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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에세이> 작가의 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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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7-08-18 14:56:47
조회수
862
작가의 말 (5)



1. 삼각관계

나에게 어떤 형태의 글이든 글쓰기는 숙명처럼 느껴진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유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초조하고 불안하고 고독한 작업이다. 글을 잘 쓰려면 이를 극복해야 되지만. 나는 지금 소위 말하는 작가의 벽에 가로막혀 있다.
글에 대한 간절함으로 심리적, 육체적 리듬을 잃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미 발표하였던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수정하고 또 수정한다. 어떤 경우 수십 번씩이나 수정한다. 유채화에서 덧칠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모든 글에서 수정 보완하는 과정이야 말로 글쓰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수정하면 글은 확실히 좋아진다.
윌리엄 포크너는, “내 생각에는 만약 내가 나의 모든 작품을 다시 쓸 수 있다면 분명 더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 확신이야말로 예술가에게는 가장 유익한 조건이다.”라고 말했다.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 (74세)는 100권에 달하는 장편소설, 단편소설집, 산문집 등을 출간하였는데 지금부터 기왕에 발표한 작품을 다시 고쳐 쓴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보다 더 잘 쓸 수 있기 때문이란다. 매일 글쓰기를 훈련하는데 어제보다 오늘의 문장이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루야마 겐지는 자신의 전작품을 다시 고쳐 쓰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작품이란 유동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폴 세잔은 ‘그림은 절대로 완성되지 않으며 어느 순간 그리기를 멈출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좋은 작품일수록 스테레오 타입의 고정된 또는 한정된 의미에 갇히는 것보다는 유동적이고 역동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문학 작품의 해석과 재해석, 재생의 과정에서 가변적이라는 관점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벌써 몇천 년 전에 유대인들이 모세 율법을 연구할 때부터 시작하여 시대의 변천에 따라 해석은 널리 유동하였던 것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내가 뭔가를 읽을 때마다 내가 읽은 그것은 얼마간 바뀐답니다. 내가 뭔가를 쓰면 그것은 각 독자들에 의해 매번 바뀌지요. 모든 새로운 경험은 책을 풍요롭게 해요. 여러분들도 그걸 알 거예요. 나는 지금 성경을 생각하고 있는데,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그게 얼마나 풍요로워졌는지 여러분도 알 수 있을 거예요. 햄릿은 그를 창조한 셰익스피어가 생각했던 것보다 콜리지 이후에 훨씬 더 풍요로운 인물이 되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지 않은가.
작가는 살아 생전에 시대가 변하고 가치관이 전도하면서, 인생 경험의 축적에 의해 인생관이 변하면서, 미학적 관점에 따라 주제가 변주하면서 기존 작품의 제목까지 바꾸고 또한 내용을 수정, 변경, 증보, 삭제를 한다. 프랑스의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은 처음에는 무릎을 꿇은 남자와 그에게 쓰러지듯 기대며 몸을 맡긴 여자를 조각한 ‘샤쿤탈라’라는 제목의 석고상을 만들었지만, 카미유는 같은 조각을 대리석으로 만들면서 제목을 ‘베르툼누스 포모나’로 바꿨고, 마침내 이 조각 작품을 청동으로 주조하였을 때는 다시 제목을 ‘버리고 떠나가라’로 바꿨다. 주제를 변용하면서 그에 따라 제목까지 바꾼 것이다.
그러면 독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오직 작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작품이 공적으로 발표되는 순간 객관적 상관물이 된다. 롤랑 바르트가 (독자의 탄생)과 작가의 죽음 La meat de lˊauteur 을 선언했던 것처럼 독자가 왜 작품의 의미와 관련해서 작가의 원래 의도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가.
신 비평가들은 문학의 지고한 가치란 독자들이 작가의 영혼에 내밀하게 접근하게 해 주는데 있다고 하는 주장을 부정했다. 그들은 작가의 의도를 당해 예술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는데 유일한 척도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여기에서부터 해체주의와 독자 수용 이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독자는 더 이상 텍스트의 내용과 의미의 수동적인 수신인이 아니라 작품을 자기 나름대로 해체해서 해독하고 의미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독자는 이제부터 능동적으로 텍스트의 새로운 의미 형성에 참여하게 된다. 볼프강 이저의 독서 이론에서처럼 독자는 텍스트의 일부인 서사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
결국 독자는 작가와 더불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런데 독자들은 제각기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재창조할 뿐만 아니라 같은 독자의 경우에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시대적, 공간적, 문화적, 개인적 등등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해석과 재해석이 유동적이 되면서 작품에 대한 태도가 변화할 수 있다. 소설의 경우 자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기도 하고 각색을 거쳐서 연극, 영화나 TV 드라마로, 만화로, 뮤지컬이나 오페라 등 새로운 버전으로 전환한다.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 시대에 컴퓨터 게임, 소셜웹, 가상현실 게임, 테마파크 같은 엔터테인먼트 분야로의 전환은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그 과정에서 각색자는 원천 작품을 재해석하여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키고 캐릭터를 다른 관점에서 정체성을 변형하고 플롯을 변경해서 디테일을 생략하고 주제를 변주하면서 개작하고 재조합한다. 그래서 그들 각각의 버전은 상호 텍스트가 된다.
그렇다면 각색에는 어떤 한계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각색이 얼마만큼 원본에 충성해야 하는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아무리 각색을 해도 ‘변화를 해봤자 더욱더 똑같을 뿐이다’라는 프랑스 속담에 해당되는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각색이 도를 지나쳐서 원본의 본질적 특징이나 가치를 왜곡 훼손한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이건 패러디나 오마주가 아니라면 위조나 변조에 해당할 것이다. 더욱이 은밀하게 포장을 바꾼 경우라면 표절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여기서 각색이란 무엇인지 다시 검토해보자. 각색자는 우선 독자이어서 그 이야기를 자신의 가치관과 관점에 따라 독창적으로 해석하고 그러고 나서 재구성한다. 각색은 해석을 하는 행위이자 재창조를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다시 읽기이고 다시 말하기이다. 각색은 수확된 것이 다시 파종되어 수확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이야기에는 옹기 그릇에 도공의 손자국이 남아있듯이 이야기꾼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 각색자는 창작자가 되어 그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고정된 텍스트는 없다. 항상 유동적이다. 이야기는 숙명처럼 끊임없이 조금씩 일탈하면서 또는 증보되면서 반복된다. 나의 경우 대개 수정이란 글을 증보하는 것이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소설에 대한 탐욕과 순전히 미학적 욕망에 의해 ‘달빛 죽이기’, ‘티베트 기행’, ‘인간의 초상’, ‘첫사랑 애인’, ‘제 2인자’, ‘우리들의 시간’, ‘삼각관계’ 등등을 (거의 망가뜨릴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만큼) 수정 보완하였다.
나는 미심쩍은 일부를 삭제하려고 마음먹으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두려움을 느낀다. 항상 망설이면서 끝내 실행하지 못한다. 아직 글쓰기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삼각관계’의 경우, 내가 법조계 사정은 알 만큼은 알고 있으니까 그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지금 / 여기 / 우리의 이야기를 쓴다고 또는 써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작가의 치열한 현실 비판이나 사회 참여, 저항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물을 드러내지도 않고, 행동을 이끌어내지도 않는다면 이야기에 넣지 마라 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낯선 법률 용어를 만나면 질색을 할 것이고, 그래서 무리인 줄 알지만 그저 지나가는 잡담처럼 이야기할 수는 없어서 법원과 검찰, 변호사 간 삼각관계에 대해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지루하게 서술하였다. 몇 번이나 여러 군데를 지우려고 망설였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는 법정에서 오만가지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여러 가지 생각이 잇따라서 빠르게 떠올랐다 사라진다. 조현병 환자처럼 연상작용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서 의식은 일정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분열한다. 우리는 허점 투성이 인간들이고 언제든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위선자들이다.
이 소설에는 네 개의 삼각관계가 들어있다. 물론 정삼각형의 삼각관계는 아니다. 재판은 틀림없이 삼각관계이다. 민사소송은 원, 피고와 판사 간, 형사소송은 검사와 피고인, 판사 간 삼각관계이다. 사기 사건에서는 사기범과 피해자, 중간에서 그들을 연결시켜주는 중개인이 있다. 중개인은 결국 피해자와 원수지간이 되고 사기범과는 이익의 분배를 둘러싸고 또는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심각하게 대립한다. 가장 흔한 삼각관계는 한 남자를 둘러싸고 두 여자 간, 또는 한 여자를 둘러싸고 두 남자 간에 벌어진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세계에도 삼각관계는 존재한다.
이미 증명된 것이지만 남녀관계의 삼각관계는 언제나 비극적으로 결말을 맺는다. 상실과 고통. 증오. 신들의 삼각관계는 그들이 신이니까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하지만 범죄 현장에서 삼각관계는 항상 배신과 복수가 도사리고 있다.
이 작품은 어떤 신문에 게재하려고 하였는데 매수 제한이 있었다. 스토리의 흐름상 중편 이상의 분량이었는데 단편으로 쓰려다 보니까 서사가 충분히 나아가지를 못했다. 그 상태에서 신문에 게재되지도 못하고 단편집에 실렸지만 그건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중편 분량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에 처음 올린 이후에도 무려 8번이나 대폭 수정하였다.
내가 아무리 수정을 했어도 그런 심오한 삼각관계를 소설로 제대로 형상화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 실패하지 않았을까.
이 짧은 소설은 삼각관계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인물들의 내면의 모순, 죄책감, 정신적 부채 의식, 내적 갈등을 세밀하게 형상화해서 초점을 맞추는 데는 실패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분명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소설의 문제는, 그럴듯해야 한다 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 작위적이지 않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가? 스토리 또는 플롯에 있어서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개연성이나 필연성, 핍진성을 제대로 살렸다고 볼 수 있는가?

2. 우리들의 시간

인터넷은 참으로 편리하다. 언제든지 올릴 수 있고 내릴 수도 있다. 몇 번이고 수정할 수도 있다. 독자들은 공짜로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읽기 싫으면 그만이고.
우리들의 시간은 인터넷 공간에서 그 조회수가 이미 만 번을 넘은 것 같다. (물론 독자들이 조회했다고 해서 완독한 것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 베스트셀러의 경우에도 책만 사놓고 읽지 않는 것이 태반이지 않은가.) 왜 독자들이 이 작품에 그렇게 특별히 주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청소년 시절 한때 축구에 심취했었다. 하지만 이걸 쓰기 위해서 참고자료로 축구에 관한 두꺼운 책들을 10권 넘게 읽어야 했다.
축구의 역사는 언제나 선수와 감독, 팬들에 의해 수레바퀴가 굴러간다. 그들은 동업자로서 의기투합하지만 동시에 갈등과 대립이 늘 일어난다. 축구에는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승리와 패배가 있다. 승리만을 보장하는 절대적인 전술은 없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고 해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플레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은 유럽의 빅 클럽이 세계 축구의 주류가 되었고 축구의 철학이 아니라 기업의 상업주의에 의해 선수를 사고 팔고, 임대하면서 성적과 우승 트로피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그들은 오직 돈 되는 축구만을 지향한다. 우리는 당연한 듯 맹렬하게 맞붙어 대결하는 클럽 축구를 받아들이고 열광한다. 그러므로 축구의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축구 경기에서 느끼는 즐거움, 아름다움, 리듬감, 단순함의 미학이 사라져버렸다.
글쎄…… 몇 년 전쯤이던가? 나는 그 해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승부조작 사건을 맡아 마산까지 재판을 하러 한 달 간격으로 무려 10번이나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는 축구선수로서는 한창 절정의 나이였고 전도 유망했다. 양발잡이에다 민첩하게 움직였고 볼 다루는 기술도 뛰어났다. 그는 순진했지만 어리석었다. 그는 돈을 받은 일도 없고 다만 의리 때문에 동료들 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시합에서는 앞선 경기에서의 햄스트링 부상 때문에 뛰지도 않았다.
그날, 화창한 가을날이었지만 그 찬란한 가을 햇살도 우중충한 법정의 벽을 뚫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판사의 검은 혓바닥이 어린 축구 선수의 삶의 생명줄을 끊어놓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남쪽 먼 바다에서부터 들려오는 애처로운 흐느낌을 들었다.
법은 냉정한 게 아니라 아주 비겁했고 잔인했다.
오직 축구밖에 몰랐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 어두운 정신적으로 아직 미성숙한 선수들. 그들에게 집요하게 접근해서 유혹했던 파렴치한 어른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젊은 날의 삶과 꿈을 송두리째 허공 속으로 날려버렸다. 그들은 삶이 고통이라는 걸, 삶이 공포라는 걸 너무 일찍부터 깨닫게 되었을까. 그들을 어리석다고 탓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프로 스포츠 세계의 승부조작과 불법 스포츠 도박의 함정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 법은 피도 눈물도 없이 냉엄하고 잔인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 한때 축구를 사랑했던 나의 축구 철학을 펼쳐 보이는 것, 작가의 주제의식이 너무 드러나지 않도록 숨겨놓는 것, 인과관계의 연쇄를 바탕으로 개연성, 필연성, 핍진성이 드러나도록 치밀하고 정교하게 쓰는 것, 이게 내가 추구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이다.
이 작품의 경우 소위 시점을 (명시적 서술자에 의한) 1인칭 시점과 (익명의 서술자에 의한) 전지적 3인칭 시점을 의식적으로 혼용하였다.오늘날 서사학에서는 작가와 화자를 엄밀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서사에 있어서 화자 the teller of story, 즉 이야기꾼은 작가가 내세우긴 하지만 전혀 별개의 존재인 것이다.
어쨌거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천재적인 이야기꾼은 뭐니뭐니해도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 scheherazade 일 것이다.
우리 작가들이 관습적으로 알기로는 시점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나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또는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에 살면서 그런 완고한 고정관념을 믿지 않는다. 왜 화자가 2명이나 그 이상이면 안 되는가? 왜 작가가 대리인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직접 나서서 이야기하면 안 되는가? 우리들은 만나면 중구난방으로 대화를 하지 않는가.
작가의 작품에 대한 통제력이 유지되고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면 꼭 그럴 필요가 있어야 할까?

3. 탄원서

오늘날 구치소에 있는 미결수들 사이에서는 탄원서 혹은 반성문을 쓰는 게 주요 일과처럼 보인다. 특정한 양식이 없으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진술서, 진정서라고 하기도 한다. 이 경우 반성문은 피고인 본인이 작성하지만 탄원서나 진정서 등은 피고인 본인이 작성하기도 하고 본인 이외의 제3자나 기관이 작성 제출하기도 한다.
극악무도한 살인범, 연쇄살인범도 탄원서 혹은 반성문을 쓴다. 그것도 수십 차례씩 반복해서 쓴다. 그건 어떻게 해서든지 형을 감경받으려는 노심초사에서 나온 것이다. 거기에 진짜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필요한 깊은 반성, 회한, 진실성 등이 담겨있을까. 판사들이 바보가 아닌 바에 그런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 반성문을 읽고 감동을 받을 리가 없다. 내 경험에 의하면 진정이나 탄원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판사가 끝까지 읽어보기는 할까?
전술한 것처럼, 구치소에 있는 미결수들은 재판 도중 또는 결심 공판이 끝난 후에도 선고 전이면 자신의 형을 조금이라도 감경 받기 위하여 자주 탄원서 또는 반성문을 법원에 제출한다.
이것은 변호사가 법률적 관점에서 써서 제출하는 변론 요지서 등과는 상호 보완적이긴 하지만 전혀 별개이다.
‘탄원서’의 경우 피고인 김정진 (서울동부지방법원 2017년고합1650 폭행치사 사건)은 엉뚱하게도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는 드물게 보는 양심적인 인물인가? 나이가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녀석인가? 엉뚱한 녀석인가? 혹은 어리석은 것인가? 내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살인의 경우 미필적 고의란 자신의 행위가 살인에 이를지 모른다는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행위를 밀어붙일 때, 그때 고의를 말한다. 그래서 미필적 고의를 조건부 고의 (Bedingter Vorsatz) 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미필적 고의는 인식 있는 과실과 구별이 문제되고, 한편 확정적 고의보다는 고의의 정도가 약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형법에서는 미필적 고의와 확정적 고의를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죄의 정상을 참작할 때 고려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 형법 제250조 (살인, 존속살해)는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형법 제260조는 폭행에 대해서 사람의 신체에 대하여 폭행을 가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5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류에 처한다. 폭행의 경우 그 행위 형태가 다양하므로 처벌 규정도 다양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폭행이 결과적으로 살인에 이르게 될 때 (다시 말하면 살인의 고의는 없이 오직 폭행의 고의만 있을 때를 말한다) 에는 제262조 (폭행치사상)에 의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살인죄와 폭행치사는 죄질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따라서 처벌 규정도 폭행치사가 훨씬 가벼운 것이다.
요즘은 여성들이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법조계에도 많이 진출해있으므로 여성 검사와 여성 판사, 여성 변호사는 아주 흔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30% 정도를 넘어섰지만 조만간 50%에 이를 전망이다.)
작성일:2017-08-18 14:56:47 14.32.9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