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님 회초리처럼 엄했던 바람이 며칠 전부터 돌쟁이 아가 손처럼 보들보들 감싼다. 창 안으로 쏟아지는 햇볕은 꾸벅꾸벅 졸음을 부르고, 아스팔트 위의 아지랑이는 들썩들썩 엉덩이춤을 일으킨다. 봄이 왔다, 봄. 봄소식은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오지만 봄맞이는 밥상 위의 제철 반찬을 가득 올리고 반갑게 맞이할 일이다. 봄 반찬의 으뜸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달래, 냉이로 대표되는 봄나물이다.

30여년전 강원도 산골 민통선 안에서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구보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던 군 시절. ‘겨울 끝, 봄 시작’을 알리는 식판 위의 전령이 있었다. 바로 취사반 보급 메뉴에도 없는 ‘달래무침’.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향기가 다르다. 평상시 쾌쾌한 짬밥 냄새가 요동을 치던 공간에 내 엄마의 향기가 난다. 엄마 손이 빚어내는 새콤, 달콤, 매콤, 고소한 향이다. 여기에 봄 대지를 갓 뚫고 올라온 달래 본연의 흙 향기도 더해진다. 이날은 고봉밥도 부족했다.

달래무침이 부대 별미반찬으로 등장하려면 특별한 작전(?)을 거쳐야 한다. 일명 ‘봄나물 부식 확보 대작전’. 장소는 위병소의 감시의 눈을 벗어난 논두렁과 밭두렁. 작전 시간은 동 트기 직전 어둠이 깔린 아침 구보 시각. 작전 내용은 이렇다. 구보 대열이 위병소를 빠져 나오면 뒤에서 뛰던 고참 3~4명이 슬그머니 빠진다. 그리곤 여기저기 흩어져 언 땅을 비집고 나온 나물을 캔다. 30여분 뒤 구보 대열이 되돌아오면 캔 나물을 챙겨 뒤꽁무니에 합류한다. 부대장의 묵인 하에 진행한 작전이지만 명령을 받은 것보다 훌륭하게 끝난다. 그 작전의 ‘전리품’ 중 하나가 달래무침이었던 것이다. 내게 봄나물은 이렇게 군기가 바짝 든 ‘봄 전령’으로 기억돼 있으며, 아직도 봄의 시작에서 맞이하는 봄나물은 그때처럼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곧추세우는 마법을 발휘한다.

강원도 양구에 청수골쉼터(033-481-1094)란 음식점이 있다. 대표메뉴는 산채비빔밥(7000원). 철마다 다른 재료가 오르긴 하지만 양구의 특산품으로 꼽히는 시래기와 취나물은 빠지지 않는다. 특히 4~5월부터 산나물의 제왕이라고 하는 어린 곰취가 나오는데 생잎의 쌉쌀한 맛과 향이 오래도록 입안에 남는다. 비빔밥이지만 특이하게 밥과 나물이 따로 나온다. 나물 개개의 맛을 확실하게 구분하며 맛볼 수 있다. 그런데 나물 접시 한복판에 반숙한 계란이 반으로 갈라져 사람 수만큼 놓여 있다. 시골의 소박함에 웃음이 절로 난다. 굳이 밥 한 공기 다 넣어 비비지 말고 나물을 더 달라고 해서 나물로 배를 채우는 게 이집을 제대로 즐기는 요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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