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은 기쁨이었지만 혼란의 시작이기도 했다. ‘인공(人共)’이 성립하여 자치 조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그들이 과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38선 이남에서 모든 것은 인천에 상륙하는 미군에 달려 있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인천 부두에 달려가 ‘해방군’을 맞이하고 100만 서울 시민이 열광적으로 미국을 환영했던 데에는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함과 기대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미군은 그 어정쩡함을 확고하게 불식시켜 주었다. 상해의 임시정부고 국내의 인공이고 모든 형태의 자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 관리들의 계속 복무를 명령했고, 소요를 일으키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고, 미 군정 시의 공용어는 영어로 한다고 선언했다.

그 즈음 미군이 내린 명령 가운데 하나가 1945년 9월 7일 발표되고 8일부터 시행된 통행금지령이었다. 치안 유지를 이유로 미군 측은 서울과 인천 지역에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통행을 금지했다. 하지 중장 이하 미군 관리들이 별 생각 없이 내렸을 이 통행금지 포고령은 그대로 37년간 한국의 전통(?)이 된다. 전쟁을 겪으면서 통행금지는 전국으로 확대됐고 대략 12시에서 4시까지 4시간이 시민들로부터 ‘압수’돼 왔던 것이다.

37년간 한국인들은 너무도 통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하나의 문화가 됐다. 한국인의 속전속결 술자리도 아마도 통금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설도 있다. 퇴근하고 술자리에 둘러앉으면 7~8시인데 냅다 빨리들 먹고 취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자니 맥주에 양주를 들이부어 폭탄을 제조하는 ‘병기창’이 상시 가동됐다는 것이다. 자그마치 37년 뒤 역사 속으로 ‘통금’이 사라질 때 유력한 반대의 목소리는 “남편들 술자리가 길어질 것”을 우려하는 주부들의 것이었으니 그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그때부터 거리는 무인지경이 됐다. 방범대원과 경찰이 순찰을 돌다가 통금 위반자를 발견하면 불문곡직 파출소로 끌고 갔다. 상갓집에 갔다거나 병원에 가야 한다거나 등등 모든 핑계가 통하지 않았고 4시까지 꼼짝없이 창살 안에 앉아 있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내고 나와야 했다. ‘통금 위반으로 벌금’ 이란 자갈만큼이나 흔한 ‘범죄 사실’이었다.

운이 좋은 곳도 있었다. 정부는 1964년 1월 제주도 일원에 걸쳐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이는 ‘치안상태가 좋고, 생업인 고기잡이 등 주로 통행금지시간에 일해야’ 하는 제주도의 특수사정을 감안하여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65년 3월에는 충청북도 일원의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 그 이유라는 것이 충북 사람들로서는 매우 긍지를 가질만한 것이었다. ‘타도에 비하여 범죄발생이 극히 낮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더 큰 이유는 ‘지리적으로 사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 해안선을 통한 간첩침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지만. 매우 유감스런 사실 하나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통금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얼씬도 못하는 밤거리에서 따로 할 일은 없었겠지만 그 무인지경의 밤거리를 활보하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통금에서 예외가 되는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와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12월 31일이었다. 이 이틀간 도심 거리는 사람들의 발길로 메워지는 정도가 아니라 미어터졌다. 젊은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꼬꼬마들 손 잡은 부모들까지 새벽 1시, 2시의 밤거리를 쏘다니며 해방감을 누렸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집들이라도 아이들이 밤새 동네를 부르며 다니는 새벽송은 일종의 해방의 노래로 관대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연말연시가 끝나면 어김없이 통행금지 단속 강화 조치가 이뤄졌고 수많은 주당과 젊은이들이 ‘임검’에 붙들려 ‘연말연시 분위기에서 깨어나지 못한 철없는 국민’으로서 벌금을 맞고 나와서는 생두부를 씹어야 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하나 있다. 해방 이후에 줄기차게 독재에 저항한 자랑스런 역사가 있는 우리이지만 ‘통행금지 철폐하라’는 요구가 시위대의 주요 이슈로 부상한 적은 드문 것이다. 기실 범죄 예방(이는 통금의 가장 큰 명분이기도 했다) 등을 이유로 전 국민의 하루의 1/6을 빼앗아 가는 만행에 가까운 행정이었음도 자명한데, 통금 자체는 놀랍게도 한국인의 생활에 당연하게 수용되었고, 그에 대한 이렇다 할 문제의식 없이 익숙하게 받아들여졌으며 결국은 아래로부터의 요구 아닌 정권의 결단에 의해 사라졌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찰에 돌을 던지며 독재 정권에 분연히 저항하는 시위를 끝난 대학생들이 “어이 학생 이리 와! 통금 넘었어!”를 외치는 방범대원 앞에 머리 긁적이며 순순히 트럭에 타고 파출소로 향했던 이 묘한 광경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낯선 나라에서 느꼈던 불안감과 치안을 장악해야 한다는 조바심 속에 내렸을 것이 분명한 ‘통행금지령’이 1945년 9월 7일로부터 37년 동안 유지됐다는 사실을 알면 저승에 있을 왕년의 미군정청장 하지 중장 이하 미군 장교들은 “언빌리버블!”을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우리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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