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선> 남과 북

닉네임
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9-10-07 14:00:14
조회수
705
남과 북


너는 자유가 무엇인가고 묻고 있는가?
그것은 그 무엇에도, 그 어떠한 필요에도,
그 어떠한 우연에도 예속되지 않으며,
운명을 멀리할 수 있는 것이다.
─ L.A.세네카


그대의 길을 가라.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버려 두어라.
─ A.단테




북한 병사의 귀순
1. 2017년 11월 13일 오후 3시 11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 상황실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화면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다. 희뿌연 화면 속으로 지프 한 대가 달렸다. 카메라는 가로수가 늘어선 포장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을 클로즈업한다. 뭔가 긴박한 일이 일어난 것을 감지한 듯 화면 앵글이 이곳저곳으로 흔들렸다. 군사분계선(MDL) 북측 판문각에서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포장도로를 따라 고속으로 내려오는 북한군 군용 지프 1대가 발견된 것이다. 도로 앞 뒤편으로 다른 차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상황 파악이 안 되었으므로 북한군 JSA 경비대대 소속 지휘관 차량으로 볼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에 쫓기는 듯한 모습이 석연치 않았다. JSA 경비대대는 CCTV 영상을 확대하면서 지프의 이동 상황을 면밀히 추적했다. 지프는 갈림길에서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남쪽 판문점으로 방향을 잡고 내달렸다.
오후 3시 13분, 지프는 ‘72시간 다리’ 바로 앞 북한군 검문소 앞에서 거의 멈추다시피 속도를 줄였다.
‘72시간 다리’는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이후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폐쇄되면서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들어오는 길이 막히자 북한이 새로 건설한 다리다. 다리 건설에 72시간이 걸렸다는 북한의 주장에 따라 ‘72시간 다리’로 명명됐다. JSA 북쪽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다.
검문소 밖에 나와 있던 북한군 경비병이 신분 확인을 위해 차량에 접근하는 순간 지프는 양쪽 헤드라이트를 켜고 무서운 기세로 다리 방향으로 내달렸다. 앞 유리 와이퍼가 작동했다. 지프는 시속 70km 이상으로 순식간에 다리를 건너 북측 통일각 지역까지 도착한 뒤 MDL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JSA 경비대대는 북한군의 귀순 시도로 판단하고 비상을 걸었다. 통일각 바로 옆에는 대형 바위 모양의 ‘김일성 친필비’가 세워져 있었다. 북한이 주민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JSA 투어를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 기념비는 ‘김일성 친필비’다. 김일성이 사망 하루 전인 1994년 7월 7일 통일 문제를 담은 중요 문건에 직접 쓴 자필 서명을 기념비에 그대로 새겨 넣었다. 북한은 이 필체를 ‘태양서체’로 부르며 김정일 필체, 김정일 모친 김정숙 필체와 함께 ‘백두산 3대 장군 명필체’로 칭송한다. 이 기념비는 1995년 8월 JSA 북측 지역 판문각 왼쪽에 세워졌다. JSA 북측 구역에 들어가려면 이 기념비를 거쳐 가야 한다.

오후 3시 14분, 지프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하자 군사분계선 북측 판문각을 지키던 북한군 경비 부대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북한 경비병들은 당혹해하며 귀순을 막기 위한 추격에 나섰다. 북한 경비병 2명이 판문각 바로 앞 계단을 넘어지듯 허겁지겁 뛰어 내려왔다. 이들은 갈색 군복 차림에 권총으로 무장했다. 거의 동시에 판문각 인근 북측 초소에서 철모와 방탄복을 착용한 경비병 2명도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밖으로 달려 나왔다.
이들이 어깨에 멘 AK 계열의 자동소총이 앞뒤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JSA 내에는 권총과 단발사격용 소총만 반입할 수 있다. 자동소총을 반입하거나 휴대하는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다. 일부 경비병은 권총 착용 여부를 손으로 확인하면서 가던 길을 되돌아보는 등 허둥지둥하는 모습도 보였다.
북한군 추격조는 모두 판문각 앞 북측 도로를 동에서 서로 가로질러 지프가 접근하는 MDL 쪽으로 전력 질주했다. 남측 JSA 경비대대의 감시와 대응 상황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료의 귀순을 막지 못하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절박감도 보였다. 한미 JSA 경비대대는 폐쇄회로로 북한군 추격조의 일거수일투족을 확대하거나 쫓아가면서 지켜봤다. 남북 군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최전선 지역이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같은 시각 한국군 JSA 경비대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대응태세 강화 등 후속 조치에 돌입했다.
정면을 향해 내달린 지프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북한군 검문소와 초소에 이른 차량은 속도를 줄이는가 싶더니 이내 돌파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거침없이 돌진했다. 검문을 했던 북한군은 차량을 제지하기 위해 뒤따라 달리다 총격 자세를 취했다.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켜 귀순 의사를 남쪽에 분명하게 표시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차량에 탄 채로 MDL을 넘어 귀순에 성공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한미 JSA 경비대대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지프는 MDL 북쪽으로 불과 10여 미터 남겨둔 지점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낙엽이 수북한 깊은 배수로에 지프 앞바퀴가 빠지면서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때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였다.
귀순 북한군은 기어를 바꿔가면서 가속 페달을 여러 차례 밟아 배수로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지프는 굉음만 낼 뿐 옴짝달싹도 못 했다. 차창 밖으로는 권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판문각 경비대원들이 차량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오후 3시 15분, 몇 초만 더 지체해도 추격조에 체포되거나 차 안에서 총알 세례를 받고 죽을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 순간, 북한 귀순병을 향해 총격을 한 북한군은 4명. 3명은 오른편에 모여서 왼편 북측 초소에서 달려 나온 1명은 이들과 2, 3m 떨어진 곳에서 남쪽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총격 위치는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2m 안팎 떨어진 북측이었다. 북한군 3명 중 2명은 그가 MDL을 넘자 사격을 중단하고 인근 건물로 몸을 숨기거나 북측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무리 3명 중 ‘엎드려쏴’ 자세를 취하며 소총을 이용한 조준 사격까지 시도한 한 북한군 소총수가 문제였다. 이 병사는 신속하게 사격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니라 영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앉아쏴’ 자세를 취하려다 쌓여 있던 낙엽에 미끄러지면서 엎드린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총수는 화면에 등장하는 북한군 추격조 가운데 유일하게 방탄복을 입었다.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방탄복 버클을 다 채우지 못해 버클 일부가 덜렁거렸다.
판문각 방향에서 달려온 북한군 3명 중 2명은 AK 소총으로, 또 다른 1명은 권총으로 총격을 했다. 북측 초소 방향에서 달려온 또 다른 북한군 1명은 권총을 쐈다. 서서 권총을 쏘던 북한군이 엎드려 있던 이 군인을 밟는 바람에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엎드려서 총을 쏘던 이 군인이 그를 쫓아가려고 일어나다 뒤에서 총격 중이던 북한군의 총탄에 맞을 뻔한 모습도 보였다. 추격조는 ‘엎드려쏴’ ‘서서쏴’ ‘무릎쏴’ 자세로 총을 쏘았다. 40여 발의 총격이 지속된 시간은 12∼13초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귀순 북한군은 운전석 차량 문짝을 힘껏 밀어제친 뒤 전광석화처럼 뛰어내렸다. 바닥에 쌓인 낙엽 더미를 밟는 바람에 순간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이내 MDL 남측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내달렸다. 그러나 그 소총수는 그가 전속력으로 남쪽을 향해 질주하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더니 그를 쫓아 남쪽으로 엉거주춤 뛰기 시작했다. 이 북한군은 남쪽으로 달리다 말고 멈칫했다. 동료들이 사라지고 총성도 더 들리지 않자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낀 듯 두리번거렸다. 이내 MDL 월선 사실을 인지한 듯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속도로 북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북측으로 돌아가면서도 잠시 우왕좌왕하다 건물 북측 뒤편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가 MDL을 넘은 지 2분가량 지난 오후 3시 17분 JSA 북측 구역 판문각 왼편의 김일성 친필 기념비 일대에는 소총으로 무장하고 방탄복을 입은 완전군장 상태의 북한군 12∼15명이 집결했다.
한미 JSA 경비대대의 폐쇄회로 영상에는 MDL을 가로질러 남측 자유의집 바로 옆쪽 면으로 다급히 뛰어오는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잡혔다. 자유를 향해 사선을 넘은 한 젊은이의 목숨을 건 질주였다. 그에게 자유는 목숨과 바꿀 만큼 귀중한 것이었다.
총격이 이뤄진 곳 바로 옆에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과거 북측 중립국 감독위원회 대표단이 쓰던 회의장으로 현재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MDL을 중심으로 건물 절반씩이 남북에 걸쳐 있다. 북한군은 이 건물 남측 부분을 넘어서는 곳까지 MDL을 월선했다. MDL을 넘은 건 정전협정 위반이다.
유엔군사령부는 “이번 사건에서 북한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총격을 가했다”고 지적하며 “이는 유엔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밝혔다. 북한군이 MDL을 직접 넘어와 총격하진 않았지만 총탄 일부가 MDL 넘어 남측으로 떨어진 만큼 MDL을 넘은 총격으로 결론을 내렸다. 북한군이 반자동소총인 AK 소총을 휴대한 것도 정전협정 위반이다. 정전협정 부속합의서에는 JSA 경비인원이 휴대할 수 있는 무기를 권총 1정 또는 수동식 소총인 보총 1정으로 제한하고 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자유의집 왼쪽 낙엽 더미 위에 귀순 북한군 오청성이 쓰러진 게 폐쇄회로TV로 확인된 건 오후 3시 43분. 그는 MDL 남쪽 50m 지점의 낙엽 더미 속에서 피투성이로 쓰러진 채 발견됐다. 발견 장소가 CCTV 사각지대여서 상황실의 열상감시장비(TOD)로 귀순 병사의 위치를 확인했다.
남측 경비대대장 권영환 중령과 부사관 2명은 낮은 포복 자세로 그에게 조금씩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가 쓰러진 곳과 북측 초소의 거리는 100m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 북측 초소에서는 증원된 북한 무장병력이 그가 쓰러진 곳을 향해 소총을 겨누고 있었다. 실력 있는 소총수라면 동전도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와 10미터 안팎 거리를 두고 권 중령은 ‘엎드려쏴’ 자세로 바꿨다. 부사관 2명은 포복을 계속하며 그에게 조금씩 접근했다. 권 중령은 두 부사관에 대한 엄호를 시작했다. 북한군이 부사관들에게 저격을 시도하는 등 이상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K-2 소총으로 사격에 나설 태세를 갖췄다. 그 사이 그에게 접근한 부사관은 권 중령이 있는 곳까지 그를 끌어냈다. 이후엔 세 사람이 함께 그를 쓰러진 지점에서 20m 떨어진 자유의집 건물 뒤쪽 안전지대로 옮긴 뒤 유엔사령부 헬기 편으로 후송했다. 이 모습은 열감시장비(TOD) 영상에 고스란히 담겼다.
권 중령은 귀순 사건 이후 군 관계자들이 “대대장이 왜 직접 구조에 나섰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구조에 나선 시간은 후속 증원 부대까지 배치되는 등 곧바로 교전할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끝났을 때였다. 여차하면 죽을 수 있는 곳에 부하들을 보낼 수 없었다. 지휘는 미 측 경비대대장이 하면 되니 내가 희생돼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권 중령은 이번 작전에 대해 “북한군은 우왕좌왕했지만 우리 장병들은 제 지시에 따라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부하들이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그날 그 순간 주요 순간을 확대하거나 피사체를 쫓아가는 영상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이는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 서쪽 지역에 세워진 고공 철탑의 CCTV가 생생한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우리 군이 2013년에 건립한 이 철탑은 약 70m 높이로 CCTV를 비롯해 고성능 감시 장비가 다수 설치돼 있다.
철탑의 CCTV 등 감시 장비들은 한미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 상황실에서 원격 조종으로 작동된다. 이 철탑은 2012년 하반기에 북한군이 판문각 주변에 약 60m 높이의 철탑 감시 장비를 세우자 우리 군이 맞대응 차원에서 세운 것이다. 아군의 감시 철탑은 북한군 철탑보다 10m가량 더 높고, 감시 능력도 뛰어나다. 맑은 날에는 자유의집에서 북측으로 약 10km 떨어진 지역의 북한군 동향도 파악할 수 있다.
군은 공중과 육상 전력으로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다. 피격된 북한군 병사의 구출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서해상에서 초계비행을 하던 공군의 KF-16 전투기 2대가 JSA를 관할하는 1군단 상공으로 긴급 이동했다. F-15K 전투기 2대도 긴급 출격 태세에 돌입했다. 피스아이 공중조기경보기도 대기시간을 줄여 북한군 동향 감시를 강화했다.
육군 포병 전력의 화력 대기 태세도 ‘A단계’로 격상됐다. 북한이 도발하면 즉각 반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춘 것이다. 같은 시각 JSA의 모든 대원도 전투배치 태세를 갖췄고 인근 사단의 전진 타격대 병력도 JSA 주둔지로 증원 배치를 끝냈다.


2.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통해 귀순하다가 총상을 입은 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북한군 병사에게서 기생충 수십 마리가 나온 데 이어 B형 간염, 폐렴, 패혈증 증세를 보였다.
B형 간염은 B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생하는 간의 염증성 질환이다. 이로 인해 귀순 병사의 간 효소 수치가 매우 높은 상황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귀순 병사의 높은 간 수치가 B형 간염 탓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전반적인 영양실조에 다량의 출혈로 인한 대량 수혈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초기 수술 시 의료진 20여 명은 귀순 병사가 B형 간염에 걸린 사실을 모르고 투입된 만큼 의료진의 건강 검진도 필요했다.
환자에게 온 폐렴도 계속 지켜봐야 했다. 일단 총상으로 생긴 일시적인 폐렴인 데다 젊기 때문에 회복력이 높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기대하였다. 많은 수혈을 받다 보면 폐 손상으로 폐부종 및 폐렴 증상이 오기 쉽다. 항생제를 적절히 투여하고 수액을 조절하면 폐렴 치료는 어렵지 않다. 대개 폐렴은 1, 2주 정도 지나면 몸의 상태에 따라 회복 여부가 결정된다.
귀순 병사가 앓고 있는 패혈증이 회복 여부의 관건이었다. 패혈증은 세균에 감염돼 발열, 빠른 맥박, 호흡수 증가, 백혈구 수 증가 또는 감소 등 전신에 걸쳐 염증 반응이 나타난다. 패혈증이 악화돼 쇼크가 일어나면 치사율이 30%까지 치솟는다.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는 경계가 한층 삼엄해졌다. 11월 19일 지상 1층과 지하 1층의 출입구는 보안 인가를 받은 사람만 접근할 수 있도록 문이 잠겨 있었다. 외상센터 내 중환자실로 통하는 길목은 국가정보원 소속 경호원과 군인으로 보이는 사복 차림의 경호원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북한군 하전사 오청성 (25세)은 북한군 총참모부 작전국 상좌의 운전병으로 북한 판문점 대표부의 상급기관인 총참모부 직속 경무대 소속 운전병이었다. 그는 군과 국가정보원의 합동 신문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귀순 의사를 밝혔다. 물론 그 이후에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국정원, 경찰청, 통일부 등 관계자가 함께 조사하는 치밀한 합동 신문을 다시 받았다.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의 전신은 정부 중앙합동신문센터 (약칭 중앙신문단)였다. 일반 회사처럼 보이는 대성공사라는 위장 명칭을 사용한 탈북자 조사와 정착 교육을 맡은 1급 국가보안시설이었고 외곽 경비는 정부사령부 관할이었지만 실제 운영은 그 당시 중앙정보부가 담당했었다.
그곳은 탈북자를 가장한 간첩을 색출하는 게 주목적이었으므로 탈북자들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독방에 수용되어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폭언과 욕설을 들었고 자신이 북한에서 평생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모두 털어놓아야 했다.
오청성은 목숨을 걸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넘어 귀순했다. 옛날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은 귀순자를 사선을 넘어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귀순 용사로 간주하고 체계적인 지원을 실시하는 법이었다. 그 후 동법은 개정되어 ‘귀순북한동포보호법’이 되었고 다시 ‘북한이탈주민의보호및정착지원에관한법률 (북한이탈주민법)’이 되면서 귀순의 개념을 북한 이탈로 대체했다. 그래서 그는 법률상 용어로는 북한이탈주민이다.
법적으로 북한이탈주민은 북한에 주소, 직계가족, 배우자, 직장 등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한을 벗어난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그 당시, 그는 판문점 인근 부대에서 동료 병사와 낮술을 마신 뒤 만취 상태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래서 익숙한 운전 솜씨에도 불구하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배수로에 자동차 앞바퀴가 빠지는 실수를 범했고 탈출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술에 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정상적인 정신으로 목숨을 걸고 남으로 내려올 수 있었겠는가. 술을 마시고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마취시켜 제정신이 아니어야만 고뇌와 고통, 결심, 망설임과 조바심, 긴장과 불안,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휴전선을 뚫고 내려오는 북한군 탈북자는 대낮에 지뢰밭에서 뛰어 내려오는 경우도 있고 1만 볼트 철조망을 뚫거나 지뢰밭을 건너서 갑자기 내려오는데 그건 만취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다.
그의 탈출 행위 자체는 귀순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혔다고 볼 수 있지만 (증명이)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다. 오청성이 합동신문에서 본인의 입으로 귀순 의사를 명확히 하였다. 그래서 정부는 오청성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하고 관련법에 근거한 혜택을 앞당겨 적용하기로 했다.
오청성을 치료한 아주대병원이 청구한 진료비 총액은 6500만 원이다. 이 중 4000만 원은 의료급여 재정으로 지원한다. 의료급여가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은 모두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통일부는 ‘탈북민의 정착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고 규정한 ‘북한이탈주민법’에 따라 본인이 부담해야 할 부담금 2,500만 원을 대신 내주기로 결정했다.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의 ‘의료행위 수가 목록’에 따르면 그가 받은 진료 중 가장 많은 비용이 들어간 처치는 소장 접합 수술로 추정된다. 그는 지난달 13일 JSA를 넘던 중 총알 4, 5발을 맞는 중상을 입었다. 이날 오후 5시경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이국종 권역외상센터장을 비롯한 의료진이 응급 수술을 시작했고, 오후 11시까지 이어진 수술에서 총알이 관통한 소장 40cm가량을 잘라낸 뒤 이어 붙였다. 상처 부위가 크지 않은 소장을 절제해 봉합해도 야간에 실시하면 수술비가 200만 원을 넘는다. 수술과 동시에 진행한 컴퓨터단층촬영 (CT)에도 수백만 원의 비용이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처음 병원에 도착했을 때 출혈이 심해 혈액 40유닛 (1유닛은 400mL)을 수혈받았다. 혈액 1유닛의 가격은 4만9670원이다. 그에게 사용된 혈액 가격만 200만 원에 육박한다. 수혈 시 헌혈증을 내면 유닛당 1만 원가량을 감면받는다. 그는 한국인 40명이 헌혈한 혈액과 함께 그들의 헌혈증을 한꺼번에 기증받은 셈이다.
그는 상태가 호전된 다음 국군수도병원으로 이송되었고 혹시 모를 암살 위협에 대비해 경비가 삼엄한 1인용 특실을 썼다.

이국종 센터장은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귀순병 쓰러진 채 총탄을 맞은 듯 골반과 소장이 으스러져 있었습니다.”
“첫날 눈에 띄는 기생충만 해도 50마리 이상 잡았습니다. 장을 손으로 짤 때마다 장 내용물에 섞여서 커다란 기생충이 나왔어요. 이런 환자는 난생 처음입니다.”
“터진 장으로 기어 나온 놈은 핀셋으로 잡고, 작은 놈은 손으로 퍼냈습니다. 소장 안에 기생충이 수천 마리, 수만 마리가 들어있을 수도 있죠. 회충으로 추정됩니다. 의학저널을 보니 먹는 알약인 구충제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환자가 회복한 뒤에야 구충제를 먹일 수 있습니다.”
“기생충이 상처에 달라붙어 피를 먹고 덧난 상처를 갉아먹었습니다. 기생충이 매우 좋아하는 먹이이죠. 소장 7군데를 꿰맸는데 기생충이 이걸 뚫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상처가 터집니다. 그러면 끝장이 나죠.”
“소장이 터지면서 똥이 장기를 오염시켰습니다. 한국인은 소장 내용물이 묽은데, 북한 병사는 똥에 가까웠습니다. 한 바가지 이상 받아내도 끝이 없었습니다. 먹는 음식의 종류가 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1, 2차 수술에서 똥을 씻으려고 1리터 식염수 100개 이상을 썼죠.”
“병사가 총알을 몇 발을 맞았는지 들어가고 나온 구멍을 확인한 결과, 4개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뒤에서 맞은 총알이 골반을 부수고 들어가 45도 각도로 위로 향하면서 소장을 으스러뜨리고 배의 두꺼운 근육층인 위쪽 복벽에 박혀 있었습니다. 수술에서 제거했습니다. 아마도 쓰러진 상태에서 맞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겨드랑이가 으깨진 이유는 다른 총알이 폐를 뚫고 겨드랑이로 관통했는데 그래서 폐가 위험한 상태입니다. 일주일 내지 열흘이 고비가 됩니다.”
“미군이 응급처치를 잘한 것 같습니다. 폐가 총상을 입으면서 공기가 빠져나와 흉곽 안에 가득 차면서 폐를 압박했는데 그대로 방치하면 ‘긴장성 기흉’이 생겨 바로 죽습니다. 미군 더스트 오프팀의 의무병이 헬기에서 가는 관을 폐에 꽂아 공기를 뺀 덕분에 죽지 않았습니다.”
“북한 병사의 소장이 짧았습니다. 한국인은 보통 소장이 2m가 넘는데 이 환자는 1m 60cm 정도였습니다. 북한 사람들의 내장 발육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1차 수술에서 60cm를 잘라냈고 2차 수술 후 배액관을 4개 꽂았습니다. 배 안에 고인 물, 체액, 피, 기생충 등을 빼내기 위해서죠. 내장이 터지면 똥물이 나와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귀순 과정에서 폐, 복부 등에 총상과 관통상을 입고 무의식 상태에서 두 차례 수술을 받은 오청성은 의식을 찾고 의료진과 대화할 정도로 회복하면서 그의 신상과 남으로 내려온 심정 등이 조금씩 알려졌다.
키는 170cm, 몸무게는 60kg 정도다. 북한 청년 평균 키보다 5~6cm 큰 편이다. 본인 의사로 귀순을 결심했으며,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 대해서 긍정적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귀순 동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운전병이 주특기로 군에는 8년째 복무 중이다. 애초에는 법학도를 꿈꿨다. 의료진이 “대량 출혈 치료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피가 1만2000cc 이상 들어가 전체 피가 세 번 이상 바뀌며 전신을 돌아 당신이 살 수 있었다”고 말하자, 그는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병실에는 TV를 설치해서 영화를 보여주고 한국 가요도 들려주었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깨울 때 자극을 주기 위해 음악과 TV를 활용하기도 한다. 그에게 소녀시대의 노래 ‘Gee’ 오리지널 버전, 록 버전, 인디밴드 버전을 들려주며 “어느 노래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소녀시대의 원곡이 좋다”고 했다. 그는 걸그룹을 좋아해 음악 얘기를 많이 나눴고, 북한에서는 인기 있는 스포츠가 아닌 야구도 이야기의 소재가 됐다. 그는 TV에서 영화 ‘트랜스포터’를 보면서 “나도 운전을 했다”는 얘기도 했다. 북한으로 들어온 한국 자동차 갤로퍼도 운전해봤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가 갈망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왜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했던 것일까. 우리는 그가 어디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자유로워지고자 했는가.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무엇에도, 그 어떠한 필요에도, 그 어떠한 우연에도 예속되지 않고, 과연 운명마저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국내 입국한 탈북민을 대상으로 매년 진행하는 연구 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8명이 북한에 있을 때 한국 영상물을 접한 적이 있다. 인기 드라마는 일주일 정도 지나면 북한에 들어간다. 2000년대 초반 한류를 주도했던 드라마 ‘천국의 계단’ ‘가을동화’ ‘대장금’은 북한에서도 단연 인기가 좋았다.
북한 주민 사이에는 남한 노래 한두 곡 정도는 부를 줄 알아야 세련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북한 가요는 체제 선전과 사회주의 사상만 강조하지만 한국 노래는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인간의 감정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그들 입장에서는 색다른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주민은 물론 당이나 군 고위층과 특히 통제가 심한 최전방 정예 군인까지도 한류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북한 당국은 외부 사조에 대한 단속과 제국주의 사상과 문화가 침투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하여 체제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 내 유입 통로인 국경 밀수를 엄격히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단속에는 한계가 있다.

누가 보면 안 되니깐 문 걸어 놓고, 안테나 잡으면 잡히니깐, 남한 방송에 한국사람 광고나, 6시 내고향 같은 것 보고…… 누가 문 두드리면 이불에 감춰놓고…… 소형 텔레비전이 단속품이니깐 몽땅 다 감춰놔요. 집을 본래 다 수색하는데, 우리는 남편이 직위가 있어서 그러지는 못하고…… 그러다가 한국 드라마 하면 애들하고 빛 나가면 안 되니깐 이불 쓰고 같이 보고…… 남편은 처음에 그거 왜 보냐고 그러고, 남편은 뉴스나 보도 같은 거 보면 우리는 다른 방에서 애들하고 이불 쓰고 ‘열아홉 순정’하고 다른 드라마 봤거든요. (탈북한 여성의 증언)

지난 90년대 말 고난의 행군기를 지나면서 북한의 통제 시스템의 이완은 남한 영상물을 비롯한 외부 정보가 대량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인기 드라마나 영화가 DVD나 USB 형태로 몇주 안에 북한 장마당에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된 것은 북한 주민의 생활이 윤택해져서가 아니라 10여 년 전부터 전력사정이 악화되어 TV를 마음대로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TV를 대체할 영상물이 필요했다. 중국 업체가 이 틈을 파고들어 12볼트 배터리로 DVD나 USB를 재생하는 미디어 플레이어 노텔 (NOTEL)을 생산해서 북한으로 수출한 것이다. 노텔은 하루에 1~2시간만 전기가 들어와도 배터리 충전이 가능했다. 설령 정전이 지속되어도 장마당에서 새 배터리를 구입하면 된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북한의 거의 모든 집이 그걸 보유하게 되었다. DVD나 USB에 담긴 남한 콘텐츠가 북한 전역에 무차별하게 퍼지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휴대폰의 도입으로 가격과 수요에 대한 정보 공유가 북한 전역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장마당을 통해 거래하는 까닭에 일종의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군인들이 뇌물을 받고 지역 간 이동을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다. 장마당 상인들은 군인과 조직적으로 연계하면서 북한 사회에 한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북한 군인처럼 한국 영상물 유통을 막아야 하는 이들이 오히려 더 많이 시청하고 있는 것이다.

줄이 다 있어요. 몰래 몰래 파는 사람들. 연결 연결 돼서…… 천국의 계단 같은건 다 합해서 20알이에요. 그래서 비싸단 말이에요. 이런 건 돈 주고 빌려 보는 거예요. 대여점 같은 거. 그런 걸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요. 천국의 계단 같은 건 스무 알이니까. 이틀 동안 20편을 다 봐야 하는 거죠. 밤이고 낮이고 문을 딱 채우고. 한번 보고 너무 재미나서 또 빌려 봤어요. 사지는 않았어요. 그냥 다 빌려 봤어요. 그런 거 가지고 있어봤자 불편하니까. 그냥 재깍재깍 빌려보는 게 낫지…… 그런 거 가지고 있다가 검열에 걸리면 안 되니까. (탈북한 여성의 증언)

북한 내 한류는 외부 정보 접촉이 제한된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을 이해하는 기회의 창이다. 북한 주민들은 평소 당국으로부터 교육받은 썩고 병든 자본주의 남한이 아닌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며 경제적으로 발전한 남한을 경험한다. 한국의 발전상 및 민주화에 대한 인식은 자연적으로 북한의 가혹한 독재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남한 영상물이 미치는 역풍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남한 영상물의 지극히 자극적인 폭력성, 선정성 등은 북한 당국이 ‘남조선 날라리풍’으로 선전하는 남한 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일부 일치하는 면이 있다. 때문에 북한 주민들에게 그들의 선전 내용을 재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외부 정보의 유입이 북한 사회 전반으로 이어지기에는 아직까지 한계가 있고 북한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고 통일을 향한 순풍, 강풍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선군정치 이념 아래 군부의 위상과 권력이 막강한 북한 체제에서 군인의 기강은 체제의 변화 여부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북한 군인들이 외래문화를 접하고 의식과 행동 양식이 변한다는 사실은 체제를 약화시키고 전복시키는 요인이 된다. 한국에 대한 적대감 대신 같은 민족으로서 동질감을 느끼면서 저렇게 잘 사는 평화로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동경이 생기니까 체제에 대한 충성도와 결속력이 떨어지게 된다.
1인 독재체제의 붕괴는 시간 문제로 보인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언제까지 2,500만 인민들을 끝까지 속일 수 있을 것인가.


비전향 장기수
3. 1945년 8월 15일,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면서 분단의 조짐이 벌써 나타나고 있었다. 그날은 1945년 8월의 어느 멋진 날이 아니었다. 일제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그런 해방이 아니라 한반도에 새로운 남북 분단의 비극과 고통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태백산맥을 가로지르는 그 경계선은 지도 상에만 나타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실제로는 산과 들판, 강, 마을, 돌담, 울타리, 산맥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갈대밭에 불과했다.
38선은 개성의 여연면 이웃 마을들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북쪽은 여연 북면이고 남쪽은 여연 남면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여연 북면 마을의 전봇대나 담벼락에는 벌써부터 붉은 글씨로 큼직하게 쓴 포스터들이 너덜너덜하게 붙어있었다.
‘조선을 해방시켜준 위대한 붉은 군대 만세!’
‘위대한 지도자이시며 조선 해방의 은인이신 스따린 대원수 만세!’
‘소련인민과 조선인민의 영원한 친선 만세!’
미국은 8월 6일과 9일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7월 중순경 원폭 실험에 성공한 미국이 서둘러 투하한 것은 대일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8월 8일 밤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군은 8월 9일 한반도의 가장 동북에 위치한 웅기를 폭격하고 8월 13일 청진에 상륙했으며, 8월 15일 북한 진주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에서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조선에 왔으며 이제 조선인민은 해방되었다’고 선언했고, 8월 24일에는 소련군 제25군이 평양에 진주했다.
미국은 일본 항복 후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긴급조치로 8월 14일 38도선을 기준으로 군사작전 분계선을 획정하여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소련에 제안하고 이에 소련이 동의했다.
그렇지만 미군은 9월 8일부터 남한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일부의 오해처럼) 한반도의 38선 분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짓기 위한 카이로와 얄타, 포츠담 회담에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1943년 11월 23일, 카이로회담에서 ‘적절한 절차에 따른 한국의 자유 독립’이 약속되었을 뿐이고 이후 이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38선이 군사작전 분계선으로 확정되면서부터 소련군은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북한 전 지역에 대한 점령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38선을 봉쇄하여 남북한 간 통행, 통상, 통신을 차단하면서 생활의 분단선 뿐만 아니라 통치의 분단선으로 변질되었다. 소련군은 그 당시 북한 지역을 점령함에 있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점진적으로 내려오면서 점령하는 순서를 택하지 않고 북한의 최남단에 해당하는 38선 지역부터 먼저 점령한 다음 그 이북지역을 올라가면서 점령하는 순서를 따랐다.
소련군은 8월 23일부터 28일까지 사이에 서해안에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에 인접한 북한 지역의 모든 교통 요지를 점령하고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인 경원선과 경의선을 차단하며 38선에 경비 부대를 배치하여 도로 통행을 차단했다. 9월 6일에는 38선 이남 지역과의 통신을 완전히 차단하고 우편물의 교환을 금지했다. 이로써 38선이 국경선이 되면서 남북한 간 인적 왕래, 물적 교류, 통신과 교통이 모두 차단됐다.
1948년 5월 10일,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면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어 제헌 의회가 성립되었다.
7월 17일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제1공화국 헌법이 공포 시행되었고, 7월 24일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에서 선출되었으며, 8월 15일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9월에는 북한에서 김일성이 주도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해 남과 북은 각자 정부를 수립하면서 돌이킬 수 없게 갈라섰다.
1949년 10월 1일, 중국에서 공산 혁명이 마침내 성공했다. 모택동은 북경 천안문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선언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라디오에서는 북한의 전면 남침 소식을 전했다. 인민군은 소련제 T-34-85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돌파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국군은 6월 24일 자정을 기해 그동안 유지하고 있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면서 농촌 모내기를 도우라고 사병들에게 2주간 특별 휴가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말이 겹쳐 부대 병력 거의 절반이 외출 외박을 한 상태였다.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 등 국군의 고위 간부들은 저녁 6시에 시작한 육군회관 낙성식 파티로 술에 취해 전쟁 당일인 일요일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6월 28일 정오 무렵, 북한군은 지금 막 서울에 들어섰다. 그날 새벽 2시경 천둥소리 같은 폭음이 들리면서 한강 다리가 국군 공병 부대에 의해 폭파됐으며, 이승만 정부는 그 이전에 이미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남쪽으로 내려갔었다.
그 당시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평소 이승만 대통령에게 “각하, 명령만 내리십시오.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압록강에 가서 발을 씻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었다.
6월 29일 밤, 중국 혁명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던 북한군 주력 부대는 아주 수월하게 서울을 점령하였다. 중국 인민군에 편입되어있던 조선군이 북한으로 돌아와 북한 인민군의 선봉이 된 것이다.
그러나 춘천과 홍천 방면으로 진격한 2사단과 7사단이 뜻밖에도 주춤거려 작전상 큰 착오가 생긴다. 이로 인해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도주한 국군의 주력 부대를 섬멸하지 못했다. 게다가 2사단의 병력 손실이 예상보다 컸다. 그렇지만 이제 승리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만에 하나 물러간 미군이 다시 개입하게 되면 전쟁은 큰 난관에 부딪힐지도 모른다. 김일성은 그때까지도 미군이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6월 말쯤, 아주 빠르게 미군이 개입하기로 했다는 공식 결정이 나왔다. 북한군에는 짙은 암운이 드리워지는 순간이다. 당 지도부가 그렇게 확신했는데 미군이 개입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궁금한 일이었다.
1950년 7월 4일,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2군단 지휘부가 전격 교체됐다. 군단장에 저 유명한 팔로군 포병단장 출신인 무정 장군이 취임했다. 2사단과 7사단장도 바뀌었다. 7사단은 아예 사단 이름을 12사단으로 바꾸었다.
그래도 8월 초에는 인민군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미군은 중국 혁명 전쟁에서 단련된 인민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했었지만 인민군은 계속 밀고 내려온 것이다. 그 당시 더 이상의 미군 개입만 없었다면 북한은 최종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고 단언해도 좋을 터이다. 8월로 접어들면서 전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김일성은 7월 20일 강건 인민군 총참모장을 대동하고 충주까지 내려와서 “8·15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키라”고 인민군을 독려했다.
8월 17일, 팔공산까지 진출한 인민군이 쏜 박격포탄이 대구 시내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중 한 발이 대구역사에 명중했다. 그때 이미 정부와 국회는 부산으로 옮겨간 후였다.
대구 시내에는 인민군에 패해서 부대를 잃어버리고 오합지졸이 된 군인들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질서는 엉망이었다. 육군본부가 내려와 대구중앙초등학교에 본부를 차렸다. 전세가 급전직하로 나빠졌고 대전, 김천이 이미 인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제 낙동강이 최후의 보루가 됐다. 팔공산 쪽에서 박격포탄이 대구 시내로 막 날라왔다. 대구가 밀리면 전쟁은 끝나는 상황이었다. 부산이 남아 있긴 했지만, 낙동강 전선이 대한민국의 마지막 생명선이었다.
그 당시 조병옥 내무장관이 대구 시민들 앞에서 호소했다.
“우리가 대구를 버리면 갈 곳이 어디 있느냐? 대구가 무너지면 부산이 무너진다. 부산이 무너지면, 우리는 대한해협에 빠져 죽는 수밖에 없다. 대구를 버리면, 대한민국을 버리는 것이다. 대구를 사수하자!”
9월에 들어서자 낙동강 전선은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국군에게 유리하게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군의 맹렬한 폭격에 북한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아군이나 적군이나 할 것 없이 너무나 많은 군인들이 낙동강 주변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젊은 몸에서 콸콸 쏟아지는 선홍색 피가 도랑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었다. 곳곳에 시신이 쌓여갔다.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찢어지는 듯한 부상병의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9월 15일, 마침내 미군이 인천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그때부터 인민군은 동요하면서 우왕좌왕했다. 인민군은 전선이 끊기면서 낙오병을 남겨둔 채로 무질서하게 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미군과 국군은 승승장구하며 쾌속으로 북진하여 평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10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 참모총장을 대동하고 폐허로 변한 평양을 방문했다. 벌써 차갑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었다.
그렇지만 그 무렵 국군 1사단이 평양을 거쳐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했을 때 ─ 국군은 통일이 눈앞에 왔다고 생각했고, 미군은 늦어도 성탄절까지는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을 때 ─ 는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중공군이 이미 암암리에 운산 방면으로 진출해 있었다.
그들은 벌써 두툼하게 누빈 방한복에 고무 운동화까지 갖춰 월동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들은 매복과 기습에 강했고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며 진격했다.
1951년 1월 4일, 국군과 미군은 속수무책으로 서울을 뒤로하고 다시 남으로 남으로 후퇴했다. 3월 중순경에야 다시 서울이 탈환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피의 능선 전투인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1953년 3월 5일, 모스크바 방송에서 놀라운 소식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요, 그의 계승자였으며, 공산당과 소련 인민의 현명한 지도자이자 교사로서 우리 곁에 있던 조세프 비싸리오노비치 스탈린의 심장이 박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장송곡이 하루 종일 흘러나왔다.
스탈린이 뇌출혈로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3월 10일, 말렌코프가 소련 공산당 제1서기 및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스탈린이 죽은 뒤 6·25 전쟁은 휴전 협상이 급진전 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미군은 평양을 포함한 북한 전역에 무차별적 폭격을 가했다.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되면서 어느 측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전쟁을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막후 접촉으로 휴전협상을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국내 민심은 들끓었다. 엄청난 희생과 피의 대가가 고작 전쟁 전 상태로 회귀하는 협상이 진행된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전국에서 연일 휴전 반대 데모와 대중집회가 열렸으며 이승만 대통령도 휴전에 적극 반대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약이 성립되었다.
6·25 전쟁은 3년에 걸쳐 대규모로 벌어졌음에도 전쟁 전 남북 분계선인 38선과 거의 같은 자리에서 휴전이 성립되었다. 3년 동안의 전쟁은 남과 북 모두에게 깊은 상처만 남긴 채 전쟁 전 원점으로 돌아가서 임시 휴전을 한 것이다. 하지만 남북은 이후 철천지 원수가 되어 분단은 더욱 고착화 되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천인공노할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켰단 말인가?
1953년 7월 29일, 평양에서는 ‘조국해방전쟁 승리경축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1953년 9월 13일 오전, 경찰 수색대는 지리산 빗점골에서 지리산 유격대의 지휘자였고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의 시신을 발견했고 국군 수색대는 전날 저녁인 17일 밤 8시에 자신들이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시체는 화개장터 근처 섬진강 백사장에서 화장되어 섬진강에 뿌려졌다.
그 무렵 김일성은 박헌영 등 남로당 지도부가 전쟁이 나면 남한에서 총궐기가 일어나 순식간에 승리할 수 있다고 과장해서 떠들었다며 실패의 책임을 남로당에게 돌렸다. 그래서 박헌영과 남로당 지도부는 전쟁 실패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고 조선노동당의 제단에 속죄양이 되었다.
그때 남로당의 종파주의 잔재를 청산하는 자아 비판을 시작하면서 박헌영을 제외한 이승엽 등 남로당 지도부 12명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 전복음모와 반국가적 무장폭동 및 선전선동에 관한 건’으로 공판이 시작되었다. 공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53년 10월 15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이승엽, 임화 등 남로당 지도부 당원들에게 사형집행을 승인했다.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별도로 재판을 받으면서 이른바 미제간첩사건으로 끝내 사형판결을 선고받았다.
현앨리스는 박헌영의 애인이자 미국과 박헌영을 연결한 스파이로 지목돼서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군정 군속으로 한국에 왔지만 공산주의자로 몰려 추방됐고 46세에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박헌영의 애인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과거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기간이 너무 짧았고 비슷한 시기에 각자 결혼한 다른 배우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남로당은 완전히 몰락했다. 그는 북한 공산당의 지휘 감독을 받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재판관들 앞에서 그들이 써준 각본에 따라 최후 진술을 했다.
“검사총장의 론고는 전적으로 지당합니다. 저의 마수에 걸려 수많은 사람들이 추악한 범죄를 범하였으며,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불행에 대하여서와 일체 범죄행위에 대하여서는 저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검사총장이 론고한 바와 같이 저의 죄악의 엄중성으로 보아 사형은 마땅한 것입니다. …… 제가 미국 간첩들의 두목이고 그들은 나 자신이 희망하는 범죄를 감행하게끔 모든 것을 비호 보장하여온 장본인인 까닭에 전적으로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끝으로 제가 과거에 감행하여온 추악한 반국가적, 반당적, 반인민 매국역적 죄악이 오늘 공판에서 낱낱이 폭로된 바이지만 여기 오신 방청인들뿐만 아니라 더 멀리 인민들 속에 알리어 매국역적의 말로를 경고하여주시기 바랍니다.”


4. 수십 년간 감옥살이를 감수하면서라도 지켜야 할 정치적, 인간적 신념은 어떤 것일까. 실제 공산주의가 완전히 몰락하고,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철권정치가 지배하는 북한 사회의 어두운 현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뒤에도 포기할 수 없는 그 화석처럼 굳은 신념이란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대의 길을 가라.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버려 두어라. 70~80년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인 그들의 깊이 패인 주름으로 굴곡진 얼굴을 보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까.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빨갱이’ 중에서도 ‘골수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그런 탓에 오랫동안 사회와 격리됐다. 짧게는 3년, 길게는 37년, 평균 20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들의 복역 기간을 합치면 384년에 이른다.
이들 대부분은 오랜 수감생활을 마친 뒤 정착할 고향과 가족이 없어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궁핍하게 살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생계급여와 노령연금에만 의존해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한국전쟁 전후의 빨치산 및 인민군 포로, 자발적 전향자, 전쟁 이후 북에서 내려온 남파공작원, 자생적 반체제 운동가 출신 등으로 분류된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분단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기억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며 굳건하게 버텨왔다. 그림자처럼 살아온 이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가족과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최근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들의 2차 송환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 현대사의 그늘에서 숨죽이고 살아온 비전향 장기수들의 소망은 언제쯤 이뤄질까.
그들은 말한다. “인간의 사상을 폭력과 고문을 통해 바꾸려는 발상은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이다. 모진 고문에 못 이겨 서약서는 썼지만 내 사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지배를 위해서 만들어진 ‘사상 전향 제도’는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의 권리를 폭력적으로 억눌렀다. 그건 인간의 고귀한 권리인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짓밟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석방이 아예 불가능했다. 사상 전향 제도의 원조였던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이를 폐지했다. 남북으로 분단되어 사상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실에서 불가피하게 50년 넘게 존속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1998년에야 사상 전향 대신 ‘준법 서약서’를 쓰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상 전향 제도가 폐지되고 2000년 남북정상이 합의한 6·15 공동선언에 따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은 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차 송환 당시 미처 신청을 못 했거나, 과거에 강제로 전향서를 썼던 30여 명은 한국에 남아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2차 송환을 애타게 바라는 비전향 장기수들이다. 이후 2017년까지 15명이 세상을 떠났다.
2000년 9월, 김선명 노인 등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휴전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했다. 온 북한 땅이 환영 분위기 일색이었다. 북한 언론은 이들의 북송이 6·15 공동선언 이후 거둔 첫 승리라고 하면서 비전향 장기수들의 굽히지 않는 신념을 본받아야 된다고 선전했다. 북한은 이들 전원에게 조국통일상과 노동당 당원증을 수여했다.
북한 당국의 환대에 감동한 일부 비전향 장기수는 북으로 올 때 가지고 온 돈을 모두 당에 바쳤다. 그들이 지닌 환상 속 북한은 의식주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곳이었다. 입는 걱정, 먹는 걱정, 집 걱정이 없는 북한에서 무슨 돈이 필요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북한에서 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국이 그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긴 하지만 돈이 있어야 주말에 가족들과 외식이라도 할 수 있었고 외화상점이나 장마당에서 필요한 물품을 살 수 있는데 그런 돈은 당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비전향 장기수들의 일부는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안도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당에 돈을 바치지 않고 숨겨둔 이들이었다. 그들도 차츰 북한의 어두운 실상을 깨닫게 되었다. 북한에서도 신념이 아니라 돈이 있어야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김선명은 6·25전쟁 때 북한 의용군에 들어가 1951년 10월 포로가 되었다. 서울고등군법회의에서 간첩죄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95년까지 44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남한에서는 총각 할아버지로 불렸었는데 북한에 와서 비로소 결혼을 했다. 그는 2011년 세상을 떠났다.

서옥렬 선생은 광주광역시 임대아파트에서 혼자서 살고 있다. 현관문에는 배달음식점 광고 인쇄물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마치 빈집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집안은 나름 정돈되어 있다. 여전히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 가끔 폐에 물이 차올라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다. 국가에서 생활보조금을 받아 살아가고 의료보호 혜택도 받고 있다.
핏기없는 얼굴은 수척했다. 흰머리가 듬성듬성한 머리는 짧게 잘랐는데 넓은 이마에는 잔주름이 세월의 흔적처럼 깊이 패어 있었다. 흰 런닝 셔츠와 줄무늬 팬츠만 입은 속옷 밖으로 드러난 팔과 다리는 뼈만 앙상했다.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걸을 수 없다. 하지만 눈은 매섭고 생생하게 빛났고 입에는 냉소적인 미소가 흐른다.
그는 1928년, 일제강점기에 그 당시 전남 무안의 부잣집에서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8년에는, 홍명희 작가가 조선일보에 장편 「임거정」의 연재를 시작했고, ‘황성옛터’가 대유행을 했으며, 홍난파가 이은상 작사 ‘옛동산에 올라’를 작곡했고, 박승희 등은 토월회를 재조직하고 ‘사의 승리’ 등을 공연했으며, 동국대학교 전신인 불교전수학교가 서울 명륜동에 개교했고, 임정 초대 외무총장 박용만이 밀정으로 오인되어 의열단원 이해명에게 피살되고, 일본 경찰은 제3차 공산당 사건에서 공산당원을 대거 검거했으며, 일본은 사형과 무기징역을 추가한 ‘치안유지법’을 개정 공포했고,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은 그해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고 입학하자마자 조선공산당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연맹에 가입했으며, 소련은 토지소유금지법을 공포하고 모스크바에서 제6회 코민테른 대회를 열어 코민테른 강령을 결정하면서 파시즘 반대를 선언하고, 장개석은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했으며,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후버가 당선되었다.
8·15 해방 당시, 그는 고보 재학 중이었다.
그 무렵 북한은 소련군의 지휘 감독 아래 재산의 몰수와 국유화, 토지개혁, 반동과 인민재판, 흑백논리 등 김일성의 공산주의 체제가 일사불란하게 정착하고 있었지만, 남한에서는 보수 우익 세력, 북한의 조종을 받는 철저한 좌익 세력,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중도파, 감상적 민주주의 세력들이 뒤엉켜, 해방 정국의 격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해방 당일까지 박헌영은 광주의 한 벽돌공장에 숨어서 지하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8·15해방 이후 남한에서 정권 장악에 실패한 남로당 등 진보적 정치세력은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박헌영의 지휘하에 다시 지하로 들어가 지리산을 비롯한 산악지대에서 무장투쟁이라는 전술 형태를 택하게 되었다.
8·15해방 후 남한에는 좌경인사들이 많았다. 젊어서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으면 똑바른 청년이 아니라는 풍조까지 있었다. 좌우 이념 갈등으로 혼란이 빚어졌을 당시, 적지 않은 학생들 사이에서 김일성 대학을 선망하고 북한을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성 국가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남한에서는 미군정 당시부터 친일파 고등계 형사들이 여전히 득세했고 친일파 지주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정당을 조직했다는 근거 있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실제 친일세력은 이승만 정권의 골간을 이루고 있어서 정부와 국회, 사회단체에 광범위하게 포진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런 영향을 받아 많은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남한의 체제에 불만을 드러내며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었고 사회주의 계열의 책을 열심히 탐독했다.
그는 경제학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제1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던 1948년 그해 봄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김구는 2월, 남북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북한의 김일성에게 보냈고, 4월에는 북쪽으로 가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고, 7월에는 북한에서 단독 정부의 수립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400여 명의 남로당 유격대는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고 경찰관과 우익 인사들, 그들의 가족을 살해했다. 그리고 10월부터 여수 주둔 제14연대 반란, 대구 주둔 제6연대 반란, 마산 주둔 제15연대 반란, 광주 주둔 제4연대 반란 등 군사반란이 연달아 발생했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 발생한 군사반란 중 제일 먼저 일어나고 가장 규모가 큰 반란은 여수 주둔 제14연대의 반란이었다.
그가 대학 3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전쟁이 발발한 그해 여름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학도병들은 아주 짧은 기간 훈련을 받고 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 당시 낙동강 전선을 지키던 부대에는 학도병이 없는 부대가 없었다. 호남 출신 학도병들은 주로 낙동강 남부 전선에서 활약했지만 많은 어린 학도병들이 전선에서 무수히 산화했다.
이우근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간절한 편지를 썼지만 부치지는 못했다. 그는 서울 동성중 3학년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에서 한창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1950년 8월 11일 숨을 거뒀다. 그날 전투에서 제3사단 학도의용군 71명 중 그를 포함해 48명이 전사했다.

학도병의 편지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왜 수의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서옥렬은 인민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패하고 오합지졸이 되어 북으로 뿔뿔이 후퇴했던 1950년 늦가을부터 전선이 교착 상태에서 고지 쟁탈전이 계속되던 1953년 늦봄까지 사이 언제쯤 전향했을까?
우리는 그가 인민군 포로가 된 다음 전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탈출해서 인민군에 투항했는지,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말 못 할 깊은 사정이 있었는지, 그 전향의 장소가 남한 땅이었는지 북한 땅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때 남한 사회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격렬한 증오심을 느꼈는지 아니면 남쪽에 남은 가족을 생각해서 정신적으로 압박감을 느끼고 약간은 고통스러웠는지도 알 수 없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북한 영토인 강원도 천내군의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심한 부상을 입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빨리 이례적으로 제대를 할 수 있었던 건 대단한 특혜로 보이고, 또한 곧바로 중학교 교사로 임용된 것도 그렇고 북한의 엘리트들만 갈 수 있는 김일성종합대학교에 입학한 것도 그렇다.
그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쟁의 고통과 불안, 전향, 남쪽 고향의 가족에 대한 걱정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미래를 위한 대안을 모색하고 비전을 꿈꾸었을까.
1955년 그는 같은 학교의 강순성 교사와 결혼을 했다. 그때 결혼식 사진을 찍었을까? 결혼 피로연은 아주 조촐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년여밖에 지나지 않아서 물자가 아주 궁핍한 시기였다. (그는 지금 결혼식 사진은 물론이고 아내나 자식들 사진을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1955년 12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서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평양의 간부 양성소에서 일했다. 그는 이미 ‘저는 로동당에 입당하게 되면 당의 강령과 규약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면서 저를 조선로동당에 입당시켜 줄 것을 청원합니다.’라는 취지의 입당 청원서를 제출하고 후보 당원을 거쳐서 정식 당원이 되었다.
그때는 김일성이 남한의 북침 전쟁에서 미국을 물리치고 승리했다고 주장하면서 남로당 지도부를 미제간첩사건으로 몰아서 완전히 제거하고 독재 권력을 공고히 한 때였다.
그사이 아들 태길 (1956년)과 태현 (1957년)을 연년생으로 낳았다. 북한 당국이 특별히 마련해준 평양 선교리 대동강을 건너면 바로 보이는 아파트 5층 8호실이 그가 살던 집이었다.
그는 30대 초반이던 1961년 8월 9일 아내와 두 아들 (당시 5살, 3살)에게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공작원으로 남파됐다.
남파 공작원은 대부분 30대 중후반의 나이 때 특별히 선발되어 해상침투훈련, 잠복호 구축, 사격, 폭파, 모스 부호 수신 등 공작원 밀봉 교육을 받고 남파된다. 하지만 북한에서 집안이나 배경이 좋은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현장에서 빠진다. 그런 사람들이 왜 목숨을 건 위험한 임무를 맡으려 하겠는가.
1960년 4·19 학생혁명 직후와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 북한의 김일성이 어떤 정세 판단을 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남한을 뒤흔들 아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한에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백가쟁명으로 아주 혼란 상태가 됐는데 학생들에 의해 정권이 무너졌으니까. 그때는 경찰이 아니라 학생들이 파출소를 접수하고 치안 유지를 하고 있었다.
50년대 말과 60년대 그때는 나름대로 북한이 잘 나갈 때였다. 1953년부터 1958년까지 시행된 경제복구건설과 농업 집단화, 사회
작성일:2019-10-07 14:00:14 14.32.9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