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사무국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느 의원실에서 영진위 위원의 ‘출신 초등학교, 중학교’와 ‘정당 당원 여부, 공직선거 출마 여부, 공직 선거 운동 여부’를 조사하여 회신하여 달란다고 하였다. 정당 활동 여부는 혹시 모르겠으나, 국회의원에게 출신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제공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보지만 알려주지 않으면 사무국이 괴로울 테니 메일로 보내주마 하였다.

그러나 메일을 쓰다 보니 다시 화가 치밀었다. 영진위가 권력기관도 아니고, 연 400억원 남짓한 예산으로 한국 영화의 초(超)성장에 이바지 하였거늘, 그 어른이 무슨 비리를 파헤치겠다고 출신 초등학교, 중학교까지 뒤지겠다는 말씀인지 어이가 없었다.

영진위 신임위원장 선임이 목전에 다가왔다. 현위원장이 3월말로 임기가 종료되기에,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임원추천 위원회’가 구성되어 후임 위원장 공모 절차를 진행했다.

“내친 김에 위원장으로 나서야 하지 않겠냐”고 바람 잡는 친구가 있어 30분쯤 고민을 했다. 해외출장을 빙자하여 베를린으로 칸으로 놀러 다니면 겁나게 재미있을 테고, 법조 경험에 기대 전임자 누구보다도 한국 영화 시장 규모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할 자신도 있었지만 30분만에 마음을 접었다.

관용차에 맛 붙이면 공기관을 갈아타는 ‘비정규직 인생’이 시작될 테고, 수강신청을 한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도 난감하였다. 어찌어찌 이번 학기 수업을 놓지는 않더라도 강의 준비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에 생각이 미치자 타고난 새가슴이 길게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임원추천 위원회 위원장’이란 감투까지 걸치고 서류 심사와 면접 심사를 거쳐 지원자 중 다섯분을 문화부 장관에게 추천했다. 매번 느끼는 점이지만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한 ‘지원>심사>추천’의 절차가 효율적인지는 극히 의문이다. 명예를 먹고 살 분을 찾아 힘든 ‘공직’을 맡겨야 하는데, (낯간지럽게도) 살아 온 인생을 구구절절 A4에 기록하여 ‘지원’ 하도록 요구하고, 장황하게 지원 동기를 설명하도록 하며, 여기저기서 얼굴 대하던 후배들 앞에서 ‘면접시험’까지 치르라고 한다. 체면을 생각하는 분에게는 가혹한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금년에 지원하신 연세 지긋한 영화계 원로에게는, 면접장으로 들어오시는 순간 절로 의자에서 엉덩이가 떼어지고 “지원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말이 바로 튀어 나왔다.

상당기간 영진위는 사고 단체로 낙인 찍혀 있었다. 영화계에서는 영진위를 ‘공공의 적’인양 비아냥 거렸고, 공공기관 기관장 평가도 기관 평가도 대단히 불량하였다. 지원사업 심사를 담당하는 기회에 이해관계인에게 거금을 퍼준 이가 있었다는 풍문도 돌았다. 감독기관인 문화부는 직원 상당수를 감원하고, 전직원의 연봉을 10% 삭감하는 극약처방까지 불사하기도 하였다.

언제인가는 위원들이 서로 쌈박질을 하더니 ‘위원장 해임결의’를 하고 임명권자인 문화부 장관에게 ‘해임건의’를 하는 황당한 사태까지 빚어졌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내공을 쌓은 덕분인지 요즈음은 기관 평가 순위도 괜찮고, 사무국도 생기가 넘친다. 여러 나라가 영진위를 배우겠다고 다녀갔고, 영진위 덕분에 계속 영화를 할 수 있었다고 목소리를 낮추는 인사도 적지 않다. 감독기관은 ‘(소란스럽던)영진위가 너무 조용하다’고 의아해 하고, 위원들도 영진위가 사고를 치지 않으니 존재감이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보탠다.

2012년 한국영화 점유율은 58.8%에 이르렀고, 2013년에는 59.7%를 달성하였다. 미국을 제외하고 자국 영화 점유율이 이렇게 치솟은 나라는 지구상에 없을 게다.
2012년 12월에 한국영화의 극장 관객 수는 1억명을 돌파하였는데, 2013년에는 11월에 이 기록을 돌파하더니 결국 1억2727만명을 찍었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횟수는 2013년 기준 1인당 연평균 4.25회로 미국을 따돌리고 세계 1위가 되었다.

작년 가을 브라질 영상위원회와 MOU를 체결하는 자리에서 브라질 대표는 마이크를 잡고 “한국영화가 부럽다 못해 배가 아프다”고 고백을 하였다.

영화는, 북한의 김정일까지도 몹시 탐낸, 그 나라의 문화이고 영혼이다. 1000만명 이상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를 한해에 세 편씩이나 만드는 나라에서 이제 영화는 더 이상 ‘진흥’의 대상이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오히려 콘텐츠진흥원을 개편하여 영화콘텐츠 중심으로 콘텐츠 정책을 재구상해야 한다는 주장도 그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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