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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여장 남자 (수정)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10-28 11:56:32
조회수
61
여장 남자




여성이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는 것은
단순히 자기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남에게 어떻게 보여질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홍대 거리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연극반 동아리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분장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비열한 거리의 악당 패거리 역을 연기하기 위해 가짜 콧수염과 속눈썹을 붙인 다음 멍 자국, 상처 자국, 문신을 그렸다. 당시 그는 그 분장이 너무 멋있게 보여서 그 모습으로 계속 다니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서초동 남부터미널 역 부근에 있는 원룸의 대형 거울 앞에서 막 분장을 마친 그의 얼굴은 완전한 여자 얼굴이었다. 두 손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얼굴 위에서 움직인다.
눈썹, 눈꼬리, 입, 작은 턱, 둥그스름한 턱선이 메이크업 베이스, 파우더, 아이라이너, 립스틱, 눈썹 펜슬을 거치며 다른 모습이 되었다. 화장을 진하게 하기 위해 검정색 아이라이너 펜슬을 집어서 눈꼬리에 대고 사선으로 그린 다음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 이 선을 길게 펴서 끝을 날카롭게 만든다.
아이라인을 그리고 아이섀도우를 바르려 할 땐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반투명한 파우더를 퍼프에 묻히고 얼굴에 톡톡 두드린다. 그런 다음 크게 심호흡을 하였고 퍼프를 훅 하고 불었다. 파우더 가루가 얼굴을 자욱하게 에워싼 뒤 이내 흰 피부에 사뿐히 내려 앉는다. 보송보송한 파우더가 메이크업베이스의 번들거리는 유분기를 잡아준다.
그가 괜히 멋쩍어서 키득키득 웃는다.
얼굴에 있는 점들은 메이크업 베이스와 파우더로 가린다. 마릴린 먼로처럼 윗입술 오른쪽에 한 곳을 정한다. 이곳에 미인점을 그려 넣는다. 그는 펜슬로 그곳을 진하게 칠한다.
립스틱을 집어 동그랗게 입을 오므린다. 립스틱 끝이 반짝거리며 드러날 때마다 짜릿한 흥분을 느낀다. 펄이 들어간 분홍색 색상을 한 번 바른 다음 다시 덧바른다. 그렇게 하면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입술을 서로 부딪치고 누르고 비틀면 아직 립스틱이 발라지지 않은 곳에 색깔이 펴지는 걸 느낀다.
그의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자신의 본 나이보다 두세 살 어려 보이는 20대 초반의 새로운 여자 얼굴로 만들어졌다. 그는 이 얼굴에 벌써부터 적응하고 있었다. 어쩐지 이런 얼굴을 만드는 법을 예전부터, 그러니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여자의 화장에 매료되었다.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고 나면 얼굴에는 몰라보게 변화가 일어났다. 그때 어머니 몰래 처음으로 분을 바르고 립스틱을 바르던 때가 기억난다. 일고여덟 살 때였다.
화장의 마지막 순서는 가발을 쓰는 것이다. 가발을 잡아당긴 다음 이리저리 비틀어 제 위치에 고정시킨다. 그리고 무릎이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색이 옅은 가을 재킷을 입고 모조 칵테일 반지를 꼈다. 다시 한번 머리를 매만지고 자기 몸을 가슴께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쓸어내린다. 짜릿한 감각 때문에 몸을 부르르 떤다. 그래도 미심쩍어서 그는 거울을 바라다보며 고칠 데가 없는지 신중하게 살펴본다. 완벽하다. 그는 눈을 크게 뜬다.
오늘이 그날이다.
벌써 준비를 마쳤다. 외출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잔뜩 부풀어 올라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그날 밤 그는 이 아름다움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란다. 이렇게 예쁜 모습이라니. 그는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젊고 멋진 남자가 접근해온다면 어쩌지……? 마지막으로 블러셔로 광대뼈에 하이라이트를 주고 나서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었다. 그는 감각적인 신발을 신으려고 했지만…… 여장은 이번이 처음이다. 화장을 하고 가발을 고정시키고 나니까 그냥 아가씨가 아니라 동양적인 여자로 변했다.
여자는 뭔가 다른 존재라는 확실한 느낌이 든다. 그는 어떤 종류의 여자일까? 여자는 마른 여성과 살찐 여성이, 어두운 피부를 가진 여성과 흰 피부를 가진 여성이 있고, 키가 큰 여성도 아주 작은 여성도 있다. 너무 못생겼거나 아름답지만 멍청하거나, 지적인 듯하면서도 못생겼거나, 어떤 여성은 옛날 스타일을 고수하고 어떤 여성은 보다 대담하고 화려한 현대적인 스타일을 선호하며, 어깨와 가슴 부분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가슴이 패인 옷을 입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엉덩이를 강조하기 위해 꽉 끼는 옷을 입는 여성도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다양한 체형과 취향을 가진 아름답거나 못생긴 여성들로 가득하다.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어깨 너머로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넘긴다. 누나가 그렇게 하는 걸 가끔 본 적이 있다. 이렇게 하고 나니 전보다 누나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이런 행동이 어떤 느낌이고 왜 자꾸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건 자신이 아름다운 여성임을 강조해서 남자를 유혹할 때 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그는 이윽고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한껏 우쭐거리며 홍대 로데오 거리를 계속 걷는다. 젊음과 욕망이 넘실거리는 거리. 젊은 여성들이 은근슬쩍 좌우를 흘끔거리며 걸어간다. 잘 빠진 허벅지 사이로 거리의 불빛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간결하면서 깔끔한 리듬이 흐르고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엉덩이가 규칙적으로 씰룩거린다. 밤의 어둠 속에서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방금 전에 바른 매니큐어는 불꽃처럼 반짝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중학생이었을 때, 반 친구들은 그의 목소리가 가늘어서 여자 같다고, 그가 여자아이처럼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걷는다고 놀려댔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목에 두른 플라넬 스카프가 가볍게 나풀거리고 가발은 어깨 부근에서 부드럽게 넘실거린다. 그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작은 일에도 깜짝 놀라는 어린 처녀들의 순진한 몸짓을 흉내 내며 한껏 뽐내며 걷는다.
그는 길을 걸어가면서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가는 이성애자 연인을 지나쳤다. 그는 걸어가면서 지나가는 남자들이 흘깃 쳐다보면서 그를 여자처럼 여기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날 밤 그가 진짜 여자로 보였다는 사실에 그는 마음이 뿌듯했다. 내가 진짜 여자인 줄 알던 남자들이 그립다.
무엇보다 그날 밤 처음으로 사람들이 그의 변한 얼굴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그는 약간 충격을 받았고 심지어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그 순진한 남자에게 몸을 기울여 입술을 스치듯 가볍게 작별 키스를 했다. 그 남자가 말했다.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가 말했다. “글쎄요…… 아니에요. 나는 내가 두렵고 당신도 두려워요.”
그는 어렸을 때부터 약간 여성적인 면모가 엿보이긴 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그의 머리카락을 계집애처럼 길러주었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가늘어서인지 여자아이로 자주 오해를 받았었다. 그는 그 시절 여자 아이들과 노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틀림없이 남자였고 이성애자였다. 그는 깊은 관계에까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여자들과 몇 번 데이트를 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남자를 좋아해서 강렬한 사랑에 빠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의 성 정체성이 혼란스럽게 변한다면……? 다시 말하면 지금은 이성애자이지만 ─ 동성애에 호감을 느끼는 이성애자인 바이큐어리어스 (bicurious)이지만 ─ 트랜스 젠더가 되거나,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제3의 성을 지닌 젠더 퀴어가 된다거나,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로 변한다면.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여자 역할을 하는 퀸이 될 수 있을까? 그날 밤 그는 이왕이면 여장을 하고 그걸 시험하고 싶었다. 자신이 여장을 했을 때 남성의 시선을 끌 수 있는지가 오랫동안 아주 궁금했었다.

김영신 정신과 의원
어느덧 가을이었다.
젊은 환자 (노은선, 28세)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리석 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그가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늦가을의 여린 햇살이 커튼 틈새로 스며들었다.
그는 넥타이를 매지 않았지만 검은 정장 차림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어서 단정한 모습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의사가 말했다. “어서오세요.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눠야 해요. 그러니까 긴장하지 마세요.”
그 젊은 환자가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비밀을 지켜주실 수 있나요? 누가 알면 안 될 거 같습니다. 특히 회사가 알면……”
“그런 건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직업윤리라는 것이 있어서 비밀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도…… 불안하거든요.”
“예외가 있기는 합니다. 환자 자신의 정신 상태가 혼미하거나 판단력이 현저히 부족해서 반드시 가족의 도움이 필요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는 가족과 함께 하지요. 가끔 있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긴 합니다만…… 법적인 문제가 있어서 제가 증인으로 법정에 선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숨김없이 말해야겠지요.”
“제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왕지사…… 큰 결심을 하고 병원에 왔는데 솔직하게 모든 걸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치료가 가능하겠지요.”
“……”
“회사에 입사한 지는?”
“우리 회사는 누구나 아는 대기업입니다. 입사한 지 3년이 넘었구요. 지금은 제품 개발팀에…… 저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지금 현재 느끼고 있는 증상을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우울증을 심하게 앓은 적은 없어요. 제가 아직 젊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아는 집안 아저씨처럼 그걸 겪은 적은 없어요.
그분은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결국 정신과에 다니면서 항우울증 치료까지 받았어요. 요즈음 그냥 조금 울적할 뿐이에요. 그뿐이에요. 하지만 몇 주가 지나도 다시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요.
회사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매사에 의욕이 없어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 당해서 상처를 입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아요.”
“그렇게 울적해지는 원인을 스스로 찾았나요?
젊은 우울증은 감정 기복이 심한 게 특징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투나 표정에 예민하고 마음의 상처도 잘 생기지요.”
“제가 회사 일로 힘드니까 그게 원인이 아닐까요.
우리 팀장은 가끔 엄청나게 압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회사 생활은 어려움이 많아요.”
“불면증이 있는가요?”
“네. 그렇죠. 불면증과 함께 자주 악몽에 시달리고……”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스트레스의 종류가 다르다는 겁니다.
우선 말이죠? 언제부터인가요? 또는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가요? 그렇다면 실마리가 풀릴 수 있겠는데요.”
“한 달 전쯤인가? 밤에 홍대 거리에 간 적이 있습니다.”
“홍대 거리에서 소위 말하는 헌팅을 한 거 아닌가요? 그게 상대방 여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례하게 말을 걸면서…… 핸드폰 번호를 묻거나 심지어 성희롱까지 한다고 하던데요.”
“아니죠. 전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날 밤 첫 번째 만난 사람은 젊은 애송이였어요. 너무 순진해보여서 그애에게 상처를 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가볍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를 만났습니다.
우린 자연스럽게 만났어요.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길을 걸을 때 그 여자가 저를 강렬한 시선으로 쳐다보았고 저는 웃음으로 반응을 보였지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먼저 제 손을 꽉 잡았어요. 그러고 나서 서교동 성당 쪽으로 들어가서 어둑한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 여자를 처음 만나고 나서 어떤 감정이 일어난 건가요?”
“그 여자는 아주 잘생겼어요. 생전 처음 보는 그런 따뜻한 여자였어요. 엷게 짓는 은밀한 미소가 정말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몸에서 풍기는 약간 연한 향수 냄새는 감미로웠어요. 비누 냄새인지도 모르겠지만……”
“여자가 여장남자에게 호의를 보였다면……? 그건 그쪽이 레즈비언 아닐까요? 홍대 쪽에는 레즈비언이건 게이이건 넘쳐나거든요.”
“아닙니다. 아니…… 그쪽에서는 제가 남자란 걸 인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어떻게요?”
“틀림없다니까요. 제가 아무리 분장을 해도…… 숨길 수는…… 없을 겁니다.”
“아무리 네온사인이 번쩍여도 그때는 밤 아니었습니까.”
“여자는 본능적으로 알았을 겁니다. 남자의 냄새는 다르니까요.”
“그럴까요?”
”그런데…… 모르겠어요. 말로는 표현이 잘 안됩니다. 뭔가 강렬하게 느껴진 거 같아요.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던 거 같아요.
어떻게 된 건지 확신이 들지는 않지만요. 무척 혼란스러워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사랑했던 거군요?”
“그럴지도 몰라요. 여태 여자를 사랑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제가 먼저 손을 내민 게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에서 저를 죽도록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다시 말하면 여자 쪽에서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그럴 겁니다.”
“무슨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요. 틀림없습니다. 그런 확신이 듭니다.”
“그 여잘 만나서 어떻게 할 작정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 여자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말은 필요 없어요. 그냥 보고 싶어요.”
그는 그녀의 얼굴에 반해버렸다. 난생처음 보는 비정상적으로 아름다운 여자 얼굴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놀라운 뭔가를, 정확히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숨이 턱 막힐 만큼 뭔가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둘만이 느낄 수 있는 애틋한 감정이었다.
그녀가 그를 원하는 만큼 그도 당연히 그녀를 원한다고 느꼈다. 그건 도저히 의심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확실했다.
사랑에 그렇게 깊이, 그렇게 한순간에 빠져드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동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일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두 사람은 그날 처음 우연히 만났으니까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만나는 순간부터 첫눈에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고 말하기는 한다.
의사가 말했다. “그때 그 여자와 약속은 하지 않았나요? 연락처를 서로 교환한다든가? 다시 만나기로…….”
“그때 입이 얼어붙어서 자세한 이야기는 못했어요.
얼핏 자기는 홍대 거리에서 경험 삼아 알바를 한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날은 쉬는 날이라고…….”
“그래서요……?”
“제가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밤 거길 갔었는데…… 하지만 겨우 들어간 좋은 회사를 그만둘 순 없었어요.”
“그렇게까지…….”
“제가 그랬어요. 주말마다 거길 가서 밤낮으로 알바가 필요한 편의점, 음식점, 카페, 술집, 옷가게, 화장품 가게, 클럽 등 안 들어가 본 데가 없어요. 심지어 난생처음 클럽 무대에까지 올라가서…….”
“무대에 가서 뭘 했죠?”
“밤 무대는 어두워요. 네온 사인이 번쩍이고 음악은 시끄럽고 너무 빠르죠. 그래도 축축한 열기로 가득 차 있죠. 모두들 땀에 젖어서 뒤엉켜 흔들어요. 그러니까 여자들은 구두 굽으로 플로워를 울리면서 엉덩이를 굉장히 빠르게 흔들어요.
남녀가 어울리고 여자들끼리 어울리고…… 그들은 껴안고 키스를 하고 몸을 밀착시켜서 비비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거기에 있나 찾아본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클레랑보 증후군 같군요. 약을 처방해 드리는데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는 거죠. 그저 눈 딱 감고 잊어버리는 거죠. 시간이 가면 가능할 겁니다.”
“어떻게……? 눈 딱 감고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요? 선생님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약물이 효과가 없다면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제가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그날 병원에 가기 위하여 회사를 조퇴했다. 그날 오후 내내 다섯 시간을 미리 예약한 것이다. 진료가 끝나고 병원 문을 나설 무렵에는 어느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스산한 바람이 불면서 금방 비가 내릴 듯했다. 어두운 하늘에 갑작스럽게 천둥 번개가 치면서 밝은 빛이 스쳤고 그리고 다시 어둠이 덮쳤고 멀리서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가 들렸다.

망상장애의 일종인 성적 양가감정으로 설명되는 클레랑보 증후군 (De Clérambault's Syndrome)은 치료가 매우 어렵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망상의 한 종류이다. 색정광, 색정증, Erotomania.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찍었다고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속된말로 도끼병이라고도 한다.
이 병은 약을 먹어도 예후가 좋지 않고 대부분 만성으로 발전한다. 정신과 책에는 약물 치료와 함께 상대에게서 강제로 떼어놓는 방법을 병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이라고 되어 있다.
그는 5개월 동안 피모지드를 복용했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고 변함없이 그녀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그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밤마다 로데오 거리를 지칠 때까지 몇 시간씩이나 걸었다. 그녀를 다시 만날,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염원을 안고서……
작성일:2023-10-28 11:56:32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