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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중편선> 연쇄살인범?!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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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7-10-21 16:47:37
조회수
860
‘이혜순 정신과 의원’은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남동국가산업 1단지 건너편 연수고등학교 정문 근처 5층 건물의 3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전문의 자격을 딴 직후 공주 치료감호소의 일반정신과 소속 의사로 오랫동안 근무한 후 퇴직하여 이곳에다 병원을 개업한 지가 3년이 지났다.
어느 날 김일융이 병원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날은 오후가 되면서 음산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그대로 거두어 들였다. 그녀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표정이 뜨악했던 것이다.
김일융이 말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입니다. 저를 기억하시겠지요.”
“그렇지요. 오래된 일도 아닌데요. 감정서를 작성했고 그 후에는 주치의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그저, 지나가다가 들렸다고 해야겠지요. 여전히 옛날 그 향수를 쓰고 있네요. 장미꽃 향수 말이에요.”
“그래요?”
“여기에다 개업을 했단 말이지요.”
“무슨 뜻인데……”
“도대체 어울리지가 않지요. 치료감호소에서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나 약물 중독자, 살인을 저지르는 정신병자, 인육을 먹은 범인, 소아성애자, 여자의 속옷 절도범인 페티시스트, 스스로 해리성 정체장애라고 주장하는 놈, 지킬앤하이드증후군 환자, 사이코패스만 상대하다가 시시한 환자를 치료하는 건 재미없지 않겠어요?
그러면 나는 어디에 해당되는 걸까요?
그리고 ‘연쇄살인범과 실질적 동기가 결여된 살인 행위’ 또는 ‘살인에 대한 무의식적 동기 가설’을 열심히 연구한 전도한 유망한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나요?”
“그런 미친놈들이 지겨웠다고 해야겠지. 그런 지독한 놈들하고만 상대하다보니 내가 미쳐버릴 지경이었지.”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어야…….”
“대학은 얽히고 설킨 인맥이야. 내가 무슨 인맥이 있겠어.”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고. 마흔이 넘었는데. 혹시?”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은 하는 게 아니지요.”
“대략 짐작했을 텐데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제가 누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을 텐데요.”
“무슨 말씀인가요?”
“정신과 의사가 상상력을 발휘해 보지 그래요.
정신분석 요법이라는 게 곧 의사와 환자의 긴 대화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 대화가 치료의 시작이고 끝이었던 거죠. 쓸데없는 약은 필요 없었던 거지요. 이건 의사 선생님이 가르쳐 준 거예요. 그때 그렇게 말했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가 아닌가요?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계속 ‘그래서’ 했었잖습니까. 우리의 대화는 온 몸의 신경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공감이 넘쳐흘렀지요.”
“할 말이 있으면 빨리……. 우리는 의사와 환자 사이였던 거지. 주제넘게스리…… 그렇다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차분하게…… 어차피 환자도 별로 없는데 말이야.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병원이 어렵겠더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내 사정이에요. 그런데 돈이 필요한 건가? 아님 돈을 털려고…… 그런 찌질한 인간은 아니었는데. 이건 인간의 품위 문제이거든.”
“맞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인간은 품위가 있어야지요. 살인범이 되어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돈을 훔치고 빼앗을 만큼 야비한 인간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내가 치료감호의 종료를 신청했을 때 치료가 완료되었다는 의견서를 상세히 써 주었단 말이지요. 그게 어떻게 그렇게 작성된 것인가요? 제 말은…… 물론 그 덕분에 내가 자유의 몸이 되어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요.
정신과 의사는 분석가 입장에서 피분석자의 정신 상태를 분석해본 결과 정말 정상이라고 판단했던 것인가요? 뭘, 근거로?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그렇게 쉽게 분석할 수 있을까요? 어두운 파괴 본능을…… ㅎㅎㅎ…… 세상이 우스운 거야. 정말 가소로워…….
그런데 정신분석은 말이 분석이지 사실은 해석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 모델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는 거겠지. 아니면 날 불쌍히 여겨서 동정했기 때문에 분석인지 해석인지가 소용이 없었던가? 그렇다고? 그렇지 않나?”
“그렇게도 나가고 싶어서 안달을 하더니만…… 간절하게 소망했었지.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라구. 내가 보증을 서준 셈이라고.”
“날 도와주었다고. 내가 그 은혜를 몰라본단 말이지요. 내가 지금 당신한테 단단히 얽혀 있다는 뜻인가요?”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국립 법무병원인 공주치료감호소.
그를 태운 차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이나 달린 끝에 적막하게 서 있는 회색 건물 앞에 멈춰 섰었다.
공주에서 3년 동안 일어났던 일 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지나갔다. 빠르게 또는 천천히 지나가는 그때의 영상들은 참으로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칠흙 같이 짙은 어둠의 색깔이거나 아니면 5월의 찬란한 햇빛 같은 밝은 색깔. 흰색 검은색 회색 파란색 노란색 빨강색 등이 뒤섞여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춤을 추었다.
그 감호소에는 1,000여 명이 넘는 정신 질환자가 수용되어 있고 그 중에서 약 절반이 김일융처럼 조현병 환자였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감호소에 너무나 잘 적응하였다. 모든 규칙을 철저히 준수했으니 가히 모범적이라고 할 만 했다. 그리고 치료 경과 역시 좋았다. 놀랄 만큼 빠르게 좋아졌던 것이다. 그는 다른 환자들에게 헌신적이었고 천주교에 귀의하였으며 직업 교육으로 목공일을 열심히 배웠다.

“뭐가 잘못된 것인가요……?
나는 임상 경험이 아주 풍부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 500명 이상을 치료하고 감정도 했으니까. 특히 정신분열증 환자는…… 그러니까 계획 살인과 망상에 의한 살인을 분별하지 못 할 만큼은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모든 검사 결과가 완벽하게 정상으로 나왔단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 결과, 피의자신문조서에 나타난 범행 전후의 행동 분석, MRI 측정, 진단 검사, 심리 전문가의 표준 심리 검사 등 10단계를 모두 통과했단 말이지.
그러니까 당신은 완벽하게 정상이었다구요. 정상이란 말입니다. 책은 얼마나 많이 읽었고. 좋은 책들을 그렇게 많이 읽었으니 마음의 양식이 되었을 거라구. 아무리 봐도 범죄자로 되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그림을 열심히 그렸지. 여자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었지. 내게 선물한 그 초상화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어. 특히 어려운 수감자들에게 헌신적이었어요. 자신이 지급 받은 새 팬티와 런닝셔츠 등을 오줌을 심하게 지려서 지저분한 노인 수감자에게 입혀 주기도 했단 말이지…… 그래서 감동을 먹은 거라구.
그런데 하느님에게 귀의하지 않았던가요. 수녀님이 ‘그 사람은 지극히 정상이에요. 제가 보증할 수 있지요. 하느님이 정상으로 인도하신 겁니다. 그는 매일 기도하고 명상을 한 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라고 말했거든.”
“천주교 수녀님이 나를 인도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요. 그건 인정할 수밖에. 그래서 정말 신실한 신자처럼 행세했던 거지요. 그러나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있고, 진정으로 반성하면 구원받을 수는 있으나 구원을 받아도 죗값은 치러야 한다는 가톨릭의 교리를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하느님까지 속이다니.”
“하느님 좋아하시네. 그런 건 없다니까 그러네요. 당신도 철저한 무신론자 아니었던가요? 웬 하느님 타령. 그만 두자고요, 그만.”
“내가……?”
“감방에 있는 재소자들은 전부 자신이 독실한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는 거 몰라요? 그게 ‘감방증후군’이라고 하는 거죠. 거짓으로 선한 사람처럼 보여서 조기 석방을 노리는 수작이란 말입니다.
그들의 논리에도 무슨 근거는 있어요.
‘너희들 중에서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있으면 이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예수님이 말했다는 거 아닙니까. 이말 때문에 죄수들은 독실한 기독교도가 아니면서도 예수님에게 열광하는 거죠. 그때나 지금이나 죄 지은 자를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거죠.
그래서 죄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하지요. ‘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런 상황에서 나야말로 피해자였다고’, ‘재수가 더럽게 없어서’ 혹은 ‘그 순간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서’ 감방에 오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치사하고 자기 기만적인 그런 인간은 아니거든요. 그건 확실해요.”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인간들은 도대체 알 수 없다고…… 인간의 내면 세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니까. 그래서 어떤 인간의 정체성 역시 복잡하고 복합적이라고.
그런데 그것들은 인간에 대해 몰이해하니까…… 모두가 돌대가리고 엉터리인 거지.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 큰일이란 말이지요. 뭔가 잘못되었어.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뭐라고 하더라, 그렇지, 프로파일러 말이에요. 그것들이 심리학을 전공했고 경험이 무척 많다고 했지만 정말 엉터리였지요. 그것들이 나를 실토하도록 유도했지만 내가 역으로 이용했어요. 그건 어차피 치열한 두뇌 게임이었거든. 어리석은 자들은 유도신문을 하면 마침내 이것저것 털어놓는데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 덫에 넘어간 적이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수사기관에서도, 정신병원이나 법원에서도 그렇단 말입니다.
그들과 두뇌싸움에서 제가 완벽하게 승리를 거둔 거라고.
마지막 관문은 당신이었는데 그걸 무사히 넘긴 거지…… 지금 억울한가? 아님 자신이 한심한가? 자멸, 자폭, 자괴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차피 늦었으니까.”
“지금…… 무슨……?”
“그 여자와 일면식도 없었어. 그냥 여자가 싫고 죽이고 싶어서 그 골목을 왔다 갔다 하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였어. 경찰은 내가 사실을 말해도 자기들의 인식오류와 편견 때문에 믿지를 않는 거지. 그러니까 난 성폭행범은 아닌 거야.
나는 그런 개새끼들을 증오한다고. 그건 아니거든. 섹스는 약물 중독과 다름없어. 그저 약하고 못난 여자들이 죽도록 싫은 것뿐이야. 여성 전용 호스트바니 레즈비언 운운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단 말이지……”

그날 저녁 어스름한 골목길에서 주차된 차들 사이를 킁킁 냄새를 맡으며 어슬렁거리던 꼬리가 짧은 검은 큰 개가 으르렁거렸다. 그 순간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에 공포심을 느꼈고 그걸 잡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던 것이 기억난다.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는 것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고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으며 무릎이 저렸다.
그 여자는 그때 마취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위협을 가하자 순순히 옷을 벗었던 거지. 하지만 ‘여자의 벗은 몸은 참 따뜻하구나’ 정도의 느낌이 들었을 뿐이야. 여자의 목을 어루만지다 조를 때서야 쾌감을 느꼈던 거야. 강한 남성이 약한 여성을 살해하는 전형적인 쾌락 살인이었다고.
나는 평생 딱 한 번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다.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여자와 정서적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섹스는 슬픈 것이다. 그 뿐이다.
그때 이후 슬픈 일을 당했을 때도 위로를 받은 일이 없었고 기쁜 일이란 도대체 없었지만 기쁜 일이 있어도 나를 찾아와서 함께 기뻐할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으니 무리에 끼지 못했다.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는 헤어진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모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이란 과거로부터 불현듯 튀어나온다. 나에겐 어린 시절도, 청소년 시절도, 청년기도 없었다. 나의 인생은 영원히 멈춰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인생은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나에게는 희망과 기쁨과 행복과 사랑과 질투와 슬픔과 불행과 쓰라림과 가슴 아픈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불면증과 악몽, 공포 때문에…… 아버지가 꿈속에 계속 나타난다. 나는 굉장히 자기파괴적이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나는 다시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완벽을 기하려고 했는데 내가 여자의 털을 몇 올 남긴 것은 정말 큰 실수였어. 완전 범죄를 꿈꾸었거든. 그때 시체를 집 밖으로 옮기는 일은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그걸 미리 검토했어야 했다. 방수포에서 두 조각으로 자를 때도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아무리 조심해도 피가 튈 수밖에 없었다니까. 운반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니까. 나는 시체를 훼손할 만큼 잔인한 사람이 아니야. 아! 한 인생의 종말이!

“……그나저나 아마추어에 불과한 배심원들을 속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어요. 그게 말이지요, 법률지식도 없고 정신병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는 무지랭이들을 배심원으로 시켜놓고 검사와 변호사, 판사들이 요란 뻑쩍지근한 쇼를 벌이는 것에 불과해요.
내가 정신병자 행사를 하고 어머니란 여자가 마구 울고 하니까 다 넘어간 거지. 배심원 중에 중년의 여자들이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지요. 여자들은 눈물에 한 없이 약하거든. 그래서 나는 연기를 하기 위해서 억지로 눈물을 한 줄기 흘렸던 거고.
그러나 어머니란 여자를 증오했어요. 어머니는 무슨, 피도 한 방울 안 섞였는데. 나를 내팽개치고 도망을 간 거거든. 아버지란 자가 그 여자가 가버리고 나서 그제서야 친어머니가 아니라고 실토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증인으로 나온 정신과 의사는 얼빠진 인간이야. 내가 정신분열증에 관해 연구를 한 다음 교묘하게 연기를 한 거지.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가짜 보디랭귀지도 사용했지. 요즈음 보디랭귀지를 주제로 한 책들이 넘쳐나거든. 어떻게 의사가 연기와 실제를 구분하지 못 하는 거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겠지. 나야 말로 얼빠진 인간이니까.”
“우리 음악 얘기를 다시 해보는 게 어때요. 역시 명품 오디오 세트가 있군요.”
“음악은 불멸의 예술이라고 말했었던가. 음악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언제까지나 남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음악이 필요하다. 음악이야말로 인간이 말로써 말할 수 없는 것까지 뭐든지 말할 수 있다.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음악은 절대적으로 순수하다. 음악에서 위안을 얻으라고.”
“셰익스피어가,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그런 사람은 살인이나 반역과 같은 비열한 행동조차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자라고 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아시라고. 어떤 경우에도 음악은 별로라고.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다고. 그러니까 억지로 음악을 열심히 듣고 좋아하는 척 연기할 수밖에.”
“지금 보니까…… 연기에는 천재적이었구만…… 차라리 배우가 되지 그랬어.”
“ㅎㅎㅎ…… 내가 정신병 연기를 한 이유가 있었지. 가출한 후 부랑자로 떠돌면서 젊고 약한 여자만 보면 마구 때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다 피해자가 신고를 해서 경찰에 붙잡혔는데 내가 막 횡설수설을 했더니만 간이 정신감정을 하더라고. 근데 내가 누구야. 식은 죽 먹기였어. 그 후부터는 정신과 치료가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중에 빠져나오기 위해서 정신과에 들락날락한 거지.
또 한 가지 목적은 일류 병원 의사와 지적 두뇌 게임을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내가 완전히 승리한 거지. 그 얼빠진 의사가 법원에서 증언한 것을 들어 보라고. 나는 방도 정신병자의 방처럼 꾸며 놓았거든. 그리고 말이야. 검사나 판사, 변호사들도 얼빠진 인간들인 것은 의사와 마찬가지야. 모두 넘어갔거든. 그런 자식들이 그렇게 잘난 체 거들먹거리니……
이건 내가 상대하는 인간들과 벌이는 치열한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모두 승리한 거야. 승리자에게 영광을! 패배자들에게 죽음을!”
“승리 좋아하네. 사이코 주제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신도 그렇지 않나? 괴물과 싸우는 자는 자신 역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지. 모두 괴물들이었지.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면서도 언변이 매우 뛰어났지.”
“그렇게 이죽거릴 것까지는…… 자기 환자를 연민의 감정으로 대해야…… 어떻게 연쇄살인범인 프랑켄슈타인과 비교를……
우리는 아마 꽤 많이 농담을 했었지. 지독하게 술을 좋아했고. 술에 취하면 엉엉 울고 토하고. 유혹……”
“엉뚱한 소린 그만하라구. 그러니까…… 멀쩡한 사람을 죽였으니까 사형을 받아야 할 흉악범이 겨우 3년 만에 석방되었네. 그것도 병원에서 편히 지내다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괴물들에게도 양심의 가책이라든가 죄의식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한심하구먼. 여자는 별 수 없어. 그런 게 있으면 현대의 괴물이 될 수 없는 거지.”
“착한 괴물이 없다고? 내가 여자라고?”
“왜, 그런 허튼 소릴 지껄이지? 무슨 딜레마에 빠진 거겠지. 그걸 해결하려면 자기 살해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정신의학과 임상」이라는 정신의학 학회지에 내 경우를 모범적인 치료 사례로 발표까지 하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훌륭한 논문과 나의 석방이 교환된 거라고.
그러나 날 다시 잡아갈 수는 없어. 지금 경찰을 불러보시지 그래. 소용없다구. 뭐더라, 일사부재리 때문에…… 하여간에 두 번 처벌하지 못 하도록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당신도 공범이 아닌가? 빨리 석방되도록 결정적으로 도와주었으니까.”
“그만하세요, 그만…… 빨리 돌아가 주세요. 그 논문 때문에 치욕적인 결과가……?”
“ㅎㅎㅎ…… 내가 악인 또는 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까짓 여자 하나 죽였다고. 어떤 게 선인가? 이 세상에 선이 있기라도 하는 거야? 성경에 의하면 신이야말로 정말 잔인했거든. 신은 스스로 잔인한 폭력을 인정했던 거야.”
“악마도 성서를 인용한다고 하더니만…… 그러면 얼마나 더 죽여야 되는데…… 진짜 연쇄살인범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그래야만 악마가 되는 거야?”
“그래요, 진짜 용건은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뭘 말인가?”
“당신은 주치의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야.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정신 활동은 뇌의 신경세포의 작용에 불과한 것인가? 나 같은 게 어떻게 알겠어.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을 잘 알고 내 마음을 분석할 수 있지.
내 안에서 의식과 무의식은 분리되어 있고 분열되어 있는 건 확실하다고. 그것쯤은 스스로 알 수 있지. 거기에 나약한 선과 함께 어두운 악과 악마가 숨어 있는 거라고 보아야겠지. 그것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융합될 수 없는 거야.”
“엄청나게 연구를 많이 했네. 정신과 의사를 해도 되겠어. 그러니까 이중인격이나 다중인격 장애인 해리성 정체장애를 말하는 거야?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동물적인 야수성이 그 순간 폭발한 건가? 그렇다는 거야? 자신은 가해자이면서 한편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건 이쪽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이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기묘한 증상사례」에서 이미 나온 이야기이거든. 그러니까 흥분할 필요가 없는 거야.
본론으로 돌아가면…… 당신은 정신과 의사이면서도 나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악의 근원을 찾아내지 못한 거라고. 당신은 나한테 속삭였지. 내게 비밀을 모두 털어 놓으라고. 그러면 홀가분해지고 해방감을 느낀다고 했지……
그리고 자신의 그런 과거에 대해 얼핏 암시를 주었거든. 이복동생과의 관계를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요? 왜 그랬을까? 지금도 악몽 속에서 동생의 울음소리를 듣는 거야?”
“그렇다면……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내가 형편없는 의사란 걸 인정해야겠지. 그렇다고 치자고. 잔인한 인간의 그 사악하고 심오한 무의식의 세계를 어떻게 탐지할 수 있었겠어……
내 동생은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백혈병으로 죽었어. 그때 동생은 자신이 죽어가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몇 달 동안 나는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었지…… 계모는 날 지독히 미워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하나밖에 없는 그 동생을 무척 사랑했었거든……”
“그래서인가…… 누님인 것처럼 또는 수호천사인 것처럼 행세한 거야. 하느님인가 신부님인가 행세를 했지. 고해성사를 하라고 다그쳤다고. 그리고 나는 속아준 거고.
당신은 편견과 편향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는 새 속아 넘어간 거란 말이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을 인정하라고. 인정을…… 냉철하게 판단하지 못 한 거야.
그 사건과 나를 객관화시켜 분석하지 못하고 사디스트인지 사이코패스인지 지독한 여성 혐오자인지…… 나에게 동화되어 버렸거든. 대화요법을 통해서 감정적 교류가 있었단 말이지. ‘양들의 침묵’에서 FBI의 임시요원이었던 스탈링이 전직 정신과 의사였던 연쇄살인범 렉터 박사의 심리전에 말려들은 것처럼 말이야.
가령 당신이 그렇게 원해도 당신과 사랑할 수는 없어. 요즈음 유행하는 뇌섹남이거나 요섹남은 아니거든. 솔직히 고백하자면 스스로 판단해 보건데 무성애자이거나 동성애자인지 모르겠어.
나는 가끔 당신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한다고. 내가 만약 연쇄살인범이 되기라도…… 그러면 그게 누구 탓일까. 당신은 어리석게도 나를 석방시켰어.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올까?
그곳이 한없이 그립다고. 감옥의 창살에 비치는 밤하늘의 별, 금강의 강물이 떠내려가는 소리, 국사봉의 흙냄새가 그립단 말이지. 난 그곳에서 육중한 철문이 여닫는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갇혀있어야만 했어. 결국 그곳에서 스스로 죽어야 했는데 말이야.”
“…………………………”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서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김일융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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