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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빈롱으로 가는 길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06-30 10:46:52
조회수
117
빈롱으로 가는 길


긴 여행…… 돌아오지 않는 여행


실종자 (혹은 탈영병).
월남어 교육대 출신. 김정현 병장은 파병 초기 보병 중대에서 몇 개월간 복무한 후 뒤늦게 대학에서 불문과를 다녔다는 학력 때문에 민사병으로 선발되었다. 그는 사단 월남어 교육대에서 6개월간 월남어 교육을 마친 후 연대 민사과에 배속되어 대민 지원 활동에 투입되었다.
나와는 월남 파병 동기였고 나이는 겨우 한 살 위였다.
우리는 보충 교대 병력으로 도착해서 사단 보충대에서 연대로, 대대로, 중대로 계속 내려갔고, 대대 훈련장에서 보병 부대에서 필요한 교육훈련을 함께 받았다. 먼저 M16 소총의 분해, 결합과 사격법을 실제 사격을 하면서 교육받았고, M79 유탄발사기, 신형 RKT 사격법, (푸른 스모그라 불렸던) 신호탄, 수류탄, 크레모아 등 각종 화기들의 사용법을, 베트콩의 전술과 특징, 베트콩의 요란 사격에 속지 않는 법, 지뢰와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는 장소의 탐지와 조치, 매복 정찰 요령 등등을 배웠다.
교관인 귀국 말년 중사가 말했다.
“이 전쟁은 이유가 없어. 이유가 있다고 해도 이유가 옳든 그르든 상관할 것 없어. 우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1년만 견디면 되니까. 다시 강조한다. 1년만 견뎌라! 하루가 여삼추 같지만 지나고 보면 빨리 가지. 조기 귀국하는 길은 큰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후송되거나 죽어서 검은 재가 되어 돌아가는 것뿐이다.
왜 우리가 머나먼 땅에서 죽어야 하나.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스포츠 게임도 아냐. 다른 놈이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여야 되는 거야. 이게 전쟁의 철칙이다.
미군은 황색 인종을 멸시하니까 베트남을 인디언 땅이라고 하지. 백인이나 흑인이나 황인종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몸속에는 똑같이 붉은 피가 흐르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황색 인종끼리 싸우는 거야.
미국이 왜 우리를 끌어들였겠어. 월남전이 백인과 황인종의 전쟁으로 인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황인종인 한국군이 필요했던 거지. 그걸 알고 있으라고.
미국은 1955년이던가 프랑스가 물러가자 철수한 프랑스를 대신해서 월남을 떠맡은 거다. 그때부터 미국과 베트민 간 제2차 베트남 전쟁이 사실상 시작된 거란 말이다. 미국은 1950년 6월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공산주의 팽창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했다. 월남이 떨어지면 인도차이나 반도의 라오스, 캄보디아가 떨어지고 이어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된다는 거였다. 그게 그들의 단순한 논리였어.
여기는 고정된 전선이 없어.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할 수 없다고. 군복도 입지 않고 검정색 파자마 차림으로 돌아다닌다.
언제나 다니던 길을 다시 가면 안 된다. 통행이 잦은 곳에는 반드시 부비트랩을 설치하지. 길가에 문이 열린 폐가가 있으면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마라. 거기에도 부비트랩이 설치되어 있지. 다시 강조한다. 열린 문을 조심하라.
그놈들은 별거 아냐. 적은 그들이 아니야. 여긴 소련제 탱크도 없고 미그기도 없어. 지뢰와 부비트랩만이 사방에 널려 있다. 부비트랩이라는 말만 들어도 피 냄새가 난다. 몸서리쳐지지.
매복할 때건 정찰할 때건 밤중에 담배 피우지 말고 모기약 바르면 안 된다. 저격병이 쥐도 새도 모르게 지켜보고 있다.
마지막이다.
거머리를 조심해야 한다. 거머리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매복을 나갈 때는 거머리가 들러붙지 못하게 바지 끝을 단단히 붙잡아 매고 그 위에 정글화를 다시 단단히 조여야 한다.
절대로 죽지 마라. 그건 개죽음이다. 무사히 귀국해야 한다.”
우리는 저녁이 되면 자주 연대 PX에서 만났다. 내가 102 야전병원에서 퇴원하고 나서 대대본부에서 근무하면서부터 같은 영내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어김없이 형님, 그것도 큰형님 행세를 하였고 나는 어느새 이를 받아들이고 완전히 긍정하였다. 나는 흉내조차 낼 수 없게 멋있게, 휘파람으로 악기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것처럼 긴 선율들을 아주 짜임새 있게 연달아 불어댈 수 있고, 이중 인격적이면서 성숙한 인간이었으니까. 그러므로 그의 내면에는 양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감정들이 뒤섞어서 공존하고 있다.
그새 몰라보게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우린 친했고 서로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에도 정말로 가까운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적극적으로 접근해서 정말 진정한 친구가 하나 생긴 것이다. 나는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친구가 반드시 필요했었다.
그가 맨날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심문 (또는 고문)하는 고정 메뉴가 있었다. 그는 대단한 고참인 것처럼 한껏 거들먹거리며 과장해서 위악적으로 말했다.
“넌 순진하긴 한데 쪼다라고 할 수 있어. 아직도 완전한 쪼다. 순진한 게 좋은 게 아니야. 그건 병신 머저리라는 말의 완곡어법에 불과한 거지. 넌 담배도 못 피우지. 술도 못 마시지. 아편도…… 아편 냄새 그거 기가 막히지. 아편은 낙원으로 들어가는 열쇠야.
내가 말하는 술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는 말술을 말하는 거야. 붕붕도 못하지. 노름도 못하지.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 말이야? 그것들이야말로 인간 성체의 징표인데 말이지.”
“말 한번 잘했네. 저승 문앞까지 갔다 왔으니까…… 인생은 아무것도 아냐.”
“케 세라 세라!”
“허무주의가 뭔지 알기는 했지.”
“그런데도…… 뭔가…… 안 바뀌었다는 거야? 네 인생관인지 세계관인지 확 바꿔야 하는 거 아냐?”
“그게…… 하루 아침에……”
“너 혹시 독실한 예수쟁이 아니야?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목사 아니면 전도사 집안인 거지? 황금 십자가와 묵주는 어디에 숨겨놓은 거야? 네놈이 월남까지 왔으면 기념으로 붕붕쯤은 해야 될 거 아냐. 딱지를 떼란 말이야.
너 같은 놈만 있다면 말이야, 수진 마을에서 젊고 예쁜 여자 2,000명이 날이면 날마다 목을 빼고 남잘 기다리고 있는데…… 그러면 걔들은 도대체 뭘 먹고 살겠어. 물만 마시고 사느냐 말이야. 너는 도대체 말이야, 인간의 본성인 연민의식이 없는 거야. 난 전투 수당을 몽땅 수진에 갖다 바쳤어.”
“수진에 너무 들락날락하니까 조심해야 할걸.”
“뭘? 조심해. 수진은 아니라니까.”
“여자 베트콩들이 첩보 임무를 띠고 창녀로 가장해서 수진으로 왔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래서 씨클로 운전수들과 짜고 찾아온 군인들을 독침으로 찌른 다음에 기절하면 스카치테이프로 입을 막은 다음 납치한다는 거지. 그리고 필요한 정보를 캐낸 다음에 이튿날 아침이면 그 군인은 뒷골목에서 성기가 잘린 시체로 발견된다고 했어.”
“넌 정말…… 왜 그렇게 한심한 소리만 하지. 다시 말하지만 수진은 월남에서 제일 안전한 곳이야. 옛날 우리 얼룩무늬 해병대가 완전히 평정한 다음 다낭으로 올라갔으니까.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란 말이지.”
“수진은 여전히 낯설어……”
“수진에는 없는 게 없어. 미군 PX에서 구입할 수 없는 것도 거기서는 가능하지. 마리화나는 물론이고 순도 99퍼센트인 헤로인도 아주 값싸게 구할 수 있지. 미군들이 환장하는 거야. 뉴욕보다 10분의 1 가격이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순진하기는. 정말 그렇게 순진한 거야?
미군 PX가 문제인 거지. 너무 많은 물품이 넘쳐나면서 흥청거리니까 거기서 전부 흘러나와. 그게 모든 부패의 근원이 되어버렸어. 베트남은 온통 썩었어. 한국 군대도 썩었다고 하지만 우리하고는 비교할 수 없어.
어쨌거나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신경끄자고. 모른 척해야겠지. 곧 떠나니까 우리 걱정이나 하자고.”
“그렇긴 하네. 우리하고는…… 나도 듣는 게 있고 보는 게 있으니까 알 만큼 알고 있지. 날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나라고…… 어쩌겠어. 나는 더 이상 순수하지 않다니까.
순수 그거 웃기는 거란 말이지.”
“뭐라고? 대대 행정병이 되었으면…… 너도 지금쯤 월남 고참이야. 곧 병장으로 진급할 거고. 신입들에게 할 얘기가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수진의 꽁까이 얘기는 빼놓을 수 없지. 그들이 제일 먼저 듣고 싶어 하는 게 그거라니까.”
“귀대하기 전날 나트랑 시내에 갔었다니까. 허탈감만 느꼈지.”
“뭘 어쨌다고? 딱 한 번 갔다는 거 아니야. 평생 처음이었는데 그게 제대로 됐겠어? 뻔하지? 그까짓 거 가지고? 네가 애송이인 것은 틀림없어. 또 뭐가 있는데? 말해 보라고……?”
“나도 전투에 여러 번 참가했다니까. 지하 땅굴에도 들어갔고 정찰과 매복 작전에도 나갔고. 백마 작전에도. 죽을 고비도 몇 번 있었지. 내가 살아있는 게 기적 같다니까. 102 병원에서 퇴원한 게 엊그제 같은데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도 있었어.
어린 베트콩이 총을 내게 겨눈 채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발사하지 않고 숲속으로 그대로 사라지더라고. 나는 그때 엉겁결에 총을 바닥에 떨어뜨렸으니까 머리가 하얘지면서 정신을 놓아버렸지.
내가 그렇게 불쌍하게 보였던 것일까? 연민의식 때문이었을까?
인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지.”
“그렇단 말이지……?”
“우린 다 같은 인간이라니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전쟁터에서 휴머니즘을 논하자면 구차스러우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여자와 사랑 문제는 전투하고는 완전히 다른 거야. 그건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차이이니까 차원이 다르다고.
전혀…… 진짜 사랑 말이야. 그러니까 너는 아직…….
내가 좋아하는 아폴리네르의 시를 다시 들려주어야만 하겠지. 이게 마지막일 거야. 시인은 화가 마리 로랑생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사랑했거든.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 사랑은 가버린다 흐르는 이 물처럼
사랑은 가버린다
이처럼 삶은 느린 것이며
이처럼 희망은 난폭한 것인가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왜?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 그런 생각이 든다고.
그러니까…… 내 말은…… 섹스를 하려면 제대로 하란 말이야. 장난치지 말고. 로마인들은 그 옛날에 벌써 ‘동물은 교미 후에 슬프다’고 했어.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고.”
“여기서 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나오는 거야. 불문과 다녔다고 티 내는 거겠지.”
“늘 그렇게 느꼈으니까…… 약간 허무하다니까.”
“제대로 해보긴 한 거야? 잘난 체 그만 하라고.”
“너 같은 진짜 숙맥이 알기나 해? 명기 말이야. 그건 여자의 신체적 구조 문제가 아니야. 내 경험에 의하면 그런 거지. 여자가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면서 불태울 때 누구나 명기인 거지.”
“형은 아는 것도 많아. 그래서 단골이 된 거야.”
“내가 공짜로 시켜줄게. 제발 좀 따라만 와주라. 진짜배기 아라비아산 낙타 눈깔도 줄게. 그게 말이야, 신비한 요물이거든. 여자가 환장을 하는 거지. 남자도 덩달아 환장을 하고 말이지. 그쯤 해야 섹스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게 되겠지.
이 형님의 당면한 소원이 뭐겠어. 네놈 물건이 퉁퉁 부어 가지고 농이 질질 흐르는 꼴을 보는 게 나의 소원이지. 가끔 대가가 따른단 말이야. 인생의 단맛 쓴맛을 비로소 맛보게 되는 거지.
알겠어? 입에서 아직도 젖비린내 나는 놈아, 그걸 고상하게 말하면 구상유취라고 하는 거야.
그런데 말이지, 그래야만, 네가 비로소 인간이, 사내가 되는 거야. 너에겐 지금 하나의 과정이 필요한 거야. 인간 성체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 넌 알에서 하루빨리 부화해야 하는 거야.”
나는 자신이 아직도 너무 순진하고 어리숙하다는 느낌이, 너무 어리석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기 때문에 스스로 창피하였지만 늘 똑같이 반응했다.
“말 한번 잘했네. 그래서 진짜 임질이나 매독에 걸려 질질 흐르면…… 누가 책임질 거야. 월남 여자들이 보유한 병균은 옛날 프랑스 군인으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악질 잡균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월남에서 성병 완치는 전혀 가망 없다니까.
보들레르도 매독 때문에 죽었고, 슈베르트도 성병으로 서른의 나이에 일찍 죽었다고 했는데……”
“매독이나 임질은 군인과 선원들의 직업병이라고 했어. 그만큼 흔해빠진 거야. 그건 1943년 페니실린이 발명되기 전 옛날 옛날 일이야. 안심하라니까. 콘돔을 낄 수도 있지만 그건 재미가 없어. 피부끼리 마찰을 해야 제맛이 나니까.
내가 대책을 이미 세워 놓았거든. 성능 좋은 미제 항생제가 있으니까 도대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수진에 있는 꽁까이들은 깨끗한 것으로 소문이 났어. 그러니까…… 제발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제대로 부화를 하라고. 재탕, 삼탕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해야겠어.”
“나도 지겹거든. 맨날 그 소리…… 쓸데없는 소릴……. 나는 이미 부화했다니까. 멍청이가 아니야. 알 건 안다니까.
그게 뭐 어렵다고. 5불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꽁까이, 붕붕, 오케이 하면 될 거 아냐.”
“그래, 그렇게 하라니까. 넌 보나마나 조루일 거야. 그걸 완화시키는 약은 아직 없으니까……. 그래도 방법은 있지. 내 경험에 의하면 술을 진탕 마시면 알코올 성분이 어느 정도는 진정제 역할을 한다고 보지. 술을 마시고 얼큰할 때 들어가라고.”

그날 저녁, 어스름 빛 속에서 나무들을 공격 헬기에서 쏟아부은 소이탄으로 말끔하게 불태워버린 개활지와 늪지대를 지나 조림된 고무나무 밭과 검고 칙칙한 열대의 숲이 멀리 보였다. 그러나 바다에서부터 기어오른 짙은 회색 물안개가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여전히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김 병장이 마리화나를 피워 물며 말했다.
“이건 정신적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진통제이거든. 새로 나온 건데 독한 대마초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아련한 아편 맛하고는 비교할 수 없지만. 너한테 권하고 싶어도 샌님께서는 질겁을 할 테니까…… 담배도 못 피우는데 말이야. 그런데 이걸 피우면 처음에는 온몸이 노곤해지다가 나중에는 황홀해지지. 하늘을 나는 기분이고 그러면서 묘한 환상을 보게 되거든.
며칠 전 수진에 갔다 왔지. 근 한 달 동안이나 못 만났거든.”
“뻔할 뻔자지, 보고 싶었던 거지. 그게 아니고 하고 싶었던 거지. 그래, 그렇게 좋아? 그 여자 이제 지겹지도 않아?”
“그 앤 그런 여자가 아닌 거야. 단순한 배설구는 아니었지. 내 여자이지. 영혼만은 순결하지. 한 송이 꽃처럼 신선해. 난 랑린의 순수하고 달콤한 냄새를 맡고 들이마시지. 그 앨 보면 오히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작은 물고기가 내 혈관 여기저기를, 심장에서 모세혈관까지 헤엄치고 다니는 기분이 들지.
하지만 그 앤 가끔 눈물을 보일 때가 있는 거야. 메콩강을 그리워하는 거지. 자신은 그 강의 일부라고……. 그 앤 내가 사준 은팔찌를 항상 차고 다녔던 거야. 그 앤 내 아이를 갖고 싶어 했지.”
“얼씨구, 열녀 춘향이가 따로 없네. 아예 결혼해서 한국으로 모시고 가지 그래.”
“야, 임마……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이래 봬도 뼈대 있는 종갓집의 장손이야. 그 낡고 고루한 집안에서 용납하겠어. 야단법석, 난리가 나겠지.”

깜란베이는 사막이나 다름없다. 온통 모래 천지였다. 나무는 없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 언덕에 간혹 잡풀만 자라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 황무지를 미군은 100년 동안 임대차해서 ‘깜란특별시’를 만들었고 거기에 해군기지와 군수기지를 건설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군수 물품과 보급품은 깜란의 부두에서 하역된 후 수십 동의 거대한 크기의 군수 창고로 들어갔다가 미군과 한국군의 각급 부대로 배송되었다.
깜란베이 전경

나는 랑린을 딱 한 번 만난 일이 있었다.
그날은 오전 한때 바다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왔고 하늘에 먹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 태양을 가리면서 열대의 소나기인 스콜이 한바탕 요란하게 쏟아졌다. 하지만 스콜은 잠깐 동안 내렸다. 스콜이 지나가면서 태양은 다시 환히 빛났고 주위의 모든 것도 신선하게 빛났다. 바다는 햇살 때문에 짙푸른 색깔로 빛나고 있었다.
그날, 김 병장이 운전하는 민사과 짚차를 타고 수진에서 랑린을 픽업한 다음에 깜란베이 하역 부두에 있는 시멘스 (sea mans) 클럽으로 갔다. 스피커에서 바이올린과 첼로의 신비한 선율이 반복적으로 어우러지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박학다식한 김정현이 잘난 체하며 설명했다.
“너 처음 들어보지? 저게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조셉 모리스 라벨의 ‘현악 4중주곡’이야. 이 집 바텐더인지 매니저인지 모르겠지만 맨날 라벨의 음악만 틀어주는 거야. 가령 ‘세헤라자데’ ‘밤의 가스파르’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그리고 ‘볼레로’를 반복적으로 틀어주는 거야. 그런데 반복적으로 들어도 지겹진 않단 말이야.”
우리는 커피 대신 캔맥주를 마셨다. 김 병장은 지포라이터로 담뱃불을 댕겨 연거푸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 연기로 공중에 도넛 같은 원을 만들었고 그녀는 그걸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검은 머리가 치렁치렁했고 비록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작았지만 갸름한 얼굴에 도톰하고 육감적인 입술이 돋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나지막했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푸른 꽃잎이 수 놓인 전통적인 흰색 아오자이를 입었고 아오자이 겉으로 희미하게 핑크색 브래지어 끈이 비쳤다.
김 병장에 의하면 그녀는 사이공에서 대학을 중퇴했다. 그들은 내가 시기 질투할 만큼 유창하게 자유자재로 프랑스어 또는 영어로 이야기를 했다. 나에게 미안한 구석도 없이. 물론 나는 몇 개의 쉬운 단어를 빼고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외감을 느꼈고 질투했다.

바다로부터 감미로운 안개가 밀려왔다. 습한 공기는 더욱 끈끈해지면서 축축해졌다.
내가 말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다급하게 랑린을 찾자 마담이 뚱했어.
안 (Anh) 마담은 별명이 ‘마돈나’이지. 상당히 세련되었으니까 그 때문에 연대 행정병들에게는 유명하잖아. 마치 ‘지상에서 영원으로’에 나오는 노련한 포주 ‘키퍼 부인’처럼 느껴지지. 나트랑 출신이고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여학교를 나왔으니까 프랑스어는 아주 능통하고 한국어도 아주 잘 하지.
나트랑과 캄란에는 미국에서 도착한 군수 물자의 하역 작업과 운송 일에 종사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있지. 마담은 한국인을 상대하기 위해서 아주 빠른 속도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어.
그렇지만…… 고객 관리를 위해서 미군이나 한국군만 받고 월남 군인이나 민간인은 절대 사절이야. 그게 영업 방침이지.
마담이 그랬어. 랑린은 여기에 없다는 거야. 처음에는 눈치 없이 아주 통 사정을 했어. 어디로 갔는지…… 그래도 히죽히죽 웃으면서…… 내가 신경질 부리고 눈을 부라려도 그 여자는 묘한 표정으로 계속 웃기만 했지. 그리고 나서 자기는 모른다고 딱 잡아떼는 거야. 그러면서 그 앤 결코 돌아오지 않을 거라구, 죽은 셈 치라는 거야. 그 애한테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
다른 애들이, 새로 온 여자애들이 있으니 마음대로 고르라는 거였어. 마담 밑에는 모두 열 명의 아가씨가 있다는 거지. 그 여자는 철저히 장삿속인 거야. 다른 집에 단골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지. 포주들은 어디서나 돈밖에 모른다니까.
내가 6개월 동안이나 다른 애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일편단심 그 애만 만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야. 그래서 눈이 뒤집혀 가지고 단도를 빼 들어서 마담의 목을 겨누었지. 그때는 정말 목을 따 버릴 작정이었어.
그제서야 마담이 털어놨어. 누구 애인지 모르지만 임신을 했다는 거지. 낙태를 권했지만 완강히 거절했다는 거야. 그래서 집으로 간 거라고…… 고향으로 이미 떠났다는 거야. 몬순 계절이 되면 메콩강 델타는 엄청나게 범람한다는 거지. 그 전에 서둘러서 메콩강 하류에 있는 빈롱으로 출발하였다는 거야.
마담이 그랬어. ‘그 애는 내가 그렇게 피임을 강조했는데. 여기서는 임신하면 절대로 안되는 거야. 장사를 망친다니까. 내 말을 듣지 않고…… 그 애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우리 집의 퀸이었는데……’”
“솔직히 말해 보라고…… 가령 임신했다고 치자고. 그게 누구 자식인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네 말이 맞거든. 누구 자식인지 알 수 없겠지. 그래도…….”
“무슨 예감이라도…… 아니면 육감인가.”
“쓸데없는 소릴 하지 마. 그런 건 없어. 그냥 혼자 놔둘 수는 없는 거야.”
“고향에는 누가 있는데?”
“사이공에서 대학까지 다녔는데…… 1학년 때 중퇴했지만. 빈롱에서 사이공을 거쳐서 여기까지 왔다면 구구한 사정이 있겠지. 1968년 1월 베트콩의 구정 공세 당시 사이공을 탈출했다고 그랬어.
고향에는 늙은 홀어머니가 계시지. 랑린이 보내주는 돈으로 어머니는 살아가고 있어. 랑린이 자세하게 이야기하길 꺼려하지만……
아버지는 남부에서는 제일 큰 프랑스 회사의 고무농장에서 총관리인으로 일했었는데 그게 빌미가 돼서 아버지도, 두 오빠도 베트민에게 죽었다는 거야…… 프랑스 제국주의 앞잡이로 몰린 거지.”
아버지는 프랑스에 유학을 해서 프랑스어가 아주 유창했고 파리 본사의 신임을 얻어 그 고무농장에서 말단에서부터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매년 분기마다 회계장부를 들고 업무 보고를 위해서 파리 본사를 방문했다. 그는 사이공에서 발행되는 프랑스어 신문인 조간 ‘엑스트렘 오리앙’을 보았고 식민주의니 제국주의니 하는 이념이나 사상은 딱 질색이었다. 그건 사치스러운 궤변에 불과했다.
오빠들과 그녀도 사이공의 프랑스계 학교에 다녔다.
그날 밤 어둠을 타고 베트민의 첩자들이 집으로 침입했고 아버지와 두 오빠는 머리에 총을 맞고 농장 배수로에 거꾸로 처박혔다. 목재로 지은 집은 불에 타서 재만 남았고 어머니는 그때 외부에 나가 있었으므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베트민의 요주의 인물이었으므로 그들의 추적을 피해서 꽁꽁 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랑린은 어쩔 수 없이 대학을 중퇴하고 나서 모진 풍파를 겪었고 사이공의 중국인 거리로 흘러 들어갔다.
그가 너무나 낯설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단도를 빼들고 목을 겨누었다는 말은 빼라고. 믿지 않을 테니까. 왜 나한테까지 뻥을 치는 거야? 형은 그럴 수 있는 잔인한 인간이 아니야. 파리 한 마리도 못 잡으면서.”
“넌…… 날 오해하고 있는 거야. 날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아니야. 절대로 아니지.”
그의 목소리는 뒤틀려있었다. 얼굴은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든 담배를 바닥에 던지면서 발로 세게 비볐다.
나는 어떤 아득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어쩔 셈인데?”
“내가 잘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지.”
“지금 상황은 너무나 명백한 거야. 눈 감고 잊어버리고 귀국하면 그만인 거지.”
“네놈이 그렇게 무자비한 인간인 줄은 몰랐네. 남의 일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잖아.”
“뭐라고……?”
“나야말로 도피자라고 할 수 있어. 나 자신으로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그러나 형은 그러면 안 된단 말이야.”
“뭐가……? 사랑하는 여인을 배신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아. 그렇게 연약하고 불쌍한 여인을 버린다면 하느님도 용서하지 않을걸.”
“이름이 랑린이지만 어쩐지 이상해. 마담이 지어준 별명이거나 가명 아니겠어?”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구태여 본명을 알 필요성을 못 느끼지. 그게 그거지. 이름 때문에 그녀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그게 궁금하더라고. 어떻게 처음 랑린을 만났는지? 그 후 이 지경이 되도록…… 어떻게 진행된 거야?”
“그냥 우연히 그 집에 들른 거야. 그때 나는 상당히 취해있었고 그래서 방에 들어가자마자 키스하려고 잡아끌었지. 그랬더니 완강하게 키스를 거절했어. 키스만은 하지 않는 게 국제적으로 화류계의 불문율이라는 거야. 그들은 그걸 좋아하지 않고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거야.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거지.
그녀가 애매하게 웃으면서 옷을 완전히 홀라당 벗었지만. 그러나 갑자기 어색하고 갑갑해지더군. 자신이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그런 비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면서 마음의 빗장이 걸리니까 전혀 발동이 걸리지 않았지.
그래서 각자 따로 떨어져 누웠는데 그녀 발톱에 칠해진 분홍색 매니큐어만 눈에 들어오는 거야. 서로 만지지도 않고 이야기하지도 않았어. 그 여자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견딜 수가 없어서 그냥 나와버렸지.
그게 처음 만났을 때 일어난 일이야.”
“본전 생각이 났을 텐데? 어떻게?”
“그런데 잊어버리려고 해도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 거야.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 섹스와는 관계없이 말이야.
그날 방 밖에서 들려온 발자국 소리, 남녀가 가볍게 속삭이는 소리, 술 취한 걸걸한 목소리, 문이 열리는 소리, 옆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 복도에 가득했던 담배 연기와 그 냄새 때문에 내가 쓸데없이 신경과민이었다는 생각도 들었지.
잊어버리려고 참았지만 일주일쯤 지나니까 찾아갈 수밖에 없었어. 이번에는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잔뜩 취해서 찾아갔지. 랑린이 나를 보더니 허물어지듯이 내 가슴에 쓰러지더라고.
그렇게 된 거야.”
그녀는 무한한 행복감에 젖어서 가볍게 신음했다. 하지만 곧바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란과 두려움 때문에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는 세 살인가 네 살인가 연상이었고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았다.
그녀의 방은 2층에 있는 유일한 방이었는데 말하자면 특실이었지만 그 방에는 침대, 협탁, 작은 안락의자가 하나씩 있고 옷장에는 화장품 세트, 향수병, 몇 벌의 속옷, ‘농라’라고 부르는 삿갓모자, 흰색 아오자이 두 벌과 검은색 바지 두 벌과 여행용 가방이 있었을 뿐이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 자신은 아편을 하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그녀는 거기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편 중독에 빠져서 폐인이 된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그걸 손댔다면 쫄롱의 그 지독한 아편 소굴에서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진즉 찌들어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오직 김정현에게만 담배를 피우도록 허락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모두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 않는 것처럼 아편도 적당히 한계를 지키면 중독에 빠지지 않았다. 그 경계선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그가 방에 들어가면 먼저 “담배 피울래요?”하고 물었고 그는 얼굴이 환하게 빛나면서 “Bon! Bon! (좋아요)”라고 응답했다. 첫 번째 담배가 가장 좋았다. 고요하고 나른한 세계로 곧장 빠져든다.
하지만 김정현은 아편을 할 때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술에 취하면 아편의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아편을 네 대까지만 할 수 있었다. 그녀가 거기까지만 허용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쉬워서 한 대만 더 피우겠다고 하면 그녀는 “Non, Non (안돼요, 안된다니까요.)”라고 거부했다.
나는 맨날 잘난 체하는 김정현에게 시비를 걸고 싶었다.
“언제는 그렇게 섹스 타령을 하더니만. 섹스와는 관계없이 사랑할 수 있단 말이지? 그게 정말 가능한 이야기야? 이건 그저 남녀 간에 흔히 있는 불장난에 불과해.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얼마든지 끝날 일이야.”
“그래서 너는 사랑을 모른다는 거지. 남녀 간에 러브 스토리는 반드시 섹스를 바탕으로 하는 게 아니야. 네 떨떠름한 표정을 보니까 내가 마치 변태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지?”
“사랑은 증오라는 말이 맞는가 보지. 자유이건 무엇이건 다 빼앗기고 사랑하는 대상에게 꼭꼭 묶이게 되니까 말이야.”
“제발 아는 척 좀 그만해. 나에겐 랑린밖에 없는 거야. 나도 떠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멀리 떠난다는 거지. 그 앨 찾아서. 이게 사랑인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람브레터를 타는 거지. 아니면 지붕에 승객을 태우는 장거리 버스를 교대로 타고서 무작정 1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거야. 월남 지도를 구했거든. 먼저 사이공으로 가는 거야. 사이공과 빈롱은 가까운 거리거든. 사이공에서 1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매콩강을 건너 가면 거기에 빈롱이 있지.
사이공에 가면 먼저 쫄롱으로 가서 여기저기 샅샅이 뒤져보는 거야. 거기서 잠시 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걔는 거기서 오래 살았지. 그러고 나서 빈롱까지 가는 거지.”

그 당시는 프랑스와 베트민 (Vietminh) 간 제1차 베트남 전쟁 기간 (1946년에서부터 1954년 7월 20일까지)이었다. 베트민은 ‘항불인민해방전쟁’이라고 불렀지만.
사이공 외곽 북쪽 독립된 지역에 있는 중국인 거리.
거기에는 사이공에서 규모가 제일 큰 재래시장인 빈떠이시장이 있고 사이공 강에 인접한 지역에는 유명한 한약상 밀집 지역이 있다. 중국인들과 베트남 사람들은 큰 시장이라는 의미의 ‘쩌런 (Chợ Lớn)’이라고 불렀지만 프랑스인들은 쫄롱이라고 발음했다.
그 무렵 세계 최고의 유흥업소라고 할 수 있는 그랑모드 콘티넨털호텔 물소공원 등이 있었고, 사이공 최고의 환락가인 도르메 거리에는 매음굴, 아편굴, 마작방, 도박장들이 널려 있었다. (차이나타운은 곧 아편굴을 연상시켰다.) 프랑스인들과 프랑스 공안, 젊은 장교들, 프랑스 육군 소속 외인부대 (Légion étrangère)의 장교들과 하사관들, 남베트남의 고위장교들, 미국 군사고문단 (MAAG)의 장교들이 씨클로를 타고 하룻밤을 즐기기 위해 모여들었다. 카바레에서는 (파리에서 십여 년 전쯤 유행했던 샹송을 부르는) 가수와 곡예사, (베트남식 프랑스어로 서툴게 재잘대는) 만담가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거기에는 여성용 바지 또는 치마를 입은 스웨터 차림의 여장 남자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노천 주점에서는 맥주에 얼음을 섞은 베트남식 얼음 맥주를 마시면서 세 개의 주사위로 하는 421 주사위 놀이를 하였다.
그곳은 정체불명의 무장한 사조직으로 여러 범죄단체와 얽혀있으면서 온갖 짓을 저지르는 빙쑤옌 부대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자행했다.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척하다가 돌연히 돌아서서 베트민을 돕기도 했다. 그들은 베트민 첩자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랑린은 대학을 중퇴하고 나서 도르메 거리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처음부터 그 집에서 근무하고 살았다. 간판은 ‘찻집’이라고 했지만 단골들이 밤낮으로 드나드는 아편을 끽연하는 업소였다. 그들은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그들은 모노륨 바닥에 칸막이를 한 작은 방에 깔린 일인용 침대에 누워서 또는 안락의자에 앉아 작고 따끈한 아편 덩어리를 돌돌 감아서 오목한 구멍에 집어넣고 불을 붙인 아편 방울이 보글보글 끓어 올라오는 담뱃대를 아주 천천히 또는 다급하게 맛있게 빨았다. (그건 옛날 정취가 물씬 풍기는 중국 남쪽에서 건너온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그즈음에는 훨씬 강하면서 먹기에 간편한 신종 마약이 즐비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 순간 쾌락과 환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김 병장이 말했다.
“지금은 전쟁이 한창이니까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고. 완전히 마비됐단 말이지. 월남 사람처럼 옷을 입고…… 하얀 파자마 차림에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샌들을 신는 거지. 그들처럼 똑같이 행세를 할 거야. 내 월남어가 어느 정도는 통하겠지.
메콩강이 꿈결처럼 흘러 흘러들어서 마침내 태평양 바다와 만나는 곳이지. 여기서부터 천릿길이 될 거야. 나는 원래 방랑자적 기질이 있으니까……. 이런 여행쯤이야.”
내가 말했다.
“거길 가는 기차도 없고 시외버스도 없단 말이지. 돌고 돌아서 가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통행증은 어떻게 할 거야?”
“음…… 통행증 같은 건 돈만 주면 얼마든지……”
“지금, 제정신이냐! 제정신이냐구? 대관절 사랑이 뭔데! 그렇게도 사랑 때문에 단맛, 쓴맛을 봤다면서……. 지금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야. 무척 똑똑한 것처럼 행세하더니 왜 그래? 무슨 덫에 빠진 거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돈이 좀 필요하지. 네가 가지고 있는 걸 전부 내놔야 할 거야. 너한테 이런 신세를 지고 싶지 않지만. 문제는 돈이야.”
“얼마만큼……?”
“도망갈…… 미리 준비를 했었지.
새로나온 마리화나를…… 그걸 미군들은 메리제인이라고 했는데 안 마담의 하수인이 넘겨주면 미군 하사에게 파는 것인데 엄청난 이익이 남는 거야. 그러니까 마담이 중간 판매책이야. 내 몫은 가격의 이십 퍼센트였지. 천 명이 동시에 피울 수 있는 양이었어.
마담이 그랬어. ‘당신은 아폴리네르를 좋아하는 시인이지요. 나는 랭보가 ’보들레르는 시인들의 왕이며 진정한 신이다‘라고 추켜세웠지만 보들레르보다는 말라르메를 더 좋아하지…….
시인은 거짓말을 할 수 없어요. 진실만을 말해요. 그러니까 믿을 수 있다는 거지요. 하지만 계산은 정확해야만 해요. 계산이 틀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지.’
내가 판랑에서 캄란만 미군 군수사령부 소속 장기복무 하사를 만났었지. 이틀 전 일이야. 거기서 현금 박치기를 하기로 한 거야. 본토 달러만 된다고 했지. 군표는 안 받는다고. 가격 조건은 내가 제시한 대로 순순히 받아들였어. 너무 순조로웠던 거야.
그런데 미국 놈을 너무 믿은게…… 탈이었어.
판랑에서 1번 국도를 수백 미터 벗어난 인적이 없는 작은 숲속 길목이었지. 내가 짚차에서 물건을 꺼내 보여주고 있을 때 그 순간 숲속에서 미군 MP가 나타났어. 헌병 신분증을 보여주더군.
한 놈은 다짜고짜 권총을 겨누었고 또 한 놈은 번쩍번쩍 빛나는 수갑을 눈앞에서 흔들면서 말이야. 이건 함정수사이고 현행범으로 체포한다는 거였어.
미군 헌병대로 연행해서 조사를 하겠다는 거야. 수갑을 채우려고 하니까 모든 게 허사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눈앞이 캄캄했지. 걔들 공갈 협박을 하더라고. 마약범은 중대 범죄라는 거지. 군법회의에 회부되면 몇 년은 살아야 한다고.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
그때 걔들 태도가 이상했어. 물건은 증거품으로 압수하겠지만 풀어주겠다는 거야. 걔들 짚차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어.
날강도들의 술수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거야.
시간이 없단 말이야. 마담은 믿지 않을 거라고. 감쪽같이 속았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북북 갈고 있겠지. 그럴 수밖에 없어.”
내가 말했다. “마담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연대 헌병대에 고발하겠지. 아편했다고…… 그러면 빠져나오기 어려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 복잡한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의 얼굴에 숨겨진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여윈 얼굴에 피로한 눈빛과 냉소적인 미소가 어려 있다. 그가 다시 마리화나를 꺼내서 피워 물었다.
내가 말했다. “귀국해서 학교를 마치고 나면 시인이 되고 학교 교사가 된다는 꿈은 어떻게 되는 거야. 곧 귀국이고…… 귀국하면 바로 제대하는데 말이야……. 얼마나 순탄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콤플렉스 때문에 여태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나는 4수 중에 입대 통지를 받았다고. 제대하면 말이야, 대학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다시 5수를 해야 한다고.”
“그랬던가? 삼수인지 사수인지…… 그건 처음 들어보는데.”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떠벌릴 수 있겠어.”
“재수가 왜 문제가 되는 거지? 나는 재수 삼수했지만 서울대를 떨어졌어. 그러고 나서…… 들어간거야.”
“내 경우에는 영장이 나왔지. 빼도박도 할 수 없었어. 형은 사랑의 불장난 때문에 상처를 입고…… 그 상처란 게 별거 아니야. 잊어버리면 되는 거지. 누군들……? 어쨌거나 현실 도피의 출구로 자원입대한 거 아냐? 월남 파병도 자원한 거고.”
“무슨 방법이 있었을 텐데?”
“다시 말하지만 형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비이성적인 감정에 휘둘리고 있는 거라니까. 이건 한 인간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야. 실수하고 있다고.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될 거야.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정신 차리라니까. 정신을…….
이건 생사가 걸린 문제……. 빈롱은 고사하고……. 천릿길이라며. 가는 도중 붙잡혀서 총살을 당할 거라고. 포로가 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거나. 자살 행위라니까. 월남 사람들 베트콩과 한통속인 거 알고 있잖아. 그들을 끝까지 속여넘길 수는 없어. 한국군을 보기만 해도 몸서리치니까 즉시 신고할걸. 그걸 알라고. 민사과에 있었으니까 잘 알 거 아냐.”
나는 평소에 쓰지 않았던 거칠고 상스러운 욕설들이 마구 튀어나오려는 순간 심호흡을 하였다. 나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솟고 아무리 짜증 나는 순간이라고 해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친구한테 욕설까지 퍼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그만 해둬.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상관없어. 이 단계에서 내 결심은 절대로 바뀔 수가 없어. 부대는 잠시 난리가 날 거야.
걱정하지 마라. 그건 잠깐뿐일 거야. 작전 중 행방불명이나 사고사로 처리하겠지. 전쟁터에서 병사가 탈영하면 부대장의 경력에 엄청 흠이 되는 거지. 진급에도 악영향을 끼칠 거고.
그러니까 헌병대나 보안대에 신고는 못 할 거야. 쉬쉬할 거라구. 수배령도 내리지 않을 거구. 그렇게 하면 탄로 나니까. 월남에서 허위 보고는 식은 죽 떠먹기지.”
“형, 알고 있기나 해. 내가 연장 근무를 신청했어. 인사계 선임하사는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했어. 조용히 기다리라고 하더구먼. 공정가격이 있는 모양이야. 난 상관없어.
형도 그렇게…… 연장이나 해보라구. 내가 선임하사를 소개해줄 테니까. 그러고 나서 다시 생각해봐…….”
“그렇겠지. 여기는 썩을 대로 썩었으니까…….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겠니. 너나 나나 빨리 귀국하고 싶지 않은 거야.
네 마음은 내가 잘 알지. 그렇게 하라구. 이건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순전히……. 내가 이대로 귀국할 수는 없다는 걸 넌 이해해야 한다. 어쩔 수가 없다니까.”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뭔가 일이 꼬여서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상황이 분명해지고 있었으므로 그 심각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헤아릴 수 없는 짧은 침묵이 그 순간을 짓눌렀다. 갑자기 뱃속이 울렁거린다. 연민과 분노와 당혹감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터질 듯했다. 나는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만 나도 모르는 새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절망적으로 말했다.
“형은 그럴 수 없어! 형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어쩔 수 없다니까……?”
“이거 신파조 아냐? 또는 말이야 순애보라고 해야 하나?”
“얘들 장난인줄 알아? 강 건너 불이야? 건방 떨지마. 나로선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심각하단 말이야. 지금 랑린은 외로운 사람이야. 그래서 많은 애를 낳고 싶어 했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더러운 전쟁통에 애를 많이 낳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무슨 수를 쓰면…… 살아갈 방법이 있을 거야.”
“무슨 방법?”
“네가 간섭할 필요는 없어.”
그의 얼굴 표정에 비장한 것이 서려 있다. 어떤 헤아릴 길 없는 깊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나는 온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잘 들어라. 어느 날 내가 감쪽같이 사라지면 그렇게 알라구. 넌, 날 말릴 수 없어. 너마저 그러면 M16으로 내 머리통을 갈겨 버릴 거니까. 악랄한 내 주인에게 총을 쏴버리는 거지.
나는 전투만 시작되면 얼어붙어 버려서 총을 한 방도 쏠 수 없었지. 방아쇠를 당기는 팔에 마비 증세가 오는 거야. 그때마다 내 얼굴은 땀과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고, 오줌을 지렸고, 몽땅 토해버렸어. 그러나 날 겨냥하고 쏠 수는 있어. 그건 가능한 일이지.
우린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 우리 서로 쿨하자고. 울지 마라. 넌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니. 넌 알고 있을 거야. 내가 한국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정말 싫지. 쓰라린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곳이지. 입대하기 전 일은 지겹고, 역겹지. 그건 악몽이었어.
전쟁터에서 그 분노를 폭발해버리면 치유가 되는 줄로 알았지만……. 그때 일들은 기억상실증에 걸렸어야 하는데…….
난 여기가 좋아. 귀국해봤자 아무것도 없다니까.”
“이제는 잊어버릴 때가 된 것 아니야. 휘파람 소리에 날려서……. 그게 아무리 과장되게 말해도 결국 풋사랑인 거지. 형은 날 쪼다 취급하고 도사처럼 굴면서 왜 그래?”
“남의 일이라고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겠지.”
“형이 가버리면 그 멋진 휘파람 소리라든가…… 이제는 너무 들어서 질리기는 하지만 그 시들 말이야, 어떻게 되는 거야? 어디서 들을 수 있겠어. 형은 모르겠지만 그게 나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거든.”
그가 창백하게 굳었던 얼굴이 풀어지면서 느닷없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듯이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도망가는 게 아닌 거야. 내 길을 찾아가는 거지. 자기 자리를……. 여기에 처박혀 넉맘 냄새를 실컷 맡으며 살고 싶은 거야. 이 난리 통에 가능할지 모르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이별의 시를 들려주어야 하겠구나. 그동안 네가 유일한 청중이었어. 나는 단 한 사람만 필요했거든.
그 시인은 평생 동안 콤플렉스를 안고서 불우한 삶을 살았는데 젊은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했지.

내 언젠가 히스나무 이 가녀린 가지를 꺾어 두었지
가을도 가버렸으나 잊지는 말아라
우리는 이 땅에서 다시 보지 못할 거야
시간의 이 향기 히스나무의 이 가녀린 가지
그래 내 너를 기다리니 잊지는 말아라”

그가 천천히 속삭인다. 그 억양이 가볍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그녀를 감싸 안아서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대학 불문과를 3년간 다녔고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들은 거의 전부 완벽하게 암송할 수 있는 남자. 젊은 날의 통과의례에 불과한 첫사랑의 상처 때문에 죽고 싶도록 고통을 느꼈고 그래서 일찍 군에 입대했고 또다시 월남전에 자원했던 남자. 시인이 되고 시골 벽지에서 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던 남자. 문학적 재능이 있는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에게는 너무나 융통성이 없었던 남자. 아무리 자신이 타락한 인간처럼 위악적으로 과장되게 이야기해도 그걸 믿을 필요는 없는 남자. 그러나 인간을 향해 총을 쏠 수는 없었으나 자신의 머리에는 감히 총을 쏠 수 있다고 자신했던 휴머니스트.
메콩강의 강폭이 한없이 넓어지고 강물이 유장하게 흐르는 메콩강 삼각주의 빈롱에서 천리길을 거슬러 올라가, 거대한 미군 군수기지가 있던 깜란 만 입구의 집창촌인 수진 마을까지 흘러들어온 영혼이 맑은 여자.
그는 여자의 갈색 피부를 쓰다듬고 그녀의 불타는 듯한 눈과 얼굴 위로 자신의 얼굴을 덮는다. 그는 그녀의 눈 깊은 곳에서 빛을, 구원의 빛을, 어떤 계시를 발견한다.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하다고, 그는 그렇게 다짐한다. 그는 이제 지껄이지 않는다. 희망과 욕망, 탐닉이 묘하게 섞여 있는 격정적인 몸부림에 자신의 몸을 맡긴다. 그는 그 순간 아무것도 생각해서는 안 되리라. 여기 밀림에서는 의식은 가물가물해지며 몽롱할 뿐이다. 꿈도 꿀 수 없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고통도 벌써 희미해져 버렸다. 그때는 죽음을 갈망했었는데. 모든 추억이 사라져버렸다. (민들레가 피어있는 논둑길. 따뜻한 봄날의 햇빛. 흰 구름. 냇가. 소녀. 사랑. 입술. 이별. 불면하는 밤들. 침묵. 망망대해. 무인도. 미완성인 한 묶음의 원고들.)
오직 군화와 철모, M16 소총, 수류탄.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생각한다. 나는 소진되어 버렸는가? 도피자인가? 이미 사라져 버렸는가?
밤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곡사포의 포탄 터지는 소리가 밤의 유령이 토해내는 괴성처럼 아득히 들려왔다.
그때의 생생한 장면, 대화 내용, 내 가슴 속에 각인된 김 병장의 비장한 얼굴을, 그의 의지를, 욕망을, 내가 느껴야 했던 그 무력감을 어찌 오랫동안 잊을 수 있었겠는가. 날카로운 가시 면류관을 쓴 채 피를 뚝뚝 흘리는 김 병장의 모습이 그 후 한 세대 동안이나 자주 꿈속에 나타났다. 그런 게 아니라 나타났다고 생각하였다. 김 병장을, 그를 끝내 붙잡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나의 강박관념이었으니까. 나는 한때 그 강박관념을 몰아내기 위해, 망각을 위해, 알코올 의존자가 되어 살아야 했다. 매일 알코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김 병장은 내가 술을 제대로 못 마신다고 엄중하게 단죄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술이 얼큰하게 취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술고래인 김재수 하사가 먼저 생각났다. 나는 김 하사의 알코올 의존증 같은 술 마시는 습관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어느 새 따라하기 시작했다.
만취해서 인사불성이 되고 머릿속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면. 필름이 완전히 끊겨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길에서 왝왝 토하는 일 외에는 항상 말짱했다. 도대체 취해지지가 않았다. 술은 나를 유치한 감상에 젖게 만들어서 결국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술이라면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계속 마셨지만 말이다.

빈롱. 수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밀림의 가장자리 얕은 언덕에 있는 랑린의 집 (마을에서도 조금 떨어져서 그 오두막은 홀로 서 있다.)에서 멀리 메콩강 삼각주와 유장하게 흐르는 누런 강물이 내려다보였다. 밤이 깊어 가면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내가 말했다. “김 병장은 어디에 갔지? 메콩강에? 들판에? 바다에? 난 김 병장을 만나러 왔지. 아주 멀리서 말이야. 죽고 싶도록 보고 싶었거든.” 그녀가 말했다. (그 목소리가 감정이 배어 있지 않은 기계음처럼 들렸다.) “그는 죽었어요. 틀림없이 죽었단 말이에요. 모르겠어요? 여기에 오지 않았어요. 아마, 민병대 또는 베트콩한테……. 아니에요, 아니. 그는 안 죽었어요. 내 가슴 속에서 살아 있지요.” 내가 말했다. “그럴 리가.” 그녀가 깔깔거리며 말했다. “그만 잊으세요. 잊어……. 나는 지금 외롭고 힘들어요. 죽을 맛이에요.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 주세요. 제발.”
내가 물었다. “뱃속에 아이는 어떻게 됐지?”
그녀가 말했다. “아이는 죽었어요.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병원에는 의사도 없고 약도 없었어요. 그렇지만 김정현의 자식이 틀림없다니까요.”
그 순간 깨달았다. 그녀와 나, 살아있는 사람들은 이제 그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엄연히 살아있고 그녀와 나는 각자의 삶이 있다. 그리고 문득 이미 오래전부터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그를 잊기 위해서, 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심전심으로 암암리에 공모자가 되었다. 그녀는 이제 울지 않는다. 침묵이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그녀의 까만 머리, 까만 눈, 잘록한 허리가 은근히 유혹적이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 얼굴을 만지게 해주세요. 나를 꼭 껴안아 주세요.”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나는 갑자기 그녀를 억세게 끌어안고 나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나의 혀를, 빨간 혀를 그녀의 입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 키스를 하였다. 나는 짚으로 된 푹신푹신한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그녀가 노래를 했다.

메콩강은 알고 있다네 강물은 깊어라 슬픔도 깊어라 강은 시시로 변하네 아침에 푸르던 그것이 저녁이면 핏빛으로 물드네

강 쪽에서 거대한 잿빛 구름이 몰려오고 잠깐 동안 천둥 번개를 동반한 지독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새벽의 희붐한 여명이 창문으로 밀려들 때쯤 밤늦게까지 뒤척이다 겨우 눈을 붙인 잠에서 깨어났다. 계속 뒤숭숭한 꿈만 꿨다. 너무 오랫동안 김 병장을 잊고 지냈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고 랑린은 살아있고 잘 있는지 그녀가 궁금했다.
작성일:2023-06-30 10:46:52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