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여는 많지 않지만 감동과 인생에 대한 교훈 많이 얻었죠”

 

최근에 많은 원로선배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런데 오늘 인터뷰를 하는 사람은 변호사 경력 5년의 정병택 변호사다. 광주고등학교 졸업, 건대법대 졸업, 연수원 39기의 평범한 청년변호사(1977년생)이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얼마 전이‘부처님 오신날’이었다는 것과 정 변호사가 조계종 총무원에 5년째 근무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정 변호사를 인터뷰하는 것은 아니다. 청년변호사 중에 근무지의 외연을 확대하고 있는 사례를 찾던 중에 우연히 위철환 협회장과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정 변호사를 만난 것이다. 빙고! 그래 이 친구부터 인터뷰하자. 그래서 마련된 인터뷰 자리다. 이왕이면 ‘부처님 오신날’ 즈음에 인터뷰를 하려고 연휴기간 중에 본인의 서초동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조계종 총무원에 변호사가 근무하는지 몰랐다. 어떤 계기로 총무원에 근무하게 되었는가?

내가 처음이 아니다. 따져보면 세 번째다. 2004년에 김형남, 김봉석 변호사(연수원 33기) 두 분이 처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형남 변호사는 대학때부터 불교학생회 일을 열심히 한 분인데 조계종에 변호사가 필요하다는 계획서를 제출하여 채용된 것으로 안다. 두 분이 4년간 근무하다가 2008년에 법무법인 신아를 만들어 나가시고, 정석원 변호사(연수원 37기)가 입사했다. 그 다음으로 내가 2010년에 연수원을 마치고 들어왔고, 정석원 변호사님은 중간에 옮겨서 현재 나 혼자 근무하고 있다.
연수원을 수료하고 취직을 해야 하는데 지금 태평양에서 일하고 있는 동기 안정현 변호사가 조계종의 입법기관인 중앙종회에서 변호사를 모집한다고 알려줘서 면접을 보고 취직을 한 것이다.
물론 내가 김형남 변호사처럼 불교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한 사람은 아니지만 연수원의 불자들 모임인 다르마 법우회 멤버로서 불교신자라는 것이 지원을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취직 후 얼마 있지 않아 조계종의 행정기관인 총무원에서 일하던 정석원 변호사가 휴직을 하는 바람에 총무원에서 일하기 시작해 올해가 벌써 5년째이다.

조계종에서 변호사로서 무슨 일을 하는가.
대한불교 조계종도 3권분립이 되어 입법, 사법, 행정기관이 모두 존재한다. 내가 처음 취직했던 중앙종회가 입법기관이고, 지금 일하고 있는 총무원이 행정기관이다. 나는 총무원 기획과 소속이다. 별도의 법무팀은 없다. 사법기관으로 호계원이 있다. 우리 총무원의 수장이 지난번에 위철환 협회장이 예방했던 총무원장 자승스님이고, 전체 조계종의 정점에는 종정예하(카톨릭에서는 교황성하라고 부르는데 불교에서는 예하라고 한다)와 원로회의가 존재한다. 지금 종정예하는 진제스님이다.

내가 하는 일은 다른 사내변호사와 동일하다. 다만 내가 일하는 단체가 주식회사와 같은 회사가 아니라 조계종이라는 종교단체일 뿐이다. 스님들과 신도들에 대한 법률상담, 각종 위원회 회의에 참석, 조계종 전체가 아닌 총무원 관할 사찰에서 벌어지는 소송을 담당하고 있다. 사실 조계종에는 24개 교구본사와 그 밑에 1500개 이상의 사찰이 있는데 이들 전체 사찰이나 스님들에 대한 법률자문이나 상담을 하는 것은 아니고, 총무원의 직할사찰(5개, 조개사, 봉은사, 약사사, 보문사, 선본사, 선암사)과 총무원 내의 기관에 대한 법률상담과 질의에 대한 의견서 작성 등의 업무를 하고 있다.

송무업무는 많은가, 사내변호사는 소송이 1년에 10건으로 제한이 되는데 애로는 없는가?
(손으로 꼽아 보더니 웃으면서)지금 10건 정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순천시와의 소송(1심)에서 승소하여 기분이 좋다. 절이 소박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순천 선암사는 조계종과 태고종이 소유권을 놓고 다투고 있는 ‘분쟁사찰’이다. 재산 등기는 조계종이, 실제 점유는 태고종이 하고 있다. 1970년 당시 문교부장관이 승주군수를 선암사 재산관리인으로 임명했으나,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조계종과 태고종의 요청에 따라 순천시장을 재산관리인에서 해임했다. 순천시는 2004년, 당시 태고종 선암사 주지이던 지허스님의 토지사용승낙을 받아 선암사 경내 4995㎡ 부지에 총 8동의 전통야생차문화체험관을 시공해 2007년 준공했다. 그러니 순천시는 막상 토지소유자인 조계종의 승낙없이 건축을 한 것이다. 우리가 순천시에 문제를 제기했더니 무성의하게 나와 소송을 통하여 협의하자고 3년 전에 소송을 제기했고 최근에 건물철거소송에서 승소한 것이다. 이젠 순천시가 성의를 보이면서 협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본다.

개업변호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내변호사가 수행할 수 있는 소송을 1년에 10건으로 제한하였는데 막상 사내변호사인 내 입장에서는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그런 제도가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실제 10건 이상을 하더라도 막을 방법이 없다고 들었다. 사내변호사회에서 이 제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데 나는 막상 사내변호사회 활동은 제대로 못하고 있다. 사내변호사가 있는 회사에 소송이 늘어나는 것은 송사에는 항상 상대방이 존재하므로 다른 변호사들에게도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일반 개업변호사들도 전향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다른 사내변호사와 다른 점, 힘든 점, 그리고 보람은 무엇인가.
내가 근무하는 곳이 조계종 1700년 역사의 총본산인 조계사에 위치한 총무원이다. 매일 아침 조회(법회)에 참석하여 반야심경을 봉독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종교인이 아니라도 참 좋은 일이다. 그리고 종교단체에 근무하는 변호사는 일반 사내변호사나 개업변호사들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겪는다. 감동하고, 인생을 돌아볼 기회가 많다는 말이다. 나의 지금 연봉이 세전에 약5000만원 정도이니 주위에서 연봉이 작다고 말하는데 솔직히 돈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5년을 넘기고 있는 것을 보면 보람이 더 많다. 불교신자로서 조계종에서 일하면서 많은 월급을 기대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계종이나 다른 종교단체에 근무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보수에 대한 욕심은 버려야 할 것이다.

조계종에는 법무팀이 없고 기획과에 소속되어 있는데 변호사를 보충할 계획은 있는가.
종교단체는 경기에 민감하다. 조계종은 신도들이 지불하는 시주 즉, 각 사찰에서 내는 분담금으로 운영되는 종교단체이고, 수익사업을 하는 단체가 아니라서 재정에 여유가 많은 것이 아니다. 특히 지금 경기가 좋지 않아 모든 종교단체가 어려운 것으로 안다. 그래서 마음이야 방대한 조계종 산하 사찰과 신도들에 대하여 다양한 법률지원을 해주는 법무팀을 총무원안에 만들고 변호사들의 수도 늘리자고 윗분들에게 건의하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님을 알기에 건의도 못하고 있다. 마음만 있다.

다만, 시간적인 여유가 되면 내가 연수원에서 다르마 법우회 멤버였고, 변호사들 중에 봉사하고 싶은 불교신자가 많으므로 봉사모임을 만들어서라도 수임료를 내고 법률자문을 받을 수 없는 지방사찰이나 신도들에 대하여 정기적인 법률상담이나 법률지원사업을 하고 싶다.

절에 근무한다고 너무 절 이야기만 했다. 부인이 연수원동기로 맞벌이 법조인 부부라는데 두 분 이야기좀 해달라.
흔히 말하는 연수원 CC다. 같은 반, 같은 조로 만나 연애하고 결혼했다. 집사람은 임용도 가능한 성적이었는데 남을 판단하는 직업이 부담이 된다고 현직으로 가지 않고 바로 법무법인 태평양에 취직했다. 나는 조계종에서 변호사를 뽑는다는 공지도 못봤는데 지원해 보라고 한 안정현 변호사가 바로 집사람이다. 그 덕에 지금 5년째 총무원에 근무하고 있다. 아이(27개월) 키우면서 로펌에서 일하는 집사람이 고맙고, 애처롭기도 하다. 로펌의 높은 업무강도 때문이다. 내가 진지하게 전업주부로 애를 키우겠다는 이야기도 했었는데 (웃으며) 말려서 지금은 장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 주말은 장모님을 쉬시게 해드려야 하기 때문에 토요일인 오늘 사실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집에 가서 애를 봐야 한다. 내가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도 아니지만 로펌과 비교하면 비교적 한가로운 종교단체에서 많은 것을 느끼면서 근무할 수 있는 것이 다 집사람의 외조 덕분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남들은 다들 황금연휴로 휴가를 떠난 서초동을 지키면서 함께 점심식사를 하였다. 가장 마음에 드는 사찰을 소개해달라니 해남 미황사가 자긴 제일 좋단다. 함께 미황사를 찾아 차도 마시고,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그런 속깊은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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