 도면 원본과 함께 청사진 사본이 전시되는 이유도 이러한 활용도와 전달력 때문이다.

청사진이 사라진 것은 20세기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정보통신혁명의 연장선 상에 있다. 디지털 복제시대가 열린 것이다. 과거 예술의 개념을 뒤흔들었던 사진이 필름이 없는 디지털 카메라로 인해 또 다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건축에서도 원본 설계도라는 개념은 아예 사라졌다. 컴퓨터 화면을 통해 보이는 가상 도면을 보고 프로그램 단축키 하나로 선을 그렸다 지우고, 면을 복사하고, 똑같은 공간을 반복시킨다. 간단한 조작으로 손쉽게 이루어지는 디지털 복제는 언제 어디서든 정보와 기호로 되살아나 또 다른 도면을 생성해 낸다. 파일로 저장된 이 도면이 어디론가 전송되어 출력되면 원본과 똑같이 복제된 도면이 무한대로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복제기술로 인한 예술의 보급과 발달을 예견했지만, 디지털 시대의 건축도 과연 그런 것일까? 무한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환경으로 인해 도면이 가진 정보가 널리 보급되었고 건축은 대중화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의 건축이 과거에 비해 더욱 발전했다고 볼 수 있는 걸까?

학기가 시작하는 시기가 되면, 필자에게는 으레 건축과 학생들이 보낸 여러 통의 메일이 도착한다. 수업과제로 필자가 설계한 건물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설계도면 파일을 보내주셨으면 한다는 내용의 메일이다. 이는 원본이 유일하게 하나만 존재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원본이 원본이 아닌 시대. 비단 건축과 학생들뿐만 아니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가 쉽고 빠르게 똑같은 질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다.

디지털 생성물은 무한 복제 및 공간을 초월한 전달이라는 명분 하에 여러 종류의 파일로 만들어져 저장장치에 보관된다. 하지만 플로피디스크가 무용지물이 된 것처럼, 자꾸만 변화하는 저장장치의 형식은 과거 자료에 대한 접근을 차단해버리기도 한다. 과연 종이에 그려진 원본보다 디지털 저장 장치에 보관된 눈에 보이지 않는 데이터가 더 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아주 작은 실수로 한순간에 모든 데이터를 잃을 수도 있는 아슬아슬함 또한 디지털 시대의 특징이 아닌가?

지식의 대중화를 넘어 원본이라는 개념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지금,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상실’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고, 가벼운 말과 글로 대응하는 우리에게서 과연 ‘아우라’를 찾아볼 수 있을까?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익숙해진 나머지, 시간의 누적을 통해 얻어지는 각자의 개성과 깊이를 우리는 그야말로 ‘상실’해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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