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에 걸맞는 법조인의 거듭나기

* 이 글은 필자가 서울대학교 2014년도 로스쿨 입학식에서 한 기념강연(2월 28일)과 연세대학교 로스쿨 신입생을 위한 초청 강연(3월 26일)의 내용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한 여러분은 이제 소정의 교육과 시험을 거쳐 변호사의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여러분은 예비법조인이다.

나는 법조계의 선배로서, 그리고 로스쿨제도 도입을 포함한 사법제도 개혁의 성안을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여러분의 앞날을 남다른 애정으로 축복하면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한다.

법조인의 좋은 점은

법조인이 된다는 것은 세인의 부러움을 사는 자랑스러운 성취의 한 단계이다. 우선 신분과 생활에서 안정을 기할 수 있기 때문에 흔히들 입신양명을 떠올리기도 한다. 또한 두뇌나 성실성을 인정받기도 한다.

판검사,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선망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법조인에게는 세상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힘과 기회도 있다. 법조계 밖의 다양한 직역으로 진출하는데 어드벤티지도 있으며 사회활동의 무대가 널리 열려 있다는 이점도 있다. 다만 그 자부심이 자존심을 넘어 자만심으로 빗나가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착각이자 오만이다. 법조인의 무거운 사명과 세상의 엄청난 변화를 생각한다면 더욱이나 그러하다.

지적 역량과 인성

훌륭한 법조인이 되자면 우선 그 신분에 상응한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는 법률에 관한 전문지식 등 지적인 역량과 아울러 인성人性이 중요한 평가 대상이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법률지식에 정통해야겠는데, 법률전문가라고 해서 법률만 아는 사람, 또는 법률 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인생이나 사회는 법률지식만 가지고 흑백을 가리기에는 너무도 복잡하다.

그러기에 법률(시험)과목의 울타리를 넘어선 여러 분야에 넓고 깊은 지적 온축蘊蓄이 병행되어야 한다. 사회현상의 변화와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경제의 글로벌화 등에 따른 법적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로스쿨 신입생의 일정 비율이상을 법학 이외의 다른 분야의 전공자 중에서 뽑도록 한 로스쿨제도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서울대학교 로스쿨의 올해 신입생의 65%가 비법학 전공 출신이라는 사실은 앞서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바람직한 선발이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로스쿨 입학 전후의 전공이 무엇이든 文史哲을 비롯한 폭넓은 독서와 천착이 절실하다고 본다.

법조인 앞의 여러 통로

법조인의 원형은 통념상 판검사나 변호사이다. 그러나 이제는 직역 내지 활동분야를 좀 더 넓혀서 생각할 때이다.

이미 입법부와 행정부 및 학계에는 법조인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거니와 그 밖의 여러 영역의 공직과 공공단체, 정당, 기업, 연구기관, 언론기관, 직능단체, 시민사회단체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으로 그 무대를 넓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취업 차원의 타개책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법조인의 소임에 상응한 외연의 확대라고 보기 때문이다. 로스쿨을 통하여 다양한 전공자를 확보한 법조계에서 역시 다양한 여러 분야로 전문 인력을 진출시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법치사회의 기반을 건실하게 만드는데도 바람직한 변화라고 하겠다.

자존심과 우월감의 허상

더러는 판검사, 변호사를 권세와 부를 누리는 벼슬 내지 출세 길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출세주의적 시각이다. 그런 성취가 부수적이 아닌 본질이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법조인의 영달을 생각하기 전에 그 사명의 무게와 그에 따른 책무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변호사 윤리강령 첫머리에 나오는 ‘인권의 옹호와 정의의 실현’을 잠언으로 삼고, 그 실현을 자기 소임의 기본으로 받들어야 한다. 거기에는 세속적인 부귀영화와는 촌수가 먼 무거운 짐과 고뇌가 따르기 마련이며, 법조인은 그 어려움을 감당해야 한다.

선민의식과 특권의식 또는 ‘슈퍼갑’의 우월감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일인성주’一人城主의 독단주의 성품도 경계해야 하며, 자부심과 자존심의 허상도 간파해야 한다.

화석 아닌 화신으로

법조인은 일반적으로 안정된 신분과 생업에 길들여져서 사회변동에 우려를 앞세운 나머지 현실 고착의 보수성 내지 수구성에 얽매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회정의와 인권을 거론하면서도, 이른바 법적 안정성과 해석법학의 틀에 갇혀서 전향적인 판단과 실천을 주저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법의 해석이나 적용에 있어서 강자와 수구 일변도에 굳어진 화석이 되지 말고 사회의 변화와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정의의 화신이 되어주시기를 바란다.

또한 법조인은 직무의 속성상 인간만사를 흑백, 시비, 정사正邪로만 양분하려는 2분법적 사고에 젖기 쉽다. 하지만, 그런 두 틀에만 익숙하다 보면 진‧선‧ 미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는 수가 많다. 그런 경직되고 단순화된 좁은 소견에 기울지 않도록 시야를 넓혀나가야 한다.

신념과 학기 사이

누구나 우수한 자질을 갖춘 법조우등생이 되기를 바라거나 기대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올바른 법조인이 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해방 70년을 맞는 한국 사법의 역사 내지 법조사를 돌이켜본다면, 모처럼의 법조인의 신분과 권능과 전문지식을 곡학아세의 제물로 바친 선배들도 있고, 그와는 달리 양심과 지조를 지켜낸 선배들도 있었다. 명문 대학 출신의 인재들일수록 발탁이나 탄압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목전의 영달에 끌리어 법조인 또는 지식인답지 않은 행보를 서슴지 않는 사람을 두고 ‘학기 學妓’라는 말도 나왔다.

여러분은 우리 법조사에서 부침한 인물들을 살펴보고 그중 어떤 유형의 선배를 본받을 것인가를 놓고 올바른 선택을 하기 바란다.

대접보다 존경을 받도록

여러분은 ‘갑’ 또는 ‘슈퍼갑’의 신분으로 어디서나 부러움을 사고 대접을 받을 여지가 많다. 그러나 남한테 대접 받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존경 받는 사람이 되어주기 바란다. 직함에서 ‘사’(士 또는 事)자를 떼어놓고서도 존경받을 수 있는, 그런 지성인이 되고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갑의 편에 끌리어 범하기 쉬운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경계하며, 약자 또는 소수자의 입장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이 억울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평등을 담보하는 분모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입신에서 사회적 헌신으로

흔히 법조인이 되는 것을 입신출세라고도 한다. 입신을 바라는 것 자체는 사람의 기본 된 욕망일 수도 있고, 따라서 장려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 입신 이후를 말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입신을 한 다음엔 반드시 헌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지식과 역량에 따른 신분과 권능을 가지고 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기여를 해야 한다. 이무런 반대급부나 공명심 같은 것을 생각지 않고 남과 세상을 위해 헌신하며, 때로는 사서 고생도 해야 한다.

특히 법조인에게는 공익적 성격의 기여와 헌신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사회윤리적 책무가 있다. 입신의 성취감 못지않게 헌신의 보람은 크고 아름답다.

씻어야 할 부정적 이미지

법조인에 대한 세인의 평가 내지 대외적 이미지는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세속적인 출세에 뒤이은 처신, 전문직의 전횡 따위를 연상시키는 일면 때문일 것이다.

외국에서도 ‘자신의 전문능력을 곡예적인 술수와 결합시켜 지적 독재로 사람 위에 군림한다.’고 법조인을 비난한 학자가 있었다. 또한 최근엔 예일대의 프레드 로델 교수가 쓴 <법률가여,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책의 번역서가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어려운 전문용어와 법이론 뒤에 숨겨진 법의 실체를 폭로했는가 하면, 법률가를 부족시대의 주술사와 중세의 성직자에 비유했다. 물론 우리나라 법조인의 부정적인 실체를 비판한 국내 출판물도 적지 아니 나와 있다.

우리는 그런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겸허하게 성찰해야 마땅하다. ‘잘 난 사람’ 보다는 ‘바른 사람’을 지향하는 법조인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법조인은 기능공 아니다.

최근엔 ‘법과 원칙’이란 용어가 난무한다. ‘법과 원칙’의 파괴자들 또는 정치권 사람들조차도 그런 말을 버릇처럼 입에 담는다.

법조인의 사고가 ‘법대로’ 쪽으로 굳어지다 보면, ‘법치주의’도 하향적 지배기능만 강조하는 훈시나 명령쯤으로 곡해하기 쉽다. 또한 실정법만능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다.

그러나 헤겔도 말했듯이 ‘법의 극은 불법의 극’이다. 자칫 법조인은 법의 이름에 가탁하거나 그 가면을 쓴 불의에 동조할 위험도 있다.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하버드 로스쿨의 한 법학교수는 해마다 신입생들에게 ‘법률가의 첫째가는 책무는 defence of the people 즉 인민(~의 자유와 권리)을 지켜주는 일이다.’라는 내용의 강의를 했다고 한다.

적어도 법조 전문직이자 최고의 지성임을 자부하는 법조인이라면, 권력자의 이익과 국민의 이익이 맞섰을 경우에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법조인은 단순한 법률 기술자 또는 기능공에 그쳐서는 안 된다. 보편적 가치를 사고의 기준으로 삼고 이를 추구하는 지성인이어야 한다. 의를 위해서는 고난도 무릅쓰고, 손해도 감수하는 사람, 개인적으로는 피할 수도 있는 위험 앞에서 비켜서지 않는, 그런 법조인이 되기 바란다.

법치주의의 위기 - 부작위의 과오

언필칭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내세우는 이 나라에서 법조인 또는 법률가의 책무는 더 없이 무겁다. 민주와 법치가 제 길을 따라 정착하지 못하고 위정자에 의해 일탈이 되풀이되는 마당에는 더욱 그러하다.

반민주 반법치를 방관, 방조, 편승하는 법조인은 국민의 기대를 배신하는 사람이다. 반민주적 권력의 엑스트라나 공범이 되는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지난날의 반민주적 악령이 각설이처럼 다시 나타나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법조인의 각성과 분발이 한 층 더 절실히 요청된다.

참과 거짓 사이에서 아무런 고뇌도 하지 않은 채 영일寧日에 안주하는 것은 적어도 시대정신에 합당한 법조인의 도리가 아니다.

우리는 해서는 안 되는 과오 Sin of comission 뿐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과오 Sin of omission도 유념해야 한다.

선택의 어려움과 자승(自勝)

신념과 이익, 영달과 고난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자기 안의 갈등이나 자기와의 싸움은 결코 만만치가 않는 법이다.

하지만, 그런 양자택일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남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이고(勝人者有力),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진실로 강한 사람(自勝者强)이라고 노자는 말했다. 그리고 율곡은 ‘사람은 올바른 도리로써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治身以道)’라고 했다. 그러니까 어려운 갈림길에서 우리는 ‘사람의 도리’에 합당하게 선택을 하고 처신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사람의 도리는 결코 멀고 높은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道非高遠)고 그 분은 또한 말씀하셨다. 사람된 도리는 거창한 국면이 아닌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비록 고단하고 힘겹더라도 사회적 신분에 상응한 시대적 소명을 다하는 길이 역사가 요구하는 새로운 법조인상이라고 믿고 싶다.

신부님 문병에서

모처럼의 귀한 자리에서 무거운 주문을 나열해서 미안하다. 더구나 나 자신도 실천하지 못한 덕목을 거론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나의 충정을 여러분은 이해해주실 줄 믿는다.

끝으로 오늘의 강연을 마치면서 보너스로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겠다.

임종을 앞둔 신부님께서 누구의 문병도 허용치 않으셨는데, 한 변호사의 간청만은 받아들여서 문병을 받기로 하셨다.

병상에 닥아 간 변호사가 감지덕지하며 말했다. “신부님, 저에게만 이처럼 특별히 문병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감사할 것까지는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야 이다음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당신 같은 변호사야 지금 만나지 않으면 다시 만날 기회가 영영 없을 터이니까... .”

여러분, 신부님 문병을 갔다가 이 다음 천당에서 만나자며 거절당하는, 그런 법조인이 되시기 바란다.

바라건대, 여러분의 큰 뜻이 이루어지고, 입신과 헌신을 통해서 정의 실현의 큰 보람을 쌓는 법조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빌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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