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티베트 기행(수정)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09-11 14:00:57
조회수
101
티베트 기행


위대한 정신은 독수리와 같다.
높다란 고독 속에 둥지를 튼다.
― 쇼펜하우어



나는 5년 전쯤에 히말라야 산맥 쪽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신선한 바람을 쐬기 위하여 티베트의 고원지대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서 토번국을 가리켜 ‘얼어붙은 산, 눈 덮인 산과 계곡 사이에 엎드려 있다’고 하였다. 그 고원은 삭막한 풍경이 거의 사막에 가깝다. 높고 험한 암갈색 산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광활하고 메마른 곳이었다. 오래 전부터 너무나 가보고 싶어서 끝없는 몽상에 젖게 했던 곳이었다.
나는 그해 가을에 회사 일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티베트의 강렬한 햇빛과 맑고 찬 공기가 필요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운명처럼 해 온 건축 설계사 일을 목숨처럼 사랑하는데 그걸 포기할 수 있을까? 또는 그 때문에 회사를 떠날 수 있을까? 미술관 설계와 관련한 그 여자의 집요한 요구 사항은 타당한 것일까? 건축주이니까? 쓸데없는 개인적 허영심이라고? 공허한 자만심이라고? 난 무엇 때문에 그걸 완강하게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이해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불가해한 인생의 수수께끼일 것인가.
세상의 비밀과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티베트 고원의 순례길을 걸으며 폐부 깊숙이 그 공기를 들어 마시면 함께 푸른 하늘과 아득한 고원의 무채색 정경들이 환영처럼 가슴 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나는 그때 말로만 들었던 티베트인의 장례의식 중에서 천장天葬 또는 풍장風葬의 일종인 조장鳥葬의식을 자세히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그건 순전히 우연한 일이었다. 라싸에 도착해서 뿔고둥 소리에 이끌려 달라이 라마가 속해 있는 티베트 불교 종파인 황모파黃帽派의 사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조캉 사원이었다. 그 사원의 접대소 좁은 방에서 한 달 동안이나 오체투지를 하며 순례를 온, 옷은 남루하고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졌지만 구릿빛 얼굴은 행복해 보였던 티베트 서쪽 지역 사람들과 며칠간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때 알게 된 젊은 라마승이 안내를 맡아주었다.
그는 왼쪽 손에 들고 있는 옴마니 반메훔이 새겨진 (티베트인들이 마니차라고 부르는) 법륜을 천천히 돌리면서 끊임없이 만트라 眞言, 呪文을 중얼거렸다. 그가 중얼거리는 진언이 바로 범어인 옴마니 반메훔 Om mani padme hum이고, 그 뜻은 ‘연꽃 속의 보석이여’이다.그런데 연꽃은 더러운 진흙 뻘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그렇다면 진흙 속에서 아름답게 승화한 연꽃 안의 보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자비, 불법, 또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야만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000년 동안이나 이어져온 티베트의 고유한 장례의식일 뿐입니다. 새들도 인간처럼 고유한 생명력이 있고, 이 세상의 일부분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이 환생하도록 하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 라마승이 걱정이 되었는지 미리 주의를 주었다.
장례식을 주관하는 승려가 주문을 외우며 장례 행렬을 인도하였다. 승려는 긴 목도리의 한쪽 끝을 잡았는데 목도리의 반대편 끝은 시신에게 매여 있다. 승려는 작은 손북과 사람의 넓적다리뼈로 만든 나팔 소리에 맞춰 기도문을 외웠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나면서 나를 인도하는 영적 스승과, 관대함과 분노의 모든 신들에게 귀의하며 절하노니, 위대한 자비의 신께서는 전생의 부정과 쌓인 죄업을 소멸하시고 다른 좋은 세상에 태어나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티베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한 사람도, 사실은 살아 있는 어떤 존재도, 죽음의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은 자는 없다. 사실 우리들 모두는 이번 생에 태어나기 전에 무수히 많은 죽음들을 겪었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죽음의 반대편에 불과하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 가운데 한 면과 같고, 방안에서는 출구라 부르고 바깥에선 입구라 부르는 방문과 같다.
그러나 손북에는 느슨하게 매달린 매듭 끈이 붙어있어 승려가 그것을 손으로 빙빙 돌리면서 치면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었다. 승려는 이따금 시신을 돌아보면서 그 영혼에게 육신과 동행할 것을 청하고, 또한 행렬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인하였다.
정식으로 시체의 해체 작업이 시작되기 전 대략 30분 정도 시체 주위를 유족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라마승의 주술이 낭독되는 의식이 있었다. 그 주술은 이승에 대한 일종의 고별사라고 할 수 있었다.
“…… 죽음의 사신이 언제 찾아올지 아무 생각도 없고 귀 기울이지 않는 자는 누구나 남루한 육체에 머물며 오래도록 고통 속에서 살아가리라. 그러나 모든 성자와 현자들은 죽음의 사신이 언제 찾아올지 알고 있기에 결코 무분별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고귀한 가르침에 귀 기울인다. 그들은 집착이 곧 생과 사의 모든 근원임을 알고 스스로 집착에서 벗어나 생과 사를 초월한다. 이 모든 덧없는 구경거리로부터 벗어나 그들은 다만 평화롭고 행복하리라. 죄와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들은 마침내 모든 불행을 초월하리라.”
그러고 나서 해체 작업을 주관하는 조장사鳥葬士는 망인의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숙련된 동작으로 조장 터 중앙의 커다란 돌 위에 놓여 있는 시체의 해체 작업을 시작하였다.
조장사는 예리한 칼로 먼저 머리통을 잘라내고 그 다음에는 시체의 등뼈를 위쪽에서부터 아래쪽까지 일자로 그어서 양쪽으로 절개하여 순차적으로 살을 도려내기 시작하였다. 그러고 나서 사지를 절단하여 토막 내서 살과 뼈를 분리하고 큰 망치와 도끼로 잘게 부순다. 이 순서가 끝나면 상체의 앞가슴을 절개해서 내장을 꺼내 잘게 썰고 가슴 근육을 발라낸다. 이어서 얼굴 안면의 살과 뼈를 발라내고 머리통을 망치로 내려쳐서 잘게 부순다. 그리고 새들이 먹기 좋도록 잘게 썰고 부순 인육 덩어리를 티베트인들의 주식인 짬바와 잘 버무려서 산기슭에 있는 조장 터 주변에 골고루 펼쳐 놓는다.
이 풍장은 페르시아 계통의 조로아스터교 일파인 파르시이 교도들의 풍습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인간의 몸은 물, 불, 공기, 흙의 네 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가급적 빨리 이러한 원소들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화장은 시신을 불의 원소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매장은 시신을 흙의 원소로 되돌리는 것이고, 수장은 물의 원소로 되돌리는 것이며, 풍장은 공기의 원소로 되돌리는 것이다. 풍장의 경우 시신을 쪼아 먹는 큰 새들은 공기의 거주자로 인정된다.
시체의 해체 작업은 거의 5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때쯤이면 인육의 피비린내 나는 냄새가 하늘까지 퍼져 올라가서 새들의 후각을 잔뜩 자극하기 때문에 수백 마리의 대머리 독수리 떼가 조장 터로 몰려들어 경쟁적으로 인육을 집어 삼키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고원의 푸른 하늘 도처에서 계속 날아들고 있었다. “지금 피의 잔치가 있을 거야. 어서들 오라고……. 늦지 말라고……. 날개를 있는 힘껏 저으란 말이야, 날개를 힘껏.” 독수리들은 신이 나서 서로에게 외쳤다. 그러고 나서 새들은 걸신들린 것처럼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해치워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찌꺼기는 다시 까마귀 떼가 몰려들어 아주 깨끗하게 먹어 치운다.
새들은 포식한 후 식곤증을 떨쳐 버리기 위하여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티베트 고원의 푸른 창공을 추운 줄도 모르고 악취가 풍기는 고약한 트림을 해대면서 유유히 날고 있었다.
라마승이 말했다. “저들은 사람고기라고 하면 환장을 하지요. 도대체 물릴 줄을 모르는 겁니다. 식사 후 잠깐 동안 소화 운동을 하기 위해 저렇게 허공을 빙글 빙글 돌고 있지요. 그러고 나서 다른 조장터로 날아가지요.”
그러나 망인의 가족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 광경을 덤덤한 눈길로 그저 바라볼 뿐이다. 티베트인들에게 천국의 사자使者인 독수리는 인육과 함께 망인의 영혼까지 집어삼켜서 운반하기 때문에 죽음과 환생, 윤회의 신성한 매개체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새들이 찌꺼기를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을수록 안심을 한다.
나는 산기슭에서 라마승과 헤어진 후 가파르고 굴곡진 좁은 길을 따라 평지로 겨우 내려왔다. 조장사의 날카로운 칼질에 머리, 가슴, 몸통, 정강이, 허벅지, 발목, 팔 등이 나가 떨어져 바닥에 뒹굴고, 머리를 자를 때에는 골수가 터지는 광경이 눈앞에서 어른거려 계속 헛구역질을 하였다.
그때 바이올린의 선율이,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서 들은 적이 있었던 ‘끽끽끽 끽끽끽 끽끽끽’하는 짧고 날카로운 고음이 귓속에서 계속 울렸다.
나는 내려오면서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발을 헛디딜 뻔하였다. 무릎과 어깻죽지의 관절이 심하게 쑤셨고 통증이 왔다. 그러나 낮은 곳으로 내려올수록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느긋하게 호흡할 수 있었으며, 심장의 박동이 완만해져서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체를 안치한 정사각형 관을 따라가면서 울리던 큰 소라로 만든 나팔 소리와 저음의 징 소리가 긴 여음이 되어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 내려오면서 힐끗 뒤돌아보았더니 그 조장사는 술에 완전히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조장터 부근에서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조장은 낯선 사람에게는 몹시 잔인해 보이지만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티베트의 장례의식이었다.

브라마푸트라 강이 흐르는 티베트 남부 도시 라쯔에서 덜커덩 거리며 출발한 고물 버스는 매연을 내뿜으며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먼지를 매달고 서쪽으로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다. 중년의 운전기사는 거무스레한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나있고 턱수염이 무성하다. 그는 우루무치에서 온 위구르족 출신이었는데 매우 강인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나는 출발하기 하루 전 황금 지붕을 인 조캉 사원에서 황금색 옷을 걸친 채 연꽃 좌대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부처님에게 향을 피우고 기도를 했었다. “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다만 내 자신의 소리를 들리게 해주소서.”
길가 가로수 밑에 떼 지어 몰려있던 양떼와 염소들은 희뿌연 먼지 속에서 놀라지도 않고 유유히 풀을 뜯어 먹고 있다. 버스가 히말라야 산맥의 아래쪽 계곡으로 들어가면서 길은 점점 험해졌고 빈약한 덤불들이 조금씩 돋아나 있는 풍경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곳은 길이 끝나는 곳이다. 그러나 공기는 상쾌했고 멀리 히말라야 산맥의 산봉우리에 쌓인 만년설을 바라볼 수 있었다.
흙벽돌로 지은 오두막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에 닿은 것이다. 황혼녘이었다. 마을 앞에는 백양나무 묘목을 줄지어 심어 놓은 개활지가 펼쳐져 있다. 여자와 아이들, 개들이 목청껏 짖어대며 마중을 나왔다. 그러나 이 마을이 안내자도 없이 혼자서 떠나는 순례 길의 출발지이다. 나는 새벽에 출발해서 12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오면서 벌써 지쳤고 배가 몹시 고팠다. 어차피 혼자였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의 인생은 항상 어디론가 떠났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눈의 나라인 티베트에서 성스러운 산과 수도자들을 위한 수도원이나 곰파 (사원)를 순례하고 그 과정에서 사미승들이 따라주는 차를 얻어 마시며 큰 스님들을 얼굴만이라도 잠시 뵙고 몇 마디 진언을 들으러 순례하러 온 순례 여행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목적지는 명확치 않았다. 나는 그 순례길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고 애썼지만 말이다. (티베트인들이 삼발라라고 부르는 샹그릴라 ShangriLa ― 기쁨과 평화가 있는 곳, 아무도 늙지 않고, 모든 사람이 조화롭게 살고 있는,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 중간에 있다는 숨겨진 왕국을 찾아가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혹은 티베트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하였고,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에서 모두 성스러운 산으로 섬기며,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그래서 일 년 내내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바로 그 성산 카일라스 산에 오르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안 올라가는 신성한 산으로 올라가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자신의 체력과 의지,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서 남 티베트의 인더스 강의 발원지에 있는 눈 덮인 고봉을 올라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해탈의 경지가 아니라 단지 작은 깨달음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그 순례 길에서 신들이 어떤 계시를, 또는 암시를 내려주길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집, 집착과 증오심 같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벗어나서 자아를 깨닫고 자기 안의 신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중국어를 어느정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데다 티베트 사람처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땟국이 줄줄 흐르는 티베트 전통 복장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색이 바라고 실컷 떼가 묻고 몇 군데 구멍까지 난 배낭 속에는 작은 텐트와 침낭, 티베트 지도, 약간의 비상용 식량이 들어있을 뿐이다. 식량이 떨어지면 농가에서 탁발을 할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길 생각은 없었다. 오직 간소한 식사만 할 생각이었다.
첫 날은 참으로 상쾌한 가을 날씨였다. 발걸음은 마냥 가볍다. 아무리 걸어도 피곤할 줄을 몰랐다. 광활한 고원 지대를 걸으면 폐쇄 공포증에 걸린 것 같은 가슴을 조여드는 답답한 느낌이 사라졌다. 나는 계속 나아갔다. 멀리 농부들이 추수를 하는 노랗게 물든 들녘이 보였다.
까마귀들이 그 이상한 목이 졸린 듯한 울음소리를 내며 들판으로 날아왔다. 그 까마귀들은 높은 공중에서 호를 그리며 선회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훌쩍 나타났다가 느닷없이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나는 까마귀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공을 멀리 응시했다.
그러나 일 년 중에서 낮이 가장 짧은 계절이어서 해는 금방 서산 너머로 사라졌다. 그날 밤에는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야행지에서 식사를 하고 차를 끓여 마셨다. 청명한 밤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상현달이 떠올라 은은한 빛을 발하자 계곡은 푸른색으로 물들어 갔고 그때 적막감이 밀려왔다. 나는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나뭇가지들을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벌겋게 타오른 잉걸불에서 가끔 불꽃이 일어났다.
다음날 아침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자욱하였다. 나는 서둘렀다. 계속 걸어서 고개에 다다르자 성스러운 종교적 유물이나 경전, 또는 위대한 고승의 유품과 뼈를 안치한 불탑인 쵸르텐이 나타났고 티베트 불교의 경전이 인쇄되어 있는 만국기처럼 생긴 타르쵸가 바람에 나부꼈다. 그리고 깊은 협곡을 빠르게 흘러내리는 강에 도착하였고 위태롭게 걸쳐있는 낡은 나무다리를 건넜다. 햇빛이 안개를 걷어내고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골짜기가 갑자기 가팔라졌다. 기묘한 모양의 큰 바위들의 전면에는 빈틈없이 부처와 신, 보살, 고승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한결같이 눈을 반쯤 감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며칠째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다. 끝없이 걸었다. 발은 퉁퉁 부었고 등에는 통증이 왔다. 다리는 천근만근 무겁고 배낭은 어깨를 무섭게 짓누른다. 하루 종일 걸으면서 녹초가 되어버렸다. 얼굴은 햇볕에 탔고 발바닥에는 물집이 잡혔다가 두터운 굳은살로 변했다. 그러나 그 성산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자신을 혹사시켜서 기진맥진하게 만들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은 지가 만 하루가 지났다. 그러나 허기가 지고 극도의 피로감이 전신을 엄습해 와서 더 이상은 도저히 걸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순간 그가 걸었던 사막들 ― 메마른 모래밭, 그보다 더 말라버린 자갈밭, 작렬하는 소금 평원을 지나 바위투성이 사막과 협곡, 질식시킬 듯한 먼지바람이 불거나, 바람 한 점 없이 숨 막히는 날씨가 계속되는 다나킬 사막이 생각났다.
이제는 푹 쉬고 음식을 먹고, 얼음장 같은 차디찬 물로 목을 축이고 잠을 충분히 자야할 것이다.
하지만 외따로 멀리 떨어져 있는 그곳 짙은 숲 속에는 보이지 않는 육식 동물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회색 늑대이거나 히말라야 눈표범이 먹이를 찾아 내려온 것일 수도 있다. 밤이 깊어지자 숲속을 어슬렁거리는 짐승의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의 어둠 속에서는 시시각각 청각이 극도로 예민해진다. 그 짐승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느 순간 덮칠지도 몰랐다. 지금 잔뜩 배가 고파서 본능적으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밤이 더욱 깊어가고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다. 그러나 두려워했던 순간이 닥친 것이다. 눈부시게 하얀색 바탕에 검은 얼룩이 온몸에 빽빽한 늙은 눈표범이었다. 그것이 통통한 긴 꼬리를 흔들고 낮고 묵직하게 으르렁 거리며 나를 향해서 다가왔다. 그 절제된 으릉거림이란.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엉거주춤 일어서서 얼굴과 목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 자세를 취했다. 다리에 쥐가 난 듯 저리고 온몸이 극심한 고통과 긴장으로 경직되어 갔다. 놈은 어느새 공격하기 위해 자세를 취했고 그 순간 나는 날카로운 돌을 집어 들었다. 놈에게 돌칼을 휘두르면서 맹렬하게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목구멍에서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놈은 계속 사력을 다해 나의 몸 여기저기를 찢고 할퀴고 흔들고 물어뜯었다. 다음 순간 나를 향해 껑충 뛰어오른 놈은 나를 땅바닥에 넘어뜨리고 앞발로 가슴을 짓누르며 눈을 번득이다가 목을 물려는 찰나였다.
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돌칼로 놈의 오른쪽 눈을 내리쳤다. 그건 치명타였던 모양이다. 놈은 움찔 놀라서 날카로운 흰 발톱으로 가슴과 배의 피부와 근육을 찢고 나서 물러났다. 그리고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놈과의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이겼던 것일까. 그러나 거의 탈진해서 전신에 힘이 빠졌고 할퀸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흐르며 온몸이 화끈거렸다.
참으로 상쾌한 아침이었다. 나는 간밤에 긴 꿈을 꾼 것을 기억했다.
나는 계속 높은 언덕 지대를 걸어가면서 왼쪽으로 히말라야 산맥의 정수리에 만년설을 이고 있는 웅장한 산봉우리들을, 오른쪽으로는 황량한 티베트 고원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역사와 전설로 가득 차있는 순례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꺼려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끔 티베트 밀교의 비의를 터득하여 높은 경지에 다다른 고승들과 라마승, 성지순례를 하는 탁발 순례자들, 가족 단위 순례 객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바위투성이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그곳은 협곡으로 길이 좁아지면서 나무가 울창했다. 가을 날씨는 청명했고 아직은 춥지 않았다.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그러나 계곡 속 깊은 강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다.
나는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옷을 홀라당 벗은 후 작은 연못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몸을 목덜미까지 완전히 담근 채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상쾌한 물의 느낌과 튀겨 오르는 물방울 때문에 기분은 한껏 달아올랐다. 물가로 나오자 따사로운 가을 햇볕이 몸을 데워 줬다.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밤이면 아주 얼큰하게 술을 마셨다. 내가 가끔 겪게 되는 가슴을 쥐어 짜는 듯한 통증과 식도염에 대해 내과의사는 그게 과음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지만, 나의 인생에서 오랫동안 삶의 동반자였던 술을 어느 순간인들 포기할 수 있겠는가. 술은 삶에서 고통의 순간마다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 앞으로 나가게 하는 목발 역할을 해주지 않았던가.
(파리 유학시절, 녹색의 악마인 압생트 또는 가짜 압생트인 페르노를 미쳐버리기 위해서 그렇게도 많이 마시면서도, 또다시 몽롱한 기분에 취하기 위해서,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한동안 피웠던 마리화나는 약간의 금단 증세에도 불구하고 그 후 끊었다. 정말? 또다시 피울 기회가 온다면 저항할 수 있을까?)
나는 술을 한 모금 입에 가득 넣고서 입 안이 얼얼해질 때까지 입 안에서 술을 굴렸다. 그렇게 몇 잔을 연거푸 마셨다. 한 병을 다 비웠다. 그 생명수 같은 독한 고량주가 목구멍을 타고 위장 속으로 계속 흘러 내려갔다.
검은 밤을 배경으로 은빛 별들이, 그렇게 수많은 별들이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빛나고 있다. 그토록 많은 별을 본 것은 처음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모닥불도 다 타서 수그러들고 있다. 나는 재채기를 하고, 하품을 하고, 자주 방귀를 뀌고, 딸꾹질을 하였다. 텐트 안에서 울퉁불퉁한 땅바닥에 등을 대고 누우면 어느새 한없는 해방감과 편안함이 몰려왔다. 그것은 나를 괴롭히던 불안감을 거둬갔다. 나는 행복했으며 편안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태양이 솟아올랐다. 막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팔과 다리가 뻣뻣했으나 다시 걸어야만 한다. 그러나 고지대로 힘겹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풍경은 그 모습이 변해갔다. 작은 새들은 저지대 들판으로 날아가 버렸고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도 점점 사라져버렸다. 고도가 점점 올라갈수록 나무들은 발육이 정지되어 관목으로 변해서는 척박한 산기슭에 달라붙어 난쟁이가 되었다. 그나마 조금 더 올라가면 살아남지 못했다. 산비탈의 바위에는 엷은 색 이끼가 껴있다. 나는 가파른 경사면 때문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짧은 가시가 돋아나 있는 나뭇가지와 울퉁불퉁한 돌들을 붙잡아야만 했다.
나는 여전히 걷고 있다. 언제든지 걷고 있다.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심장의 박동이 두근두근 뛴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려서 멍해지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얼어붙은 몸이 조금씩 풀리며 문득 나의 안에서 무언가가 열린다. 그때 누군가 너무나도 생생하고 강렬한 목소리로 나를 간절히 부른다. 하지만 내가 뒤돌아보아도 아무도 없다.
(우리 회사에서 프리랜서 사진가였던) 그녀가 갑자기 그립다. 눈물이 날만큼 애타게 그립다.
(그녀만 보면 안절부절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신비한 여자. 탄탄한 엉덩이를 가졌고 그 때문에 내가 육체적으로 갈망했던 여자. ……그녀는 타락한 자이며 거룩한 자이다. 그녀는 아내이고 처녀이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딸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예쁜 얼굴이나 균형 잡힌 페르소나가 가물가물하여 온전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실제 존재하는 실존 인물이기는 한 것인가, 다만 나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맴도는 가상 인물에, 여기 세상에 결코 있지 않은 존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나는 계속 걸었다. 나는 호모 에렉투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험한 바위투성이 길가에서 최근에 세운 듯한, ‘1994년 겨울 이 순례길에서 시신으로 발견 된 불교도인 두 사람의 프랑스 순례자 루이 앙헬과 테레즈 오브르니를 추모하며’라고 새겨진 비목碑木을 발견했다. 그들은 부부 사이 또는 연인 사이였을까. 아니면 길에서 우연히 만난 단순한 순례자들이었으나 운명적으로 함께 천국으로 올라간 사람들. 나는 합장을 했고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남쪽 바다에서 죽은 아버지와 남동생을 생각했다. 폭풍우. 악몽의 바다. 벌써 한 세대만큼이나 오래 전의 일이고 동생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지만 내가 늘상 느끼는 원죄의식 같은 죄 의식은 내 의식 속에서 너무나 뚜렷했다. 내 쌍둥이 동생은 진즉 죽었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남아 잘 살고 있지? 나 혼자서 살아남아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지?
대머리 독수리들이 포효하는 바람을 등에 업고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것들은 바람의 흐름을 타고 거대한 날개를 편 채 활공을 하였다. 나는 독수리들의 비상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지금 한껏 포만감을 느끼며 유유자적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시 배가 터지도록 인육을 먹기 위해서 다른 조장터로 이동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인육이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니까.
대머리 독수리는 원래 인육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것들은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매일 그렇게도 파먹었다.
(귀스타브 모로의 그림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는 제우스가 보낸 큰 독수리’를 보면 제우스가 보낸 그 독수리는 분명히 대머리 독수리이다.)
티베트 고원의 계곡에 심원한 침묵이 깔렸다. 그 침묵이 나의 영혼을 흔들었다. 나의 모든 감정이 고갈되고 가슴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자신은 지금 어떤 전환점에 이른 것이 아닐까. 나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혼자임을, 철저히 고립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끝없이 펼쳐진 티베트 구석에 꼭꼭 숨어있는 (중국 관청에서 출간하는 ‘티베트 불교사원 안내서’에도 나오지 않는) 백모파의 사원을 거치고, 인간의 시선을 거의 받아본 적이 없는 만년설로 뒤덮여 있는 원시의 성산까지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마지막 고개를 지나서 산등성이에 이르렀다. 그곳을 지나갔던 도보 순례자들이 쌓아 놓은 재단들이 눈에 띄고 티베트 고개마다 무수히 걸려있는 타르쵸가 강력한 바람에 찢어질 듯이 나부끼고 있다.
이제 가을이 깊어지면서 날씨는 추워지고 가혹한 조건으로 변모하였다. 높이 올라갈수록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그리고 심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나는 그때 굶주림과 추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었다. 말할 수 없는 공포감과 두려움을 이겨내야만 했다. 여기서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결심하였다. 미끄러운 절벽에서 발을 헛디뎌 그대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수도 있었다. 또는 그 고도에서는 고산병의 일종인 폐에 물이 차는 폐수종을 앓게 될 것이고, 그때는 그 즉시 환자를 저지대로 옮기지 않으면 목숨을 앗길 수도 있었다.
나는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아이젠과 피켈로 무장을 하고 출발했다. 아침 안개가 갰다.
밤에 잠깐 내린 눈이 부실만큼 새하얀 눈을 정수리에 얹은 성산의 정상이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는 깎아지는 듯한 수직 암벽이 가로막고 서있다. 그 암벽을 우회해야할 것이다. 올라가는 길은 험난했고 너무 좁았다. 눈과 살얼음으로 덮여 있다. 높이 올라갈수록 기온은 뚝뚝 떨어지고 산소가 희박해졌다. 고도는 5,800미터에 이른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몸이 얼기 시작했다. 하늘의 구름이 낮게 떠있어서 손으로 잡힐 듯 하였다.
죽음을 부르는 산인가, 궁극의 시험 무대인가.
나는 웅장한 산의 정상에 서서 산 아래를 굽어 내려다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모래 알갱이처럼 작고 미미하고 연약하다. 이 세상에 더불어 사는 숱한 존재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간 존재의 본질은 하찮고 무의미한 것이다. 그걸 왜 잊고 사는가. 그걸 인정하는데 왜 용기까지 필요한 것일까.
나는 신들께 겸손하게 경의를 표했다. 신들과 침묵의 대화를 하였다. 다만 신들이 말하고 나는 들었을 뿐이다.

나는 이제 급경사면을 따라 하산을 해야 한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모든 육체적 에너지와 정신적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 되었으므로 몸의 피로는 이미 한계를 초월한 상태였다. 눈 위에 쓰러져서 그냥 잠들고 싶다. 나는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을 겨우 꼼지락거려서 목에 걸고 있던 부적인 구리로 만든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집중하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다하였다. 몹시 미끄럽고 구불구불 꺾어진 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베이스캠프로 삼았던 산 중턱이 아직도 아득히 저 멀리에 있었다. 그런데 삐끗하면서 발을 그만 헛디뎠고 발밑이 무너져 내리며 돌무더기와 함께 속수무책으로 미끄러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살얼음이 덮여 있던 무른 땅은 계속 무너져 내렸다.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마침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미끄러져 내리다 계곡으로 곤두박질을 하였다.
나는 그때 순간적으로 자신이 죽을 거라고, 그리고 하늘을 유유히 나는 독수리들을 생각했다.
내가 겨우 눈을 떴을 때는 문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해 보이는 오두막 흙집 안이었다. 야크 기름으로 타는 호롱불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그을음으로 낮은 천장과 벽들이 온통 새까맣다. 찌든 냄비와 식기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구르는 흙바닥에 나는 누워있었다. 그러나 항아리에서 잉걸불이 이글이글 타고 있어서 따뜻했다. 여전히 온몸의 근육과 관절이 지독하게 쑤셨지만 뼛속 깊이 얼어붙어 있던 몸은 조금씩 녹기 시작했고 팔다리에 피가 돌았다. 이제 상처에서 출혈이 멈추었고 서서히 아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격렬하게 기침을 하였고 더러운 가래 덩어리를 뱉어내었다. 가끔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헛소리를 하였다. 나는 다시 죽은듯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다.
할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생명의 은인인 그 인자한 할머니는 여러 가지 약초들로 즙을 만들어 멍든 상처에 발라 주었고 몇 년 동안이나 거의 십년동안이 행주 겸 걸레로 사용했을 때 묻은 소매로 탕약을 들고 그걸 마시도록 강요했다.
머리카락은 다 희어졌고 얼굴이 주름투성이어서 웃을 때는 주름에 덮여서 눈이 보이지 않는 할머니의 이름은 ‘차호웨’이다. 할머니는 귀한 약초를 캐러 인적이 거의 없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산에 쓰러져 죽어가는 나를 발견했고 마을사람들이 떠메고 내려왔던 것이다. 열흘 전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죽은 것으로 알고 한동안 포기했고 라마승을 불러 주문을 외우게 했고 조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한동안 죽었었다. 숨이 거의 끊어졌거나 의식이 빠져나간 것이다. 그것은 비참하고 어두컴컴한 죽음과 환생 사이, 바르도의 세계 또는 중음中陰의 세계였다.
라마승이 주문을 외웠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그대여, 그대가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순간이 다가왔다. 그대의 호흡이 멎으려 하고 있다. 그대는 한때 그대의 영적 스승으로부터 존재의 근원에서 비치는 투명한 빛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이제 그대는 사후 세계의 첫 번째 단계에서 그 근원의 빛을 체험하려 하고 있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제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가왔다. 그대는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하지만 그대만이 유일하게 떠나는 자는 아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이 세상의 삶에 애착을 갖거나 집착하지 말라. 그대가 마음이 약해져서 이 세상에 남겨 둔 것에 아무리 집착할지라도 그대는 이제 여기에 머물 힘을 잃었다. 그대가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 윤회계의 수레바퀴 아래를 헤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그러니 마음이 약해지지 말라. 다만 진리와, 진리를 깨달은 자와, 그를 따르는 구도자들을 기억하라.”
나는 그때 환생할 수 있었을까. 그곳은 티베트였으니까. 그런데 카르마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나는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쥐나 개구리 또는 벌레 같은 하등 동물로 환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땅에 다시 남자로 태어나서 다시 건축가가 되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동물로 환생하였다면 나는 아프리카를 사랑했으니까 사자나 코끼리 같은 존엄한 동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조금씩 회복 되었다. 무엇보다도 돌무더기와 함께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허리 쪽을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하반신 마비가 올 줄 알고 무척 걱정했는데 지금 보니 그쪽은 멀쩡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졌지만 건강이 조금씩 회복 되면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불이 밝혀진 집에서 간절히 기도하려 했지만 마음이 흔쾌히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를 위해서 끊임없이 마니차를 돌리며 기도를 하였다. 그 덕분에 내가 살아났는지도 모르겠다.
라마승이 매일 그 흙집으로 찾아왔다. 이제는 만트라를 외며 빠른 회복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라마승이 말했다. “이제 보니까 부처님이 돌봐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그대 몸은 회복된 것이 아니라 일시 죽었다가 부활한 것입니다. 그때 딴 세상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왔다가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돼서 돌아간 것이지요. 그대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겠죠. 그러니까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식을 낳으세요. 많이. 열두 명쯤 낳으세요.”

차호웨 할머니가 마른 나무토막을 얹고 바람을 불어넣자 잠든 불꽃이 다시 일어났다. 불꽃이 활활 타오르면서 나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고 의식이 차츰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불은 생명이고 구원이다. 불은 파괴하면서 정화하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 …… 모든 것이 불타고 있느니라. 모든 형태와 색채들, 모든 감각, 좋거나 나쁘거나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 그 무엇이든 불타고 있느니라. 그래서 고통과 탐욕, 모든 것, 좋거나 나쁘거나 혹은 그 어느 쪽도 아닌 감각에서 벗어난다.
할머니는 우리 식으로 생각한다면 아주 불행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티베트 산골 마을에서는 형제들이 나누어지면 재산도 나눠야 하니까 여러 형제가 한 여자를 공동으로 아내로 삼는다. 그리고 가장 연장자인 첫 번째 남편이 모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 그 외 다른 남편은 비록 생물학적인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아이의 삼촌일 뿐이다. 할머니는 삼 형제를 두었는데 셋째는 그런 관습이 죽어도 싫었으므로 철이 들자마자 도시로 나갔다. 문제는 둘째였다. 그는 몇 개월 동안 외지로 장사를 떠났다가 돌아와서는 질투에 눈이 멀어서 형님과 형수이면서 아내인 여자를 도끼로 내려찍어 죽이고 나서 그날 밤으로 어딘가 멀리 달아났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런 한을, 기구한 운명을, 가슴에 안고 일체 내색하지 않으면서 그저 담담하게 살고 있었다. (내가 떠날 때 라마승이 내게 그 슬픈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남겨두고 온 현실, 도망쳐온 현실과 진지하게 대면해야 할 것이다. 내가 무얼, 누굴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 때문에 불타오르는 증오심을 품고 있는 것일까. 어떤 사적인 대상이나 감정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갑자기 나는 강렬한 마음의 동요에 사로잡혀 있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아, 죽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꾸물거리는 자이다. 그때 독수리들이 하늘을 날고 있었지 않았는가. 나는 이번 생을 쓸모없는 일에 모두 바치고 귀중한 기회를 놓쳐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일 내가 이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삶의 목적은 잘못된 것이리라.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니 지금이라도 신성한 진리에 나 자신을 바쳐야 하리라.
이제 몸은 거의 완쾌되었다. 곧 귀국할 것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났다. 겨울 태양이 빛나고 있다.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고 흙담집의 문을 열자 차갑지만 부드러운 바람이 들어왔는데 주위에서 온통 신선한 냄새가 진동했다.
돌아가면 서랍에 넣어둔 사직서를 찢어서 휴지통에 버려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건축물의 변경해야 할 설계도를 기한 내에 완성해야 하리라.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멋진 설계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설계실이 그립다, 그리워. 일이 잘 끝날 때마다 큰 기쁨을 느끼니까.
지금쯤 회사 건물의 외벽을 온통 뒤덮고 있는 담쟁이 넝쿨은 낙엽이 되어 다 떨어졌을 것이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문을 열면 햇빛과 바람과 도시의 소음이 안으로 몰려들어 오겠지. 난 그때 씁쓸한 미소를 지을 것인가? 눈가에는 서글픔 때문에 이슬이 맺힐 것인가?
이건 타협이 아닌 거야. 타협은 있을 수 없어. 난 설득당한 게 아니라니까. 오직 그녀를 위해서야. 그리고 나 자신과 비굴하게 타협하는 것도 아니다. 건축주가 제기한 요구 사항의 타당성을 인정한 것뿐이다. 다만 나 자신을 용서하고 이 세상과 화해和解할 뿐이다.
그 미술관을 짓기 위해서는 복합 건물에서 예산을 절약하는 거야. 실내의 기둥을 반 이상 줄이면 되는 거지. 그러면서 공간의 경제성을 살리는 거지. 그리고 나서 기둥과 공간 사이에서 예술성을 구현하는 거야. 내가 원했던 것은 미술관이니까 미적 감각이라는 예술성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예술의 극치는 예술을 감추는 것이다.
나는 또다시 팽팽하게 긴장해서도, 너무 초조해도 안 되고, 당혹감이나 자괴감을 느껴서도 안 되고, 구제불능이라고 자책해서도 안 되고, 즉흥적이어도 안 된다. 완벽에 대한 강박관념도 안 된다. 나는 완벽이 아니라 하나의 완성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야한다. 나는 자유와 고독 속에서 밤을 새서라도 그것을 완성해야만 한다.
그 건축물에서 균형 감각과 리듬감을 살려야 할 것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더 넓혀서 공간을 많이 확보하여 벽은 솔리드 (채움)의 역할을, 기둥 사이의 빈 공간은 보이드 (비움)의 기능을 수행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 건축물은 구조물 사이의 적절한 간격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템포와 리듬감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미술관은 검은 벽돌의 정사각형으로 엄격한 단순성을 살리면서도 그녀의 요구 조건을 완벽하게 반영해야 하리라.
작성일:2023-09-11 14:00:57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