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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에세이> 작가의 말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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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8-06-23 12:57:09
조회수
422
작가의 말 (6)



나는 작품의 초고를 완성한 후 오랫동안 수정을 거듭하면서 매만졌다. 그러나 완성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이쯤에서 멈춰야 했다. 금년 (2018년) 6월 다섯 권의 소설을 펴냈다. 장편소설 「광화문 광장」, 중편소설집 「무진기행, 그 후」, 단편소설집 「귀휴」, 「티베트 기행」, 에세이집 「변호사 웬 소설을……」 등. 대부분의 소설을 새로 쓴 것이지만 소설집에는 기존에 발표하였던 몇 편의 소설을 수정하여 재수록하였다. 이들 작품은 변형과 근본적인 변화를 거쳐 플롯과 디테일과 주제의식이 풍부해졌다.
나는 섬세한 인간 감성의 소유자일까. 항상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그러므로 나의 작품에는 죽음과 자살을 많이 다루지만 그건 죽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은 죽음으로 귀결되므로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어서 죽음의 수용에 관한 것이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memento vivere (삶을 기억하라)
내가 창조한 작중 인물들은, 살인자이거나 사기꾼인 경우에도 최소한 인간적 품위를 지니고 있다. 나는 자신의 인물들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대했다. 내가 창조한 작중인물에게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실존인물로 착각하는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하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작가를 호명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해서 나는 스스로 작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꾸준히 계속해서 쓴다. 그리고 고친다.
나는 그들의 문학적 취향과 스타일과는 동떨어져 있다. 나는 무지하고 편협된 비평가들과 편집자들이 기거하는,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로 둘러싼 문학장이라는 성 또는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기능하는 지극히 편향된 폐쇄적인 문단,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문단 권력과는 다행스럽게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이 내 작품을 읽거나 그들로부터 인정받을 일은 없다.
나는 다시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작가로서 실패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유행에 뒤처졌고, 나이도 먹었고, 더 이상 뭘 더 잘할 수도 없으며, 머리까지 나쁘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는 큰 위안이고 동시에 형벌이기도 하다.”

전남 고흥 출생. 한반도 남단 고흥반도의 끝.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소록도 부근 바닷가가 고향이다. 바다는 위안이고 심연의 상처이다. 그는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는 자폐적이고 독특한 개성을 가진 복합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모순적이다. 허무주의자이면서 (특정한 이념에 매달리지 않는) 현실주의자이고, 불신자이거나 불가지론자이지만 범신론자로서 신들과 영혼의 불멸성을 믿고 있고, 자유의지를 강조하면서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운명론자이다. 그는 인간의 선에 대해 회의적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위선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에 대해 깊은 연민과 함께 미련을 갖고 있는 센티멘탈리스트이기 때문이다.
그의 지적 삶 속에는 빛나는 모티프, 고갈되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있다. 그렇지만 영원히 무명 작가로 남을 것이다.
그는 법학자에서 작가로 변신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의 자아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지는) 정서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 시대의 사회문제가 안고 있는 양가적 측면과 모호성, 갈등, 위선과 비굴함, 미묘한 복잡성을 포착하여 소설로 형상화하는 데 관심이 많다. 지금/여기/우리의 시대 상황을 증언한다.


1. 장편소설 「광화문 광장」

2017년 촛불혁명과 1987년 6월혁명에 대한 오마주.
빛나는 광선은 빛이 굴절하는 밤의 어둠 속에서만 참으로 빛난다.
나는 몇 번째, 아마 열 번째 광화문 광장에 나가 촛불집회에 참석하면서부터 어떻게 해서든지 이 상황을 소설로 형상화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생생한 언어와 몸짓, 촛불과 사물들, 광화문, 동상, 멀리 보이는 북악산, 고층 빌딩들이 우리의 역사를, 공동체의 운명을, 죽은 자들에 대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했기 때문이다.
80년대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채 어둠 속에 묻혀 있는 핵심이 남아 있을까. 밝혀진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진실을 캐내고,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진실의 파편을 모아 짜 맞춰서 그 당시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로 역사적, 도덕적 관점에서 지금/여기/우리의 시대 상황을 증언할 수 있을 것인가. 누굴 위해 무엇에 대해 쓸 수 있단 말인가. 작품이란 오직 작가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백지 뒤에 숨어서 글을 쓸 때면 주저하지 않고 자신감으로 충만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역사적 기억을 어떤 도구로 이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몇 번에 걸쳐 아주 많이 수정 보완되었다. 최신 버전은 블로그 https://blog.naver.com/jungwon4760 에서 읽을 수 있다.)


2. 중편소설 「무진기행, 그 후」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은 1964년 봄 <사상계>에 발표되었다. 어언 반 세기가 흘러갔다. 인물들의 그 후 인생행로 이야기.

― 나는 더 늦기 전에 결정을 내렸다네. 자유로운 한 개인의 권리에 근거해서 내 생명을 처분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자살에 이를 만큼 절망적이지도 않았고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네. 다만 자살을 감행할 만큼 정신적으로 강한 의지와 용기는 가지고 있었다네. 죽을 마음의 준비가 된 거지.
내가 깊은 밤 어느 순간 발작을 하고 충동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을 정당화할 충분한 논거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세. 나는 충분히 오래 살아남았네. 어쨌거나 일찍 죽는 것보다는 오래 사는 것이 더 좋은 거지. 그 이후 일어난 내 이야기를 두서없이 자네에게 모두 털어놓았고 더욱 자세한 것은 내가 일기장이나 메모, 비망록을 남겨놓았으니 그걸 참고하게나. 그 일기장에는 金惠淑의 사진이 여러 장 들어있다네. 그러나 몇 가지 비밀은 비밀로 그냥 남겨두었지. 내가 당신에게 두서없이 이야기했던 그 후…… 내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써서 발표하는 것에 동의한다네. 당신이 그럴 생각이 있다면 말일세. 쓸데없는 간섭을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만 가급적 또는 꼭 정확히 사실 그대로 쓰는 게 어떨까. 더 이상 내 이야기가 가감하고 윤색되어 과장되거나 미화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네. 어쨌거나 책을 출판하게. ‘모든 책은 제각기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 안개처럼 깔려있는 어둠을 헤쳐 나가게. 자네도 잘 알다시피 안개는 결국 햇빛에 사라지게 돼있어. ‘어둠이 깔려야 비로소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비상을 시작한다’고 했다네.


3. 단편소설 「티베트 기행」

건축은 건물이면서 예술이다. 건축은 예술이다.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건축은 작품이고 고유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건축가가 자신의 의도 또는 예술적 감각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건축가이고 (사막) 여행가인 김규현은, ‘내 건축물이 나를 대신해서 말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전 언제나 확신이 안 서지요. 어디쯤에서 멈춰야 하는지를…… 항상 불안합니다. 하지만 일이란 끝이 있어야 합니다. 끝장을 봐야 해요. 저에게는 기본 설계가 그것이죠. 저는 항상 내 건축물이 나를 대신해서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지요.
― 당신의 건물들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었답니다. 당신이라는 건축가는 자신의 인생과 일에 대해서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일 자체를 미친 듯이 추구하더군요. 돈이나 명성에는 초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자기기만이고 위선인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지요. 심한 자괴감이 들더군요.
― 벌써 눈치채셨군요. 전 위선자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돈이라면 환장하거든요.
― 그렇다고 해야겠죠. 누가 돈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변경된 설계도에 대해선 추가비용을 당연히 지불할 것입니다.
― 뭔가…… 약간의 오해가…… 예술에 있어서는 비용 문제가 아니지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까요?


4. 단편소설 「귀휴」

귀휴는 재소자가 출소하기 직전 일정한 사유에 따라 잠시 휴가를 얻어 교도소 밖으로 나오는 제도이다. ‘형의집행및수용자의처우에관한법률 (구 행형법)’ 제77조에 의하면 6개월 이상 복역한 수형자로 형기의 3분의 1이 지나고 교정 성적이 우수한 경우 1년 중 20일 내에서 귀휴 허가를 받을 수 있다. 징역 21년 이상을 선고받은 유기수 또는 무기수는 7년을 복역해야 한다. 교도소 내 귀휴심사위원회가 귀휴 여부를 결정한다.
―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가석방되는 날의 순간을 상상했다.
얼마나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가. 외부로 통하는 감방의 육중한 철제문이 열릴 것이다.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질 것이다. 그러면 낯익은 콘크리트 담벼락, 망루, 쇠창살, 자물쇠, 운동장, 작업실, 죄수들, 교도관, 불안과 초조, 정적 등과 마침내 이별을 하게 될 것이다.
잘 있거라! 잘 있으라고! 안녕! 안녕! 안녕!
그러나 가석방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돌이켜보면…… 길고 긴 고난의 여행길이었다.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자각하게 해주는 여행. 그 여행은 곧 나를 아는 길이었을까? 그러면 무엇을 찾아서 떠난 여행이었을까? 혹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또는 나의 신을 발견하기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나는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여전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침묵 속에서 콘크리트 벽과 망루에 둘러싸인 암흑의 숲을 헤매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목적과 주제는 대학로 연극계의 고단한 현실과 고군분투하는 연극계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그리고 삶과 죽음, 그들의 죽음은 불가피했다. 그게 작가의 결론이다. 나의 지친 마음이여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므로 연극계가 부패하여 그 폐단이 심각하다는 실상을 고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대학로 현장에서 면밀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연극계의 풍토는 너무나 열악하여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5. 단편소설「모창가수」

인간은 누구나 그 몸속에 야수를 숨기고 있다.

나는 30년을 넘게 가짜 인생을 살았다. 너는 진짜 인생을 살았고…… 이제부터 나는 내 인생을 살 것이다. 그게 공평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6. 에세이집 「변호사가 웬 소설을……」

나는 몇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변호사를 천직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변호사라는 지루한 직업에 대해 어떤 소명의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밥벌이로서 직업에 불과했으니 소위 말하는 인권 변호사는 아니다.
― 변호사로서 지난 30여 년간은 진실과 허위, 법정에서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똑같은 말들의 반복 (그 닳고 닳은 말들 속에 언어의 간결함과 아름다움, 침묵의 언어, 언어의 정수인 은유는 없으니, 나는 관습적으로 ‘관대하게 처벌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변론하면서도 그 공허한 말을 경멸하고 증오했다.), 관료주의와 매너리즘, 자기기만, 궁상스럽고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자기연민과의 기나긴 싸움이고 패배의 시간이었다.
나는 사물과 현상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가차 없이 무위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지금 무능한 변호사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인가?
― 오직 지금/여기/우리를 증언하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과 열렬한 미학적 동기만 있을 뿐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미학적이며 도덕적이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마지막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완고한 울타리를 파괴하고 싶었고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모험을 감행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성일:2018-06-23 12:57:09 14.32.9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