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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중편선> 시인의 죽음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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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6-05-26 11:02:55
조회수
1402
“이 소좌는 몹쓸 짓을 한 거요. 잔인하고 비열하지요. 나는 단지 수치심과 끝없는 모멸감을 느낄 뿐이요. 그래 부끄럽지도 않소?”
“어쩔 수 없었지요. 위대한 공화국의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단 말입니다. 공산주의 대의 앞에서 그런 건 사소한 일에,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요. 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후회하면 안 되겠지요. 그때 우리 집 전 재산도, 모든 논밭과 정미소, 대궐 같았던 집까지 몰수되었습니다. 그런 후, 그러니깐 토지개혁 법령이 시행되면서 부친과 모친, 다른 가족들은 감쪽같이 남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은 절 남기고 갔지요.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부터 가족과의 관계가 계속 심각하게 삐걱거렸거든요.”
그 순간 시인은 그녀를 반박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선생님은 시인이지요. 그것도 서정 시인이지요. 지금 우리 현실이 그렇게 한가한 것인가요. 조국의 현실을 직시해야지요. 선생님은 지금 낡아빠진 자본주의 사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인이 아니죠. 공산주의 여전사일 뿐이지요. 그래서, 직설적이고 도전적입니다. 그리고, 열변을 토해내야만 직성이 풀리지요. 그러니까, 반어법과 은유, 섬세함, 의도적인 모호한 대화 같은 것은 저와는 어울리지 않지요.”
그녀는 시인으로부터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 자기 신념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안달을 하였다. 그녀는 그 순간 스스로 공산주의의 마술적인 힘을 의식했던 것이다. 그녀는 공산주의 이념의 승리를 쟁취하려는 광신적이고 초조한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그녀의 빨간 혀가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본론을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결론을.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참으로 비참하였지요. 자본가들이 그들을 속여먹고 턱없이 낮은 임금을 지불하고 가혹하게 착취하기 때문이었죠. 그러니까 공산주의 혁명과 계급투쟁이 필요하고 자본가들이 완전히 말살될 때까지 임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한 것이지요.”
“정말로 일찍이 없었던 태평성대 요순시대가, 지상낙원이 도래한단 말이군요. 그러나 역사의 법칙은 무자비한 것이요. 너무 유토피아적이라고 생각지는 않소? 공산주의자는 전부 낙관주의자이고 신비주의자인가요?”
“말하자면 그렇지요. 자본이 주인이 되는 사회, 돈이 좌지우지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사회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계급이 사라지고 결국엔 전쟁이 사라지고, 우리는 모든 사람이 오순도순 즐겁게 잘 사는 아름다운 집을 지을 거예요.”
“그러면 뿌리 깊은 자본주의 폐해가 이 지구상에서 일소될 수 있단 말인가요? 그게 정말 가능한 것인가요?”
그녀는 계속해서 연설을 하는 연사처럼 열정적으로 말을 하였다. 사실 지금까지 이 소좌가 말한 내용은 그녀가 학교에서 총화 시간이나 공산주의 윤리 시간이면 열렬히 주장했던 내용이다.
시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와 종교는 왜 상극인 거요? 공산주의도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인데, 그게 종교를 배척할 이유가 무어란 말이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님도 공산주의자 아니겠소?”
“그건 선생님이 유물사관을 오해한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하느님은 없다는 무신론입니다. 신은 인간이 만든 관념적 존재로서 지배계급의 악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인 것입니다. 지금 북조선의 유일한 종교는 무신론입니다. 무신론의 성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이고, 이 종교의 위대한 예언자는 레닌이고, 스탈린이고, 모택동이고, 김일성 장군님입니다.”
“이 소좌는 공산주의 귀신에 완전히 홀린 것 같소이다. 영원히 깨어날 것 같지 않소. 진정한 공산주의자란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소.”
“공산주의 사회에 엄청나게 큰 꿈을 갖고 있지요. 장군님이 반드시 그 기초를 닦을 거예요. 어머니가 하나님을 믿듯이 열렬하게 그걸 믿고 있지요.”
“이 소좌는 김일성 장군이 구세주나 되는 것처럼 떠받드는군요.”
“그렇지요. 장군님은 또 하나의 새로운 구세주이지요.”
“진정한 구세주가 될지는, 아니면 새로운 사이비 종교의 창시자가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요. 환상일지도 모르잖소? 그가 우릴 배반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요. 하여간에 말씀을 계속하십시오.”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지요. 미래는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믿어야 하지요.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요. 철두철미하게 믿어야 하지요. 장군님의 신념과 의지를 믿어야 하지요. 의심하고 회의하고 불신하는 것은 종파 분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선생님, 이제부터 결론을 내리게 해주세요. 공산주의 사회는 지구 최후의 지상낙원이 될 것입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술기운은 진즉 멀리 달아나 버린 후였다. 조금 날카로운 얼굴선과 얇고 단단한 입술을 지닌 진지한 공산주의자의 얼굴에는 단단한 각오와 긴장된 의지가 배어있다. 그녀는 당당했다. 이 소좌는 들뜬 기운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그녀는 시인에게 쉴 새 없이 얘기를 계속하였고 그는 그녀의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그러나 시인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서 할 말을 잊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무언가 통렬하게 반박하려 하였지만 그녀의 광신적인 신념과 집념이 무서워 그만두었다. 어차피 소용없는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거침없이 몰아붙이리라. 무력감을 느꼈다. 어떤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을 뿐이다.
그들은 평양 인근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쾌청했고 하늘은 푸르렀다. 평양까지 허허벌판이 이어지고 있었다. 낮은 구릉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을 뿐 시야를 가로막는 큰 산은 없었다. 마침 추수가 끝나서 마른 볏짚단이 여기저기 서있는 가을 들녘은 엷은 회색이어서 너무 황량하였다. 그러나 대동교 밑으로 대동강 강물은 맑고 푸른 물이 느릿느릿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다. 강 주변의 길과 언덕에서는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나뭇잎들이 벌써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평양은 아비규환이었다. 미군과 국군은 물밀듯이 진격하고 인민군은 무질서하게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으며 연일 쏟아지는 미군의 포격과 폭격으로 시내에는 성한 건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아니 하였다. 폭격을 당한 건물들은 천장과 벽들이 허물어져 위태롭게 서있었으며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매일 미군 정찰기가 인민군의 투항을 권유하는 삐라를 평양 시가지에 뿌려댔다.
폐허가 된 거대한 도시.
도시 전체가 잡동사니 쓰레기 더미에 묻혀 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매캐한 화약 냄새가 진동하였으며, 거리 이곳저곳에는 치우지 못해 썩어가는 시체들이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몇 명의 인민군 병사 시신이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 누워 있었고 길 아래쪽에는 폭격으로 반 토막이 난 전신주 밑에도 다른 병사의 시신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이곳저곳 전봇대에는 여전히 ‘김일성 만세, 인민군 만세’ 따위의 글을 휘갈겨 쓴 벽보가 나부끼고 있다.
이제 평양은 연합군의 점령이 시간 문제였다. 평양 방어선은 붕괴되었다. 국군과 연합군이 이미 대동강 남쪽을 점령하고 나서 평양 시내 진입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쉴 새 없이 포격과 폭격이 이어졌다. 섬뜩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불꽃과 함께 떨어진 포탄들로 인해 거리는 회색 연기가 휘감고 있었다. 밤에는 탐조등 불빛이 예리하게 도시의 하늘을 가르고 있었고, 예광탄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 하얀 빛을 그리며 떠돌았고, 폭격으로 인한 섬광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고 있었다. 북한 최고 당국과 권력층은 진즉 평양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 땅인 통화로 옮겼다는 확실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상황에서 평양으로 들어갈 수도,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정치보위부도 찾을 길이 없었다. 최후까지 평양을 사수하였던 최고사령부 직속 근위여단 역시 북으로 후퇴한 후였다. 근위여단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평양형무소의 양쪽에 감방이 다닥다닥 늘어서 있는 긴 복도에서 포로와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즉결처분한 후 시체도 치우지 않고 마지막으로 철수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평양 진입을 포기하고 동평양 외곽을 우회하여 순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막 넓은 도로를 건너서 논둑길로 접어들 참이었다.
이 소좌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엎드려요.”
그는 여전히 엉거주춤한 채로 서있다.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폭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한순간이었다. 강렬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화염이 일어나고 땅에 구덩이가 파이고 흙먼지가 풀썩이면서 얼굴을 때렸다. 흙먼지가 솟구치는 곳에서 금속성 파편이 튀어 흩어졌다. 잠시 동안 숨을 쉬려고 해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폭탄 하나가 소리도 없이 날아와 바로 근처에서 터진 것이다. 두 번째 폭탄은 땅 속으로 처박히면서 먼지더미가 피어올랐지만 불발탄이었다.
다행히 시인은 코피가 터지고 얼굴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것 이외에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인의 얼굴은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리가 눈에 띌 만큼 후들거리며 걸음걸이가 휘청거렸다. 폭탄 연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기침을 하였고 계속 가래를 땅에 뱉어냈다. 폭격기 편대가 하늘을 갈라놓을 듯한 날카로운 굉음을 내며 높은 고도로 치솟더니 남쪽으로 사라졌다. 폭격기는 멀어져 갔지만 윙윙거리는 금속성 굉음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시인은 아직도 가슴이 찢어질 듯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얼굴과 온몸에는 땀이 흘러 흥건히 젖어 있었다. 시인은 한동안 멍했지만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순간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지만 다시 모든 것이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녀의 손에 어느새 쏘련제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유유히 사라져가는 전투기를 향해 권총을 휘두르며 악에 바쳐서 거침없이 소리를 질렀다.
“쌍 간나 새끼들. 개새끼들, 미제 개새끼들. 죽일 놈들.”
그리고, 다시 핏발이 선 눈빛으로 시인을 쏘아 보았다.
“폭탄에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죽지 그랬어요. 차라리 그 편이 나아요. 그렇게 보고만 하면 그만이죠.”
한참동안 숨을 고른 후, 이 소좌가 또다시 몹시 재촉하였다.
“그것들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몰라요. 어서 떠나야 하지요. 몸을 추슬러야 해요.”
그들은 논둑을 지나 앙상한 나무들이 서있는 언덕 밑 좁은 길로 들어서서 계속 걸었다. 소나무들이 우거진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면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다음날은 새벽부터 바람이 거세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이런 날은 폭격기도 쉬었다. 잠시 비가 그치자 강에서부터 피어오른 잿빛 안개가 들판과 산허리를 감쌌다. 안개는 다시 비가 되어 내렸다. 바람은 꽤 가라앉아 있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밤이 빨리 찾아왔다. 밖에는 계속 안개비가 내리고 있다. 그저 깜깜한 어둠과 가는 빗줄기만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비어있는 외딴집에서 며칠을 마냥 보냈다. 그들은 녹초가 된 상태에서 온몸이 쑤시고 아팠고 처량하기 짝이 없는 자신들의 딱한 처지 때문에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10월 하순이 되자 북쪽에서는 날씨가 벌써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더기 옷을 걸친 채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터벅터벅 걸어서 다시 강계 쪽으로 가야 했다. 이 소좌는 처음에는 후퇴하는 인민군은 영변이나 박천으로 집결하라는 최고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그 쪽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그곳도 미군의 공습이 심해 후방사령부가 있는 강계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북쪽으로 계속 후퇴하는 인민군 낙오병들이 그러한 사정을 이 소좌에게 알려주었다.
이 소좌가 말했다.
“여기는 평안남도 순천입니다. 안주가 바로 위에 있지요. 우린 지금부터 군우리를 지나서 후방사령부가 있는 자강도 강계 쪽으로 가야만 합니다. 거리가 여기서 300킬로미터 쯤 되겠지요.”
“강계에 가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녀가 화가 나서 신경질적으로 대답하였다.
“저도 알 수가 없어요! 아시겠어요? 모든 게 불확실해요! 저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임무를 완수하는 게 중요하지요. 마음이 약해져서 어딘가에서 그냥 주저앉고 싶은 거지요. 도망치고 싶은 거겠지요. 그건 안 되지요. 안전한 곳은 없어요.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는 내가 결정합니다. 내가. 우린 가야만 하지요. 끝까지 걸어야 하지요. 강계로. 그것만은 분명하지요.”
“지금도 북조선의 승리를 믿고 있소?”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시라요! 전쟁이란 승리 아니면 패배이지요! 하지만 이 전쟁에서 진다면 혁명의 대의도, 공화국도, 저도 사라질 것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하겠지요.”
“유엔군이 지금 올라오고 있어요. 이 소좌는 잡히면 어떻게 할 생각이요.”
“난 잡히지 않아요. 절대로. 그러나 잡히는 찰나에는 총을 쏴 죽여야겠지요. 아시겠어요? 권총과 탄알 20개가 들어 있는 탄창이 있단 말입니다. 다 써야지요.”
“왜? 그때는 목사를 직접 집행하지 아니하였소?”
“매우 비꼬시는군요. 그때는 제게 총이 없었지요. 만약 총이 있었다면 단번에 가슴에다 대고 쏘았겠지요. 그러면 목사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동그라졌겠지요. 그리고 전 머리통에 대고 최후의 한발을 쏘았겠지요. 확인사살이 필요하니까요. 열렬한 혁명전사이니까요. 아시겠어요!”

순천을 지나서 강계로 가는 도로는 참으로 참혹하였다. 미군의 공습을 당한 인민군 트럭들이 수백 미터 간격으로 불에 타고 있었고, 인간의 뼈와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길바닥에는 팔다리가 끊어지고 창자가 쏟아져 나온 병사들이 버려진 채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살려 달라”고 허공에 대고 울부짖었다.
이 소좌는 시인을 이끌고 도로를 건너고 폐광촌을 지나서 깊은 산속 길로 접어들었다. 그들은 나무가 우거진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갔다가, 올라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지만, 다시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을 조심스럽게 내디디면서 갈색 솔잎으로 뒤덮인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소나무의 제일 위쪽 가지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찍찍거렸다. 다람쥐는 납작하게 엎드려서 작은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재빠르게 휘젓고 있었다. 그들은 숲속에서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며 꾸준히, 천천히 길을 걸었지만, 이젠 길을 걷는 게 너무너무 지긋지긋하였다.
다음날 밤은 하늘은 아주 맑았고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높은 산들은 어둠 속에서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위쪽에는 바람이 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흘러갔다. 계곡에서는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구슬픈 올빼미 울음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는 깊은 산골짜기에서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좁은 길은 계속해서 올라가거나 내려가며 그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밤길을 더듬어 찾아가보니 다 쓰러져가는 작은 오두막이었다. 늙은 할머니와 반벙어리인 할아버지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여긴 일 년 내내 사람 구경을 할 수가 없디요. 그저…… 산삼 캐러 다니는 심마니들이 가끔……. 그런디 행색이 심마니 같디는 않구먼. 이 밤중에 무슨 일루다?”
“할머니…… 전쟁이 일어났어요.” 시인이 말했다.
“뭐라구 했수?”
“전쟁이…….”
“우리네는 그런 것 도재 모르디.”
할머니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디…… 배가 고프디는?”
“할머니…… 먹을 게 좀 있나요?”
“드려야디요. 귀한 손님인디…… 근디 쌀밥은 없디요. 우리도 쌀밥은 일 년에 한 번씩…… 설날에만 구경하디요. 보리죽이나 강냉이죽만 먹디요.”
할머니는 전쟁이 일어난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왜 그런 행색으로 도망을 다니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지도 전혀 묻지 않았다. 그들은 동치미 국물에 꿀맛 같은 강냉이 죽을 배불리 먹었고, 아침이 되자 족히 일주일은 먹을 수 있는 강냉이 가루를 얻어서 다시 길을 나섰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높은 산 위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한가하게 떠 있었고 숲속의 대기는 상쾌하고 따뜻하였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다. 그들은 모처럼 기분이 좋았고 기운이 넘쳤다. 이제 전쟁은 그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소풍이나 나온 것처럼 주변 경치를 음미하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머나먼 강계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이 소좌가 말했다. “우린, 별세계를 왔다가 가는군요.”
“그런 것 같소이다.”
시인은 삼팔선을 넘을 무렵부터 벌써 다리의 부종 때문에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오랫동안 걸으면서 다리가 심하게 부었고 그 부분에서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져 무릎을 제대로 구부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신발 속으로 부어오른 발이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맨살이 드러난 발은 늘 젖어 있다. 그러나 이 소좌가 응급 구호조치를 취하고 비상용 항생제를 투여해서 그럭저럭 견디고 있었다.
겨울이 닥쳐왔다. 그들은 때 이른 거친 눈보라와 씨름해야 했다. 처음에는 눈발이 조금씩 흩날렸다. 눈은 땅에 닿기를 주저하기라도 하듯 줄곧 머뭇거리다 춤을 추듯 내려왔다. 그러나 늦은 오후가 되면서 눈보라는 강풍을 동반하였다. 대기는 휘날리는 하얀 눈으로 가득 찼다. 대지도 꽁꽁 얼어붙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소좌가 징발한 두툼한 솜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어서 견딜 만했다. 다만 발이 꽁꽁 얼어붙어 감각이 없었다.
중공군의 참전과 기습공격, 인해전술로 인해 전세는 역전되고 있었다. 도로마다 남으로 철수하는 군용 트럭과 온갖 종류의 차량들,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트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트럭에 타고 있는 병사들의 표정이 피로에 지치고 우울해 보였다. 그들은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가 중공군에 밀려서 남으로 후퇴하고 있는 중이었다. 초라한 행색의 피난민들이 그들의 모든 재산을 실은 수레를 끌고 내려갔다. 혼란은 시작도 끝도 없었다. 이제는 중공군이 전선을 장악하고 있었다. 운산과 군우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중공군은 평양을 회복하고자 남으로 대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밤이면 밤의 정적을 뒤흔드는 중공군의 꽹과리와 피리소리, 호루라기 소리와 나팔소리가 숲속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깊은 밤 무당집에서 들려오는 굿판의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공포심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그것은 중공군의 공격 개시 신호였다. 그리고 나서 중공군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자주 고류노프 중기관총을 끌고 남으로 밀고 내려가는 인민군과 중공군의 혼성부대와 격자무늬로 두툼하게 누빈 방한복을 입고 수류탄과 따발총으로 무장한 인민군 수색대와 조우하였다. 그들이 험악한 얼굴로 총을 겨누고 위협하였다. 금방 방아쇠를 당길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이 소좌의 신분을 확인하고 통과시켜 주었다. 이 소좌는 민족보위성 최고사령부가 발급한 군관 신분증과 비밀경찰인 정치보위부의 신분증, 당원증 등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밤은 둘 다 몹시 피곤해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중강진에서 다시 평양 외각 북쪽의 원장리로 이동한 후였다. 그들이 처음 목표로 삼았던 강계 역시 미군의 심한 공습에 견디지 못하고 후방사령부가 통화로 옮겨간 것을 알고 강계 근처에서 다시 양강도의 중강진 방면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은 심한 산악지역으로 여전히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장리 마을은 농가 대부분이 심한 폭격으로 지붕들이 무너져 있었고, 골목의 나무들마저 폭탄 파편에 나무껍질이 깎여 있었다. 그들은 주인이 피난가고 없는 빈 농가의 천장이 허물어진 헛간에 누워버렸다.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잠은 좀처럼 오지 않는 그런 밤이었다. 잠을 자려고 애쓸수록 더욱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느새 밤의 정적이 주위를 감쌌다. 그날 밤에는 폭격기의 굉음이나 폭격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부드러운 달빛이 은색의 엷은 천으로 찢겨진 산천을 뒤덮고 있었고, 달이 이지러지면서 달그림자가 점차 더 멀리 산 너머로 물러났다. 밤은 자신의 수많은 별들을 잃어버렸다. 암청색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 오면서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 대동강에서부터 피어오른, 바람에 갈기갈기 찢겨지고 흩어지면서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 밤안개가 어느새 산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그 시들은 왜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렇지요. 감상은 혁명에 금물인데 시인을 만나니 어쩔 수 없이 감상주의에 빠져 버렸네요.”
그녀의 검게 탄 긴 목이 감각적이었다. 그녀가 구리 반지를 낀 가는 손가락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녀의 눈에 맺혀있는 이슬 같은 눈물이 여린 달빛 속에서 보였다.
“곧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삼팔선에서부터 시작하여 두 달 반 동안을 함께 이 산천을 헤맸군요. 평양에서 순천, 강계를 거쳐서, 청천강을 건너서 중강진까지, 중강진에서 다시 평양까지는 근 두 달 동안 천릿길을 걸었지요. 드디어 평양에 도착하였네요. 선생님은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때로는 화도 내고 신경질도 부렸지요. 위협하기도 하고 강요하기도 하고. 저는 잔인한 납치자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였으니까요. 저도 무척 힘들었답니다. 그러나 어려운 고비가 많았지만 천우신조로 우린 살아남았지요. 가끔 밤이면 농가의 헛간에서 불을 활활 지펴 놓고 앉아 많은 얘기, 심각한 얘기, 열띤 얘기를 주고받았지요. 때론 밤을 하얗게 새기도 하였지요. 그땐 선생님이 그랬죠. ‘벌써 날이 밝았군.’ 영영 이별하는 느낌이 드는군요. 건강하시게 오래오래 사시라요. 그리고 말입니다. 정치보위부는 험한 곳이에요. 조사를 잘 받으시고 풀려나시라고요.”
그녀가 계속 말했다.
“시인을 호송하는 임무는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지요. 그것도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을 맨몸으로. 저는 재편성되는 부대와 함께 하루라도 빨리 전선으로 가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지요. 부대 재편성도 불가능했고, 모두들 북쪽으로 도망가기에 바빴지요. 어쩔 수 없었던 거지요.
이런 밤에는, 이별의 밤에는 이별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야 하는데, 목이 마르군요. 한 잔의 술이 간절하지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날이 밝으면 떠날 것입니다. 정치보위부가 인수할 거예요. 저는 새로 편성되는 부대로 가서 다시 전선에 배치되겠지요. 전선에는 총알이 핑핑 소리 내며 막 날아오지요. 총알이 가슴에 박히면 죽겠죠. 폭탄에 맞아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 그러나 혁명의 대의를 위해 죽는다면 영광이죠. 그래도 울고 싶군요.”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달빛 속에서 그를 쳐다보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언제가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여인의 육체는 왜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인가! 그녀는 틈나는 대로 가끔 머리를 매만지고 얼굴에 살짝 분을 바르지 않았던가. 지금 풀어헤친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면 여체의 시큼한 체취와 함께 여인의 짙은 향기를 맡으리라. 나는 도취되어 온몸으로 환희를 느끼리라. 따스한 체온을 느끼리라. 그러면 그 열기 같은 따스함이 내 가슴 속으로 전해지고 내 영혼 전체에 나른하게 퍼지리라.
시인은 그 순간 고달팠던 지난 나날들이 하나씩 하나씩 되살아났다. 그것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오랫동안 명멸하다가 언젠가는 먼 과거 속으로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시인은 그만 목이 꽉 메었다. 그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희미한 어둠 속에 눈을 살포시 감고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뒤돌아보았다. 그녀가 돌봐주지 않았다면 그 험난한 여정에서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터였다. 그녀는 어머니였고, 사철 발 벗은 아내였고, 누나였고,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였고, 그녀의 아련한 눈빛이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연인이었다.
시인은 목이 쉰 것처럼 목구멍 깊은 곳에서 그르렁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래 너무 고마워.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부디 살아남아라! 살다보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선하면 아니 올세라…….”
더욱 짙어진 안개 위로 검은 실루엣 같은 산봉우리와 하늘이 먼 풍경처럼 아득히 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안개가 흩어지고 있었다. 곧 새벽이 열리리라. 하늘은 높고 태양은 대지 위에 뜨거운 빛을 쏟으리라. 이 얼어붙은 침묵의 대지는 봄이 오면 다시 만물의 생명을 회생시킬 것이다. 고사목에도 새싹이 돋고 꽃이 만발하고 초록의 세계가 싱그럽게 펼쳐질 것이다. 아무리 잔인한 전쟁도 대지의 생명력을 짓밟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부활과 순환. 그러면 인간들의 찢겨진 영혼은 진정되고 육체는 위안을 받을 것이다.

정치보위부, 김규진 중좌
평양 시내는 여전히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폭격기 편대가 은빛 날개를 반짝이며 날아와서 폭탄을 이곳저곳에 쏟아붓고 사라졌다. 거의 전파되다시피 한 시가지에서 연기와 불길이 타오르고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였다. 평양 곳곳에 세워졌던 미군 보급소에서는 퇴각하면서 미처 가져가지 못한 막대한 양의 군수품과 기름들이 불에 활활 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검은 연기와 화염에 휩싸인 시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무렵 평양 방송국과 조선 로동당보에서는 용맹한 중국 의용군 전사들과 북조선 인민군들이 합세해서 남한의 전 지역으로 다시 물밀듯이 내려가고 있으므로 이제 조국통일은 시간문제라고 끊임없이 선전을 하고 있었다. 그때 평양은 북조선 당국과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의 참전에 의해 남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러나 평양은 물론이고 북한 전 지역이 폭격과 식량난으로 시달리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장티푸스가 발생하여 무서운 기세로 번지고 있었지만 평양의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서 가두검문과 가택수색이 심하였다.
하늘에는 음산하게 보이는 시커먼 구름이 떠다녔다. 그 둔탁한 납빛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면서 자꾸만 모습을 바꾸었다. 구름들이 달아나고, 다시 만나서 뭉치고, 또다시 갈라졌다. 춥고 스산한 겨울바람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도시를 휩쓸었다. 하늘이 점점 내려앉았다. 어느새 하늘은 완전히 먹구름이 끼었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1950년 겨울은 잔인한 겨울이었다. 비망록에 의하면 시인이 보위부에 정식 인계된 날짜는 12월 20일이다.
정치보위부 건물은 옛날 일본 헌병대가 평양 분실로 쓰던 낡은 벽돌 건물이었는데 그나마 본관 건물은 끝없는 공습으로 철저히 파괴되어 그 잔해만 남아있어서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본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별관과 그 주위 지하실 등은 철저하게 위장을 한 덕분에 미군 폭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 둘레에는 덤불 속에 숨겨진 채로 이중삼중으로 철조망을 쳐 놓았다. 건물은 낡고 칙칙하였다. 그 건물의 지하실 좁은 독방에 그는 임시로 감금되었다. 두 팔을 쫙 벌리면 양쪽 손가락이 벽에 닿을 만큼의 폭이었고, 바닥에 드러누워 팔을 위로 올리면 손끝이 닿을 정도의 길이였다.
그 독방은 어둡고 우울했다.
벽은 습기에 차있고 사람의 손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의해 매끈하게 닳아 있었다. 12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벌써 한겨울이어서 난방이 되지 않은 지하실 방은 지독히 추웠다. 걸레처럼 너덜거리는 낡은 매트리스 밑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고 지독한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였으며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가슴이 고통스러울 만큼 쿵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한 갈증과 폐쇄공포증이 그를 덮친 것이다. 그는 축축한 냉기 속에서 밤을 지내다가 낮이 되면 그 건물 2층의 심문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 방은 북쪽으로 작은 창이 나있었고 늘 그늘이 져있어서 벌써 창에는 두껍게 성에가 끼어 희뿌옇게 보였다. 초겨울 내내 햇빛은 오전 잠깐 동안만 비스듬히 비추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처음에는 하급 군관이 매일 비슷비슷한 질문을 하고 그 역시 건성으로 대답을 하였다. 전투기의 폭음 소리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들렸다. 그러자 새로운 군관이 와서 심문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였다. 그는 고위 간부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턱이 각진 얼굴은 검은 편이고 살이 쪄서 통통하고, 행동은 유들유들하고 거들먹거리고, 그리고 말쑥하게 인민군 정복을 입었으며 중좌 계급장이 어깨에서 번쩍거렸다. 그가 계속 시인의 얼굴을 날카롭게 뜯어본다. 심문자의 목소리는 정중한 것처럼 들리지만 벌써부터 날이 서있었다.
“지금부터 본관이 직접 조사할 것이오. 진실만을 말하시오. 그리고 반드시 존칭어를 쓰기 바라오. 공화국 고급 군관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기 바라오. 나를 먼저 소개하는 것이 순서겠지요. 나는 정치보위부 문화부 소속 김규진 중좌요. 동무를 조사키 위해 특별히 선발되었소. 본인은 로동당 선전선동부에서 남조선의 문화예술인들을 북으로 초대하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전쟁 통에 이곳으로 차출되었소. 하여간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협조적으로 우리 잘해 봅시다. 내가 오기 전에 하사관들이나 하급 군관들이 동무에게 지나친 행동을 했다면 용서하시오. 그건 공화국의 뜻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나는 동무에 관한 기록을 샅샅이 훑어보았고 지금 북에는 남조선에서 올라온 문인들이 부지기수요. 그들이 이미 많은 증언을 하였소. 단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조사하는 것일 뿐이요.”
“저는 거대한 음모자가 아닙니다. 제가 숨길 게 무어가 있겠습니까. 오직 성실하게 답변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겠지. 동문서답을 하면 안 되겠지. 그러면 내가 마구 화를 낼 것이요. 동무 담배 한 개비 피우시라요. 그리고 커피도. 이 커피가 이 난리 통에 얼마나 귀한지를 동무도 잘 아시겠지요. 커피는 역시 미제가 최고이지요. 동무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 잘 협조해서 조사를 끝마치기로 합시다. 동무, 안 그렇습니까?”
그들은 함께 커피를 마셨다. 얼마만인가. 뜨거운 커피는 진한 회색빛이었고 달콤하고 쓰디 쓴 향내가 코끝을 맴돌았다. 그 씁쓸한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겁을 먹고 있는 건가? 이 미증유의 시련을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인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가 있을 것인가? 피조사자가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드는 스탈린식 조사가 시작되고 있는 거야.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지금부터 상상의 죄를, 자신의 죄를 스스로 찾아내려는 절망적인 노력을 해야만 하는 거야. 오, 하나님,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모든 걸 보고 계시고 모든 걸 듣고 계시고 모든 걸 알고 계신다고 합니다. 당신을 애타게 부르고 싶습니다. 부르고 또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왜 지금 듣지 못하시는 겁니까? 들어도 못들은 척 혹은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먼저, 동무의 친일행적부터 시작하지요. 우리는 충분히 사전 조사를 했으니까 허튼 소리는 하지 않기요. 그런데 조선민족으로서 어찌하여 그런 자에게 빌붙었단 말이요. 동무는 양심도 없었소. 동무는 당초 시인으로 출발할 때부터 기타하라 하쿠슈로부터 시를 배웠단 말입니다. 일본 유학시절, 그러니까 동지사대학 시절을 말하는 거요. 동무는 특히 하쿠슈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고 사숙까지 했었지요. 그가 동무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단 말이지요.”
시인이 대꾸하였다. “정치보위부가 무슨 할 일이 없어서 나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조사를 한단 말입니까.”
“동무, 쓸데없는 말을 삼가시오. 그 무렵에 동무는 무어라고 말했소. 일본의 피리나 빌려서 연습하겠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피리꾼이 될 것 같습니다. 그건 하쿠슈더러 들으라 한 것 아니었소. 그리고 하쿠슈가 애용했던 어휘나 시어, 이미지를 은근슬쩍 빌려서 시를 쓰니 동무의 초기 시에서는 하쿠슈의 냄새가 물씬 풍겼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쿠슈가 누구인가요. 그 자는 일본 제국주의자의 앞잡이로 성전을 찬미하며 일본의 민족의식을 고취해서 국민시인이 된 자가 아닙니까. 수많은 전쟁협력시를 발표했어요. 그런데도 동무는 배알도 없이 조선민족의 자존심을 저버리고 그런 자에게 빌붙었단 말입니다. 이 얼마나 통탄스러운 일입니까.”
시인은 내내 눈을 내리깔고 부드럽고 공손한 태도로 진지하게 말했다. 옆 책상에서는 하사관이 사복을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구식 타이프라이터로 심문조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김 중좌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그가 처음으로 말했다.
“난두 무식해서인지 시를 도통 모르디요. 그러나 동무가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만은 알 수 있디요. 동무가 그 따위 시 좀 썼다고 한들 그게 무슨 죄가 되갔시요. 동무는 지금 잘 하고 있디요. 기래요, 흥분하지 마시라요. 말을 잘 들어야 해요. 성질이 몹시 급하시거든요. 괜히 고생할 거야 없디 않가서요. 그분이 힘이 센 사람입네다. 공화국의 높은 분들과는 두루 잘 통하디요. 내가 전선에서 이곳으로 오게 된 것두 그분이 끌어주신 거라요. 기래니까 반드시 시키는 대루 하시라요. 기래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디요. 그분이 동무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셈이디요.”
김 중좌는 들어오자마자 다시 진술을 재촉했다.
“그렇지. 계속하시오. 계속해서…… 하사관 동무, 잘 받아 적으시오. 진술의 요점을 놓치면 안 되겠지…….”
“하쿠슈의 시는 터무니없이 멜랑콜리하고 센티멘털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보면 휴지통에 처박아야할 쓰레기나 다름없는 것이지. 동무 역시 그 사람의 아류라고 할 수 있소. 겉으로는 예술지상주의자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사회성이 결여된 감각적이고 신흥 예술파의 경박한 시만 썼던 것이오.”
“그럴지도 모르오. 내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마디 변명을 하자면 순수한 조선어 어휘를 발굴해서 풍부한 표현력으로 시를 쓰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그 동안 우리 시가 음악성만을 중시해 왔지만 새로 시의 공간성이랄까 회화성을 도입하고 싶었던 거지요. 시의 이미지 말입니다. 더욱이 말입니다. 김 중좌님, 저는 원래 사회성이니 사상성이니 같은 것은 잘 알지도 못하고. 하여간에 그것들은 저와는 관계없는 공허한 존재들입니다.”
김 중좌의 거무죽죽한 얼굴이 금세 굳어지고, 화가 나서 버릇대로 눈이 뱀눈처럼 되면서 소릴 질렀다.
“입을 닥치시오. 동무는 너무 잘난 체하는 게 탈이요. 프로문학의 동지들을 폄하하지 마시오. 문학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한 것이요. 형식은 껍데기일 뿐이요. 공작새처럼 화려한 장식이나 경박한 가식은 절대적으로 필요 없는 거요.”
젊은 하사관 동무가 그의 진술을 받아 타이프라이터를 치면서 끙끙대고 있었다. 그는 얼굴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긴 진술을 꼬박꼬박 받아 치면서 몹시 힘겨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김 중좌는 아랑곳 하지 않고 심문을 계속하였다.
건물 밖에서는 여전히 멀리서 폭격기의 굉음과 폭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시인은 전쟁의 진행 상황에 대해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며칠째 김 중좌의 날카로운 심문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질문은 정확하게 핵심을 찔렀고 때로는 시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두둔하면서 날선 목소리로 송곳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기 때문에 시인은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길고 끈질긴 심문 탓에 점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가끔 꿈에서처럼 아스라하게 소식이 끊긴 가족과 이 소좌의 생사가 궁금하였다.
“문제는 말이요. 동무가 하늘처럼 믿고 있는 그 천주교가 동무의 시적 재능을 앗아갔다는 것이요. 동무는 종교시 편에서 가톨릭의 교리가 절대적이고 영원불변의 진리라고 맹신하여 전지전능한 신에 의지해 구원 받으려는 나약한 태도를 보였단 말이요. 동무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망각하고 모든 걸 신에게 맡겨 버렸으니. 너절한 신앙고백에 다름 아닌 종교시는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고 오직 신만을 우러러 보았지요. 그때 동무의 종교시는 완전히 경직되어 있었소. 현실 도피적이고 관념적이었다는 말이요.
다시 말하면, 그때 동무가 쓴 너절한 종교시는 산만하고 긴장감이 없는 문체로 쓴 거였소. 시인의 개성이나 신선한 이미지는 눈 씻고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단 말이요. 부인할 수 있겠소? 그때부터 동무의 시적 재능이 점점 사라진 것이요. 그것들은 동무의 초기 아름다운 시에 감탄했던 독자들을 배신한 거였소. 그런데 시인에게서 시인의 혼을, 시인의 상상력을 앗아간 신을 그래도 믿고 있는 거요? 그 신이 도대체 누구란 말이요?”
“…….”
“다시 말하겠소. 그 신은 동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소. 당신의 시심을, 시적 재능을 말살했을 뿐이오. 동무는 그때 종교시를 쓰면서 전지전능한 신의 힘으로 구제 받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모든 게 허사였소. 동무는 어려운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신을 찾은 거요. 그래서 공허하고 관념적인 종교시에 빠진 것이었소. 내 말이 틀렸소? 그 쓸모없는 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시오. 그리고 천주교에 대해 침을 뱉으시오. 동무가 천주교를 고수하는 한 그건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이요. 미 제국주의자의 앞잡이로 인정되는 빌미가 된단 말이요. 그 신을 당장 버리시오.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교묘하게 조작해낸 인민의 아편일 뿐이요. 당장 신을 버리시오! 이건 공화국의 엄숙한 명령이요. 알겠소?”
그가 멈칫거렸다. 그는 잠시 진술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요. 신은 저의 울부짖음에도 단 한 번도 대답을 해준 적이 없습니다. 인간 삶의 불가해성을 속 시원히 풀어서 가르쳐주기를 간청했었지요. 그 신이 지금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없구료. 신은 거룩하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은 잔혹하고 무자비하고 야만적일 수 있습니다. 신은 전지전능하지도 않습니다. 무소부재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신을 떨칠 수는 없을 것 같소이다. 그 무력한 신을 원망해서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신은 이 순간에도 살아계신다고 믿고 싶습니다.”
“동무는 참으로 멍청하오.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시인이란 족속들은 참으로 어리석지.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이상하고 기분 나쁜 웃음으로 음산하게 심문실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김 중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독히 심술궂은 태도로 이죽거리고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 두드리다 침을 튀기며 다시 심문하였다.
“이 부분이 동무의 범죄혐의와 관련하여 핵심적인데 지금부터 조사하겠소. 다시 경고하는데 허튼 소리는 용납할 수 없소. 그따위 소린 집어치우시지. 당장 집어치우라고. 동무는 지금 자기변명이 지나치다는 것 알고나 있소. 그때 북조선에서는 동무의 변신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반신반의했소. 그러다가 동무의 논설이 점점 과격해지자 이제는 동무를 공화국의 위대한 전사로 간주하기 시작했소. 천군만마를, 문학적 동지를 얻었다고 생각한 거요. 물론 그 후 동무의 변절을 보고 아연실색했지만 말이요. 동무는 나중에 악질 반동단체인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소. 우리는 동무의 변절에 대해 공화국을 반역한 죄, 미국 제국주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다스릴 작정이오.”
갑자기 무시무시한 불안이 시인을 덮쳤다. 그의 목을 죄어들고 있었다. 목울대가 경련하고 있다. 그는 온몸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침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인이 답변하였다.
“김 중좌님이 변절했다고 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변절이라는 우리말 낱말이 정말 생소하게 들리는 군요. 저에게도 변명거리가 있습니다. 잘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때 누가 변절을 하였는지 말씀드리지요. 그 시절에 매일신보나 경성일보 등에 문필가랍시고 자리 잡고 앉아 공출과 징용, 징병을 독려하는 글을 익명으로 매일처럼 써 갈겼던 자들이 해방 후 어떤 행보를 하였는지 알고 계신지요. 그들이 이번에는 파렴치하게도 좌익 지식인 행세를 하면서 우익 타도에 너도나도 앞장섰지요. 또, 어떤 친일파 모리배들은 고고한 민족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재빨리 친미파로 변신하였지요.”
“동무, 세상에는 쓰레기들이, 기회주의자가 언제나 득실거리는 법이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동무도 남의 말 할 계제가 아닌 것 같소. 하여튼 말이요, 남의 말은 할 것 없소. 동무의 이야기를 진술하시오.”
“저의 경우에는 남조선에 단독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모든 게 달라진 겁니다. 문맹의 전력을 가지고 있던 저는 단독정부의 수립과 때를 같이 하여 이화여대의 교수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지요.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녹번리 초당에서 조용히 서예를 하며 소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한에서 시인으로서 존립 기반이 상실된 거였습니다.
도대체 그때 제가 무얼 할 수 있었겠소. 북에서는 변절자라고 욕하고 남에서는 빨갱이라고 욕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설 땅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제게 이념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념이 무슨 소용이 되었습니까? 저는 이념을 모르오. 제가 누구요? 저는 오로지 시밖에 모르고 오직 시에만 심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다만 시인일 뿐이요. 시인…… 시인…… 시인이란 말입니다. 시인에게 뭘 그렇게 요구하는 게 많단 말입니까. 절, 그냥 내버려 두시오.”
“동무는 어두운 현실을 외면하고 계속 도피하고 싶겠지요. 동무는 증오할 능력이 없는 거요. 동무는 치열하게 싸우지도 못해요. 비겁한 놈이니까. 그래서 동무의 시에는 원래부터 사회의식, 사회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없었소. 동무가 자칭 시인이라고 할 수 있소?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거요. 동무는 평생을 모더니즘의 기교주의에 빠져서 바닥이 얕은 감각시나 썼으면서 너무 시인, 시인하지 마시오. 그러니까, 동무는 현란한 언어감각만으로 시를 썼던, 두뇌도 없고 심장도 없었던 수공예술의 시인이었을 뿐이오. 그들이 지적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소.”
“그래서인지, 저더러 최초의 모더니스트니,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시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 지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말끝에 꼭 사상성이니 사회비판성이 없다고 비판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현실 자체를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배후 또는 이면에 숨어 있는 존재의 본질을 캐내려고 했는데, 아무도 그걸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피상적이었습니다. 시란 말입니다, 긴 서사시가 아닌 바에야 짧은 시행 속에서 사회성이나 사회제도의 모순까지 요령 있게 묘사할 수는 없는 겁니다. 거의 불가능하지요. 예를 들자면 카프의 그런 시는 전혀 감동을 주지 못했지요. 시에는 고도의 외재율과 내재율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시를 쓰느니 차라리 노골적으로 논설을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훨씬 쉬운 일이거든요.”
김 중좌가 화나가서 낡은 철제 책상을 꽝꽝 내리 쳤다. 그리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인민해방군의 서울 점령기간 중 동무의 행위는? 그래도 되는 거였소? 동무는 변절한 거요. 배신자! 위대한 공화국과 인민을, 김일성 동지를 배신한…….”
김 중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만한 자세로 시인을 째려보면서 분명하게 조롱하고, 경멸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동무는 지금 자기변명에 너무 급급하고 있소. 그것은 못돼먹은 제국주의 지식인 근성 탓이오. 여태껏 고질적인 회색분자 경향에서 못 벗어났기 때문이란 말이요. 그만 두시오! 변절자가 부끄럽지도 않소! 잘한 게 무어 있다고 큰소리요. 엉터리 시인! 기회주의자! 비겁한 놈! 민족의 반역자! 반동분자! 인민의 적이란 말이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요! 다시 한 번 경고합니다! 부디 자중하시오!”
“…….”
“동무는 피조사자라는 신분을 망각하지 마시오. 조사자는 나란 말입니다. 김규진 중좌란 말입니다. 당신의 운명을 내가 쥐고 있어요. 함부로 까불지 말기요.”
그가 거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피웠다. 그리고 담배꽁초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뱉어 발로 문지르면서 또 한 개비를 피울 것인지 망설인다. 그가 준엄한 눈초리를 던지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동무에게 다시없는 기회를 주겠어. 자수할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요. 잘 들으라우. 반성문 겸 전향서를 쓰시오. 그래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란 말이요. 그러고 나서 공화국과 북조선 인민, 위대한 김일성 장군님을 향해 용서를 비는 거요. 마지막으로 김일성 장군님의 항일유격전을, 경애하는 김일성 동지를 찬양하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칭송하는 시를 당장 몇 편 쓰시오. 우리는 지금 혁명을 하고 있는 거요. 혁명이란 바로 서정시인 거요. 혁명이나 시나 그것들은 인간의 열정이 필요하거든. 당신은 이제부터 혁명가가 되는 거요. 위대한 혁명 전사 말이요. 러시아 혁명이 낳은 최대의 시인은 바로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이요. 그 시인은 거칠고 강렬한 언어로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증오심을, 압제자와 적극적 투쟁에 나선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소. 사회주의 사실주의적 시를 쓰면서 그 시인을 참고하도록 하시오.
그러면 내가 책임지고 상부에 보고하여 동무가 북조선에서 영화를 누리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오. 동시에 남쪽에서 월북한 동무들에게는 필수적인 사상검토사업이나 동무의 과거 과오에 대한 엄중한 자아비판을 면제시켜 주겠소. 자아비판이란 자기굴종인 거야. 자신의 자아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인 거지. 알겠소? 스스로 자기 자신을 포기한단 말이요. 이런 잔인한 행위를 시인에게 강요하지는 않겠어. 엄청난 시혜인 거지. 며칠간 말미를 주겠소. 잘 생각해 보시오.”
그가 멸시에 가득찬 웃음을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동무에게 가혹한 고문을 할 수도 있지. 원하는 것을 획득하려면 고문을 해야만 하는 거지. 고문은 결국 승리한다는 게 나의 확고한 신념이지. 인간은 하찮은 존재, 짐승, 벌레 같은 것이니까 채찍질로 다스려야만 하는 거야. 나는 많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지. 희생자는 결국 굴복하고 스스로 자신의 인간성과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고 가해자의 공범이 되고야 말지. 그건 자진해서 타락하는 거라고 봐야겠지. 그러나 시인에게 시를 쓰라고 고문을 할 수는 없을 거야. 나는 마지못해서 하는 복종에는 만족할 수가 없지. 그건 비열한 굴종에 불과하거든. 시인이 우리에게 항복하게 될 때 그것은 자유의지로 하는 것이어야만 하지. 시란 그런 식으로 쓸 수는 없는 거니까. 시는 자유의지에 따라 가슴으로 써야만 하지. 그래서 이번만은 예외로 하는 거야.”
김 중좌가 철제 책상의 맞은편 회전의자에 뚱뚱한 상체를 비스듬히 뉘이고 긴장한 채로 앉아 있었다. 그 방이 새삼스럽게 생소하게 느껴진다. 지난밤에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밤새 호흡곤란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자꾸 기침이 나왔었다. 그는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무릇 인간들이, 잘못이 없는, 실수가 없는 인간들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소? 인간은 신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저는 북조선 인민들이나 김일성 장군에게 크게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소. 그러니 무슨 반성문 같은 것을 쓸 수 있겠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소. 제가 이 비열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면서 심사숙고 했지요.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서 말입니다. 결국 그것 역시 야만적인 파시즘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저는 근 30여 년 동안 고작 126편의 시를 썼을 뿐이요. 시인을 자처하면서도 그 정도이지요. 시는 충분히 숙성되어야 하는 법이요. 시인은 인내심이 필요하지요. 한 줄의 시를 위해서는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지요. 추억과 기억을 망각 속에 집어넣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려야만 하지요. 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지요. 시는 저 먼 뒤쪽 어딘가에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오랫동안 거기에 숨어 있지요. 시인은 오로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이 지경에 무슨 수로 시를 쓸 수 있단 말이요. 그건 도대체 불가능한 일이요. 아무리 해도 갑작스럽게 너절한 시를 쓸 수 없는 일이지요.”
시인은 다음 순간 그 냉혹한 심문자의 뒤틀린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가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으려고 벼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인은 그 순간에 전선에 감전된 것처럼 몸속의 모든 신경세포가 전율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 중좌는 몇 분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꼼짝없이 앉아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시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폭발하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화풀이하듯 물컵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컵이 박살나면서 날카롭게 깨진 유리 조각들이 이곳저곳에 튀어 올랐다. 그는 극도로 격앙해 있었다.
“뭐가 어째! 이 간나새끼! 배은망덕도 유분수이지! 지금까지 잘 대해주니까, 정말 형편없구먼!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이거지! 넌 사형감이야! 사형이라구! 미 제국주의자 앞잡이! 반동분자 새끼! 날 원망할 필요는 없겠지! 자업자득인 거야! 어이, 하사관! 이 자를 정식 재판에 넘길 테니까, 준비하라우. 그리고 평양형무소로 이송해. 빨리 서둘러. 동무를 미 제국주의자의 첩자로, 민족 반역자로 기소할 것이오. 공화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오.”
시인이 대항하였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한다.
“그건 요식행위일 뿐이오. 그런 요식행위가 왜 필요한지를 알 수가 없구려. 비밀 법정에서 감쪽같이 진행될 재판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요? 나를 조롱하고 괴롭히기 위한 잔인한 짓일 뿐이오. 우리 간단히, 김 중좌의 권총으로 즉시 집행하시오. 뭘 꾸물거리는 거요!”
귤껍질처럼 울퉁불퉁하여 매끄럽지 못하고 가무잡잡한 그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가 시인을 쏘아 보면서 다시 격렬하게 외쳤다.
“그렇게 할 순 없어! 동무를 단순하게 처리할 순 없지! 이 간나새끼! 내가 최대한 예의를 갖춰 대했는데 말이지. 동무는 나의 호의와 충고를 완전히 묵살 하였어. 스스로 절호의 기회를 차버린 거지. 그리고 나의 입지까지 곤란하게 만들어 버렸어. 모시기 작전이 실패했으니까, 상부에서 호된 질책이 있겠지. 나는 동무를 굴복시키지 못했어. 내가 패배한 거지. 그러나 동무는 충분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내가 복수를 하는 거지! 반드시 엄정한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아야만 해! 그래서 죽음의 끈덕진 악몽 속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고통을, 지옥의 고통을, 겪어야만 할 거야! 그래야만 하지!”
“…….”
“공화국 법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우리는 법에 따라 재판을 할 것이오. 동무는 반드시 재판을 받아야만 하오. 그러나 너무 걱정 마오. 공화국 최고재판소의 재판관들이 현명하게 재판을 할 것이오.”
둥근 갓을 씌운 전등불이 생생하게 드리운 원 안에 갇혀 있는 그의 얼굴은 의심할 여지없이 늙은 남자의 초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파괴할 수 없는 엄숙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겠지요. 은혜를 베풀겠지요. 그래서 현명하게도 죽음을 내리겠지요.”

“음…… 김 동무, 내 말 잘 듣고 조서에 적으란 말이야. 이 자는 누가 뭐래도 진정한 대시인이지. 조선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한 조선어가 말살되지 않는 한 그의 시는 민족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겠지. 그의 시는 이미 불멸성을 획득한 거야. 그런데 동무 동두천이 38선 이남인거 맞지? 그리고 말이야 지도에서 동두천 근처에 무슨 야산이 있는지 찾아봐.”
“군관님, 동두천 북쪽으로 고도가 560미터인 소요산이 있디요. 그 산에서 퇴각하던 인민군이 많이 죽었답니다. 미군 폭격이 심했다고 하디요. 김기림 시인도 월북하다가 미군기에 폭사했다고 하디요.”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공식 문서에 남길 수는 없어. 그러니 말이야, 언제쯤이 좋을까? 그렇지, 1950년 9월 25일 자진 월북하던 중 동두천 근처 소요산에서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에 맞아 즉사한 것으로 기록하란 말이야. 알겠어? 동두천은 38선 이남이니까 그는 남조선에서 미국 놈의 손에 죽은 셈이 되는 거지. 그리고 조사기록과 재판기록은 집행이 끝난 즉시 태워버리라고. 잘 알겠지.”
1953년 11월 18일 북한이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제시한 민간인 납치자 명단에 의하면, 학자로는 현상윤, 정인보, 문인으로 이광수, 김진섭, 김동환, 이재순, 박승호 등이 들어있었지만 그는 빠져있었다. 최근 북한이 펴낸 ‘조선대백과사전’에는 그가 1950년 9월 25일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더 이상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평양형무소, 지상에서 마지막 밤
낮이면 햇빛은 오후 느지막하게 잠깐 동안 건너편 건물의 벽을 비추다가 이내 짙은 먹구름처럼 검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격자무늬의 쇠창살이 달린 작은 창문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가끔 그 창문을 통해 하늘을 가로질러 나지막하게 떠가는 조각구름을 볼 수 있었다. 아직도 멀리서 터지는 폭격소리를, 밤이면 낮은 하늘을 찢을 듯한 올빼미 울음소리를, 겨울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도시가 불타는 매캐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감방 벽 위쪽에 붙은 두껍게 성에가 낀 그 창문에 달빛이 어린다. ……차디찬 밤이다. 환한 눈이 곱게 빛난다. 강물도 달빛 아래 언다. 어쩌면 밤이 이처럼 차고 흴까.
어스름한 어둠 속이다.
어둠과 정적이 추상적인 분위기를 드러낸다. 가끔 그들의 군화가 복도를 저벅저벅 밟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이 밤은 영원히 계속되어 결코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암흑의 중압감이 나를 억누르고 질식시킬 것 같다. 감방의 공기는 견디기 힘들 만큼 축축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나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고결한 영혼의 안식과 고요를 느낄 수 있다. 시간이 흐르고 어둠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으면서 절망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준다.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다만 밤이면 꿈결에서 그녀의 환영이 가끔 나타났던 일이 새삼 기억이 난다. 안도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축축한 밤. 나는 매트리스에 누운 채로 하염없이 고향 마을을 생각했다. 그 순간 갑자기 향수병에 걸린 것일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는 오직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려고 무진 애를 쓴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곳을. 하계리 봄 풍경은 먹물로 그려진 동양화처럼 한가하다. 봄이 오면, 동네 어귀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아카시아 꽃이 피고, 집집마다 얕은 담벼락에는 철 이른 붉은 줄장미가 아름답게 피었다. 붉은 꽃잎은 골목길에 붉은 피를 쏟아붓는다. 꽃잎은 매일 아침마다 농염하게 자신을 화장하였다. 꽃잎의 육감적인 냄새가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하였다. 그리고 겨우내 살얼음이 얼어있던 실개천은 옛 이야기를 지즐대며 청석교 다리 밑을 졸졸 흐른다. 밤새 별똥별이 솔숲으로 떨어지고, 은고리 같은 새벽달이 서쪽으로 지고, 그리고 동이 틀 무렵이면, 동네는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암탉이, 늙은 수탉이 서로 가슴을 펴고 날개를 퍼덕이며 연호하듯 울기 시작했다. 신이 닭에게 밤과 낮을 구분할 수 있는 머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쯤이면 동네 사람들이 부스스 일어나 하품을
작성일:2016-05-26 11:02:55 121.138.194.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