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며
상대방의 실시기술이 특허발명의 권리범위에 속하는 지 여부를 판단하는 권리범위확인심판과, 상대방의 실시기술이 특허발명을 침해하는 지 여부를 판단하는 민사재판은 당사자 처분권주의가 적용되는 등 대체로 동일하다고 볼 수 있지만, 권리남용의 항변 등과 관련하여서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대법원 2012. 1. 19. 선고 20110다95390 전원합의체 판결은 민사재판에서는 특허발명의 진보성 여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고 판시한 반면, 대법원 2014. 3. 20. 선고 2012후4162 전원합의체 판결은 권리범위확인심판에서는 특허발명의 진보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고 판시하여, 그간의 실무를 문언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견 상반된 판시를 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번 판결들은 민사재판과 권리범위확인심판에 내재하는 속성상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다만 이제까지의 실무적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에 의의를 찾을 수 있다.

Ⅱ. 권리범위확인심판의 기능
현실적으로 침해소송을 제기하는 경우에도 권리범위확인심판을 함께 청구하는 사례가 많고, 침해소송을 담당하는 법원은 관련 권리범위확인심판의 결과를 기다려서 권리범위확인심판과 침해소송의 결과를 일치시키는 경향이 있다(권오희, ‘권리범위확인심판에서의 심판대상물에 관한 고찰’, 특허법원 개원 10주년 기념 논문집, 특허법원(2008), 3면 참조).

이와 관련하여 대법원도 민사재판에 있어서 이와 관련된 다른 권리범위확인사건 등의 확정심결에서 인정된 사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력한 증거자료가 된다고 판시하고 있어(대법원 2002. 1. 11. 선고 99다59320 판결 참조), 권리범위확인은 특허침해 여부를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로 활용하거나, 특허침해 여부를 확인함으로써 특허침해 관련 분쟁의 해결수단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침해소송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확정된 권리범위확인심판의 결과가 민사재판을 담당하는 법원을 기속한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대법원 2008. 6. 26. 선고 2006다29235 판결 참조), 민사재판이 권리범위확인심판의 결과에 당연히 구속되는 것은 아니고, 당해 민사재판에서 제출된 다른 증거내용에 비추어 관련 권리범위확인심판사건 등의 확정심결에서의 사실판단을 그대로 채용하기 어렵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이를 배척할 수도 있지만(대법원 2002. 1. 11. 선고 99다59320 판결 참조), 민사재판에 있어서는 다른 민사사건 등의 판결에서 인정된 사실에 구속받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확정된 관련 민사사건에서 인정된 사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력한 증거가 된다 할 것이므로 합리적인 이유 설시 없이 이를 배척할 수 없고, 특히 전후 두 개의 민사소송의 당사자가 같고 분쟁의 기초가 된 사실도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것이므로(대법원 2001. 8. 24. 선고 2000다15661 판결 참조), 분쟁의 기초가 실질적으로 동일한 권리범위확인은 그 자체로서 유력한 민사분쟁 해결수단으로서 기능한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권리범위확인심판은 그 본질에서는 특허권침해로 인한 금지청구권 또는 손해배상청구권의 존부 확인의 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한동수, 확인대상고안의 기술구성을 파악하는 방법, 지식재산 21 통권 105호(2008. 10.), 9면 참조).

Ⅲ. 민사재판과 권리범위확인심판의 비교
대법원 2012. 1. 19. 선고 2010다95390 전원합의체 판결은 민사재판에서는 민법 및 민사소송법의 대원칙인 신의칙에 따라 권리남용의 항변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판시한다. 그에 따라 진보성이 부정되는 특허발명에 근거한 침해금지나 손해배상 청구는 허용되지 아니한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 2014. 3. 20. 선고 2012후4162 전원합의체 판결은 권리범위확인심판은 구체적 사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권리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를 확정하는 것이므로, 별도의 무효심판이라는 절차가 있는 이상, 권리범위확인심판에서 권리남용의 항변을 주장하는 것은 허용되는 않는다는 취지 아래, 특허발명의 진보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이는 선사용에 의한 통상실시권에 관한 판례와도 연결시켜 볼 수 있는데, 민사재판인 대법원 2002. 11. 8. 선고 2002다42254 판결은 선사용에 의한 통상실시권 항변을 이유 있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서울고법 2001. 11. 27. 선고 2001나1135 판결도 실용신안권의 통상실시권자는 설정계약에서 정한 범위 내에서 업으로서 그 실용신안을 실시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므로, 실용신인권자가 실용신안제품을 판매하는 등 실용신안권을 정당하게 행사함으로써 실용신안권은 이미 사용되어 버린 것이 되어 그 양수인 등에 의한 실용신안제품의 판매, 사용은 별도의 실용신안침해를 구성할 여지가 없고, 통상실시권자가 그 설정기간 내에 생산·판매한 경우 그 양수인 등에 의한 실용신안제품의 판매, 사용이 별도의 실용신안침해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본다), 권리범위확인심판인 대법원 2012. 3. 15. 선고 2011후3872 판결은 권리범위확인심판에서 선사용권의 존부에 대해서까지 심리·판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한다(특허법원 2014. 1. 17. 선고 2013허7069 판결은 권리범위확인심판은 특허발명의 보호범위를 기초로 하여 심판청구인이 그 청구에서 심판의 대상으로 삼은 발명에 대하여 특허권의 효력이 미치는가를 확인하는 권리확정을 목적으로 한 것이므로, 설령 원고가 선사용에 의한 통상실시권을 취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사정은 특허권 침해소송에서 항변으로 주장함은 별론으로 하고, 확인대상발명이 특허권의 권리범위에 속한다는 확인을 구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판시한다). 권리범위확인심판을 상대방이 실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발명과의 관계에서 특허발명의 권리가 미치는 범위를 객관적으로 확정하는 것이라고 보는 이상, 선사용권에 관한 주장은 비록 선사용권으로 인해 민사재판에서는 침해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권리범위확인심판에서는 고려할 사항이 아닌 것이다.

또한 특허권의 소진에 관해서도 이와 동일한 취지로 판시하고 있는데(消盡理論이란 ‘물건의 특허’ 또는 ‘제조방법의 특허’에 있어서 특허대상이 된 물건 또는 특허방법에 의하여 생산된 물건이 ‘특허권자’에 의하여 적법하게 판매ㆍ배포되었을 경우 그 권리가 소진 내지 소모되어 당해 물건에 특허권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민사재판인 대법원 2007. 11. 29. 선고 2007다59073 판결(원심인 서울고법 2007. 8. 1. 선고 2006나89079 판결에 대한 심리불속행 기각 판결)은 특허권자 또는 특허권자로부터 허락을 받은 실시권자가 당해 특허발명을 실시한 물품을 양도하는 경우, 특허발명 실시 물품을 적법하게 양수한 자로서는 그 물품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권을 갖게 되므로 그 물품에 관한 특허권은 그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서 소진하고, 그 특허발명 실시 물품을 사용, 수리하는 행위 등에는 특허권의 효력이 미치지 아니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판시하고 있는 반면(특허권자 등이 우리나라에서 특허제품을 양도한 경우에는 당해 특허제품에 관해서는 특허권은 그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소진하고, 더 이상 특허권의 효력은 당해 특허제품의 사용, 양도, 대여, 수입 또는 양도, 대여의 청약에 미치지 않고, 특허권자가 당해 특허제품에 관해서 특허권을 행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권리범위확인심판인 대법원 2010. 12. 9. 선고 2010후289 판결은 특허권의 적극적 권리범위확인심판은 특허발명의 보호범위를 기초로 하여 심판청구인이 그 청구에서 심판의 대상으로 삼은 확인대상발명에 대하여 특허권의 효력이 미치는가를 확인하는 권리확정을 목적으로 한 것이므로, 설령 확인대상발명의 실시와 관련된 특정한 물건과의 관계에서 특허권이 소진되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사정은 특허권 침해소송에서 항변으로 주장함은 별론으로 하고 확인대상발명이 특허권의 권리범위에 속한다는 확인을 구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판시한다.

권리범위확인심판은 확인대상발명이 특허발명의 권리범위에 속하는지 여부를 심리하는 것이므로, 대인적인 특허권 행사의 제한 사유를 주장하는 것은 민사재판에서만 허용될 수 있는 것이고, 권리범위확인심판단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함으로써, 판결의 결과가 직접 당사자를 구속하는 민사재판과, 심결의 결과가 민사재판의 유력한 증거로 활용되는 권리범위확인심판은 그 성질을 달리한다는 취지로 이해된다.

결국 특허발명의 진보성, 선사용에 의한 통상실시권 및 권리의 소진 여부가 판단의 전제로 주장되었을 경우 재판부는 권리범위확인심판과 민사재판에서 사뭇 다르게 판단하고 있으므로, 당사자들은 이를 고려하여 대응해야 한다.

Ⅳ. 권리범위확인심판의 효율적 운영방안
대법원 2009. 10. 15. 선고 2009다46712 판결은 특허권에 대한 침해대상제품 등과 동일 또는 유사한 발명에 대하여 적극적 권리범위확인을 구하는 심판이 특허심판원에 계속중에 있더라도, 그 특허권에 기초한 침해금지 청구 및 손해배상 청구 등의 침해소송을 중지할 것인지 여부는 법원이 합리적인 재량에 의하여 직권으로 정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판시한다. 따라서 권리범위확인심판의 결과가 민사재판보다 선행되도록 하고, 권리범위확인심판 단계에서 당사자의 모든 주장이 판단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권리범위확인심판 제도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특허심판원은 권리범위확인심판을 우선심판 또는 신속심판의 대상으로 규정하여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심결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물론, 구술심리를 활성화하여 당사자의 주장을 최대한 수용하고, 심판관 보수교육을 활성화하는 등 심판관의 자질향상에도 힘쓰고 있어, 민사재판의 판단결과와 일치되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당사자들도 권리범위확인심판 단계에서 민사재판에서 주장할 수 있는 모든 주장을 제시함으로써 정확한 판단이 이루어지도록 협조하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Ⅴ. 마치며
특허권의 침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권리범위확인심판은 기술전문가인 특허심판원의 심판관이 1차적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불복소송 역시 기술전문가인 특허법원의 기술심리관의 도움을 받고 있으므로, 민사재판을 거치기 전에 권리범위확인심판을 먼저 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자연스럽다.

권리범위확인심판과 민사재판은 각각 고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당사자들은 특허분쟁을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각 제도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권리범위확인심판을 담당하고 있는 특허심판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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