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은 인간이요, 법과 인간은 역사 속에만 존재한다. 어제의 정의가 오늘의 부정의가 될 수도 있다. 법을 제도와 기술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의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은 역사의식을 명민하게 가져야 한다. 실정법만이 아니라 자연법에 대하여도 숙고해야 한다. 세대적 정의는 우리 사회에서도 난제의 하나이다.

필자는 33년간 대학에서 법사상사를 강의하고 정년퇴임을 하고나니 더욱 이런 생각이 강해진다. 요즘 법률가와 사법이 국민의 눈에 비치는 전체상이 이런 역사적 안목에서 좀 더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바람직한 현실적 처방책을 제시해줄 능력이나 입장도 아니지만,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법과 인간, 특히 법률가가 어떤 다이내믹스를 이루며 우리의 법조사 내지 법학사를 이루어왔는지 수시로 생각나는 테마를 기약없이 자유롭게 적어보고자 한다.

1945년의 해방이 벌써 70년을 바라보는 때가 되어가는데, 한일관계가 아직도 정상화되지 못하고 역사적 뒷걸음질을 벗어나지 못해 안타깝다. 법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일본법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3년간 미군정이 개입되면서 더욱 혼란스런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때의 얘기부터 시작해보기로 하자.

일제시기에 동우회 사건이란 것이 있었다. 1937년에 일제는 안창호, 이광수, 김동현, 조병옥, 김윤경 등 40여명의 민족지도자들을 독립운동을 음모한다는 혐의를 씌워 잡아들였다. 1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는데, 당시 최대의 사상검사 나가사키 유조가 항소하여 2심에서 이광수를 징역 5년으로 하여 기타 3년, 2년 반의 유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조선인 변호사 김병로, 허헌, 이인 등과 일본인 변호사 총 13인이 상고하여 1941년에 다시 전원 무죄를 받아내었다. 이것은 일제시기 한국법조인의 최대의 사법투쟁으로 기록되어지는 쾌거이다.

그렇지만 4년 반이나 끌어오는 동안 당사자들은 온갖 고문과 회유로 취조를 받고 감옥에서 옥사하는 이도 있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죽음은 춘원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김동인의 부탁으로 친일전향서를 제출하게 하는 이면사도 벌어졌다. 춘원은 ‘나의 고백’에 나가사키 검사를 ‘만나면 성을 돋우는 사람’이라 적었다.

1939년에 춘천고등학교에 다니던 이연호(1919~1999)라는 학생이 춘원의 소설과 논설들을 읽고 감동받아 비밀독서써클(상록회)을 만들었다가 일경에 발각되었다. 고교생 신분으로 2년 6개월의 징역을 살고 나왔지만, 다시 대화숙(大和塾)에서 사상교화를 받아야 했다. 잘생기고 똑똑한, 그리고 그림 잘 그리는 이연호를 본 나가사키 숙장(塾長)은 아들의 가정교사를 삼았다. 지금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되어있는 옛 대법원 옆의 검사장댁(현 한국법학원 자리)에 살았다. 춘원도 백관수랑 대화숙에 와서 강연을 하고 그 경험을 글로 남기기도 하였다. 끈질긴 악연의 연속이랄까.

해방이 되었다. 일제는 물러가면서도 미군정의 비호를 받으며 최대의 안전과 이익을 모색했고, 여기에 나가사키 검사장이 끝까지 활약했다. 그러다 미군에 의해 체포되어 특별심사부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재천검사의 논고로 이천상 재판장은 공문서훼손과 횡령죄로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했다. 나가사키 검사는 자신이 한국인을 징역 보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1개월 복역하고 미군정은 일본관리 불처벌의 원칙으로 그를 일본 후쿠오카형무소로 보내어 석방시켰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후쿠오카 변호사회 부회장을 지내다 1963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교토대학 총장을 지낸 형법학자 다키가와 유키도키(1891~1962)교수의 조수를 지냈고, 문학에 조예가 있어 한국에서 많은 문화인사들과 교류했다. 백백교(白白敎)사건의 주임검사로 장문의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인간적으로는 리버럴한 법률가였지만 공적으로는 검사로서 한국인을 논죄하는 입장이라 춘원과는 악연이 된 것이다. 아들 나가사키 미츠히로는 아버지의 투옥으로 거지가 되어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귀환하여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살다가 2003년에 사망하였다.

필자는 최근 춘원과 이연호의 생애에 관심을 갖고, 이연호 평전을 내면서 새삼 지나간 한일법조사와의 관련에 주목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한국에 있던 일본인, 일본과 중국 등지에 있던 한국인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의 인간사도 사회사의 중요한 테마이다. 지금은 연구자들끼리 네트워크도 잘 이루어져있어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이메일로 바로 묻고 답을 받을 수 있다.

이연호는 그 후 화가목사로 이촌동에서 평생 빈민목회를 하면서 그 일대를 그림으로 남겼다(자세히는 유동식/최종고 저, ‘신과 인간, 미술에서 만나다: 화가목사 이연호 평전’, 한들출판사, 2014). 이연호는 나가사키 검사 부자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 백방 문의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1999년 2월에 타계하였다. 상록회사건이 독립운동으로 인정되어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고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한편 춘원은 6·25때 납북되어 지금 평양의 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다. 남한에서는 ‘친일파’라 하여 다른 훌륭한 업적은 알려고도 하지않고 방치되고 망각되어지고 있다. 필자는 지난 5월 18일 대전국립묘지로 이연호의 묘소에 참배하러 가서 춘원을 생각하면서 이건 역사의 바른 종결이 아니라는 감회를 누를 수 없었다. 그렇게 존경하던 춘원과 함께 두분이 나란히 묻힐 날이 언제 올 것인지, 역사 속에서의 법과 인간이 새삼 복잡하면서도 큰 숙제로 느껴졌다.
 

필자의 말
이번 호부터 33년간 서울법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실들을 역사의식 속에서 자유롭게 이야기식으로 집필할 계획입니다.
특히 법치주의의 발전을 위해 제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 법률가와 법학자의 인품과 자질을 강조해온 법학자로서 한국현대법사에서 체험한 인물들의 족적을 더듬어 의미를 부여해 볼 예정입니다,
오늘날 사법과 법률가에 대한 국민적 비판이 이런 점에서 다소 반성과 다짐의 여유를 찾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필자 약력
1947년 경북 상주 출생, 서울법대 졸업(1966), 동대학원 졸업(1972), 독일 프라이부르크(Freiburg)대학 법학박사(1979), 서울법대 교수(법사상사, 1981~2013 ), 한국법사학회장 역임, 세계법철학회(IVR) 이사 및 집행위원 역임, 현재 한국인물전기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한국법사상사’ ‘한국의 법률가’ 등 법학서 30여권, ‘괴테와 다산, 통하다’ ‘서울법대시대’ 등 일반교양서 20여권, 그외 다수 영문 저서를 집필했으며, 최근 ‘나의 일생: 춘원 자서전(푸른사상, 2014)’을 편집·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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