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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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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선> 달빛 죽이기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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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6-05-26 10:59:04
조회수
1453
그녀와 마주칠 때마다 언제나 모호하고 아득한 어머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녀는 존경받는 자이고 멸시받는 자이다. 그녀는 타락한 자이며 거룩한 자이다. 그녀는 아내이고 처녀이다. 그녀는 어머니이며 딸이다…… 그녀는 지식이며 무지이다.
그녀는 압도적인 힘으로 나에게 다가왔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순수한 사랑이었기에……. 당신을 영영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었어. 난 당신을 붙잡을 수 없었던 거지. 그럴 수밖에 없는 걸 이해해줘. 날 내버려둬.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리고, 그 날의 일을 떠올렸다. 1998년 늦은 봄. 피부의 혈관이 터져서 피가 콸콸 흐르는 것처럼 하늘이 핏빛으로 붉어지던 토요일 늦은 오후.
황혼의 빛깔은 마치 무지개를 층층이 쌓아 놓은 것처럼 불타는 분홍, 장밋빛 분홍, 짙은 회색 분홍으로 변하고 있었다. 세상의 풍경이 황금빛 석양에 물들고 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하늘을 쳐다본다. 시뻘건 해가 석양 저편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그때 서초동 남부터미널 부근에서 방배동 쪽으로 아주 느릿느릿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는 아프리카로 가는 출국 준비가 거의 끝나서 홀가분했다고 할 수 있다. 6월 초순경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녀와 길에서 갑자기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깜짝 놀란다. 나는 손희승을 오랫동안 만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그녀가 곧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한참 나중에서야 그녀가 새로 창간한 패션 전문 잡지의 사진기자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죄송해요. 자세한 이야기도 없이…… 그냥 그랬어요.”
두 사람은 짧은 거리에서 빤히 쳐다보면서…… 잠시 환한 미소에 잠긴다. 서로 반가워서 손을 잡을 듯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주춤거렸다. 나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녀에게 심술이 나서 빈정대고 싶었지만 꽉 막혀버린 목구멍에서 말이 잘 흘러나오지 않았다.
손희승은 가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돌아보았다.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골목길로 꺾어지는 모퉁이에 너무 빨리 도달했다. 거기서 잠깐 멈추었고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려고 하였지만 눈물이 글썽거려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손희승은 뒷골목 길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그때 했던 말이 오랫동안 여운을 남겼다. “참된 사랑은 작별 인사를 하지 않고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줄 알죠.”
사소한 작별 뒤에는 영원한 이별이 뒤따른다.
그게 손희승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한 달 후였던가? 나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나는 지금 하염없이 죽어가고 있다.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우린 꽤 많이 취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었던가? 왜 여자에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을 할 줄 모르는가? 밀어를 속삭일 줄을? 왜 끝까지 단호하게 억눌러 참아야만 하는가? 왜 그 순간 혀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버리는 것인가? 다시 기억해보면 무엇인가가 목을 조르기라도 하듯이 목구멍이 막혔지만 그녀를 실망시키고 잔인하게 굴었던 것 같지는 않다. 틀림없이 언제나처럼…… 눈치 없이…… 술자리 분위기를 완벽하게 망치는 건축과 완벽과 바벨탑과 호모 사피엔스 따위 이야기를 두서없이 지껄였을 것이다.
나는 왜, 여자 앞에만 서면 동요하고 벌벌 떨고 불안해했던가? 사실인즉 한없는 관능과 욕망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동하는 본능적 감각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었지…… 나는 그걸 잠재우기 위해 독한 술을 연거푸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지 않았던가. 그리고 비겁하게도 자신으로부터 도피한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 불안을 초월하면 나에게 구원이 찾아올 것인가? 출구가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어디에서 신을 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신이 존재하기는 할까?
그런데 그녀는 무슨 말을 했었나? 술에 취했으니까 꽤 용감하게 지껄였지. 사진사니까 사진 이야기를 주절주절 거렸던가? 그렇지. 뜬금없이 이혼녀라고 고백했었지. 그리고 운명을 믿는다고 했고. 오래 전부터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바로 나라고 했었지. 하지만 나의 인간적 약점인 심각한 강박증과 불안증을 끄집어냈지. 그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지금쯤 좋은 사람을 만났을 거라고. 그래서 나를 까마득히 잊어버렸겠지. 그녀에게 난 그런 가벼운 존재에 불과했으니까.
그날 밤이야 말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우린 그날 밤 이후 운명적으로 이별이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그 건물, 최고의 걸작품, 경이로운 건물.
그 건물을 설계하기 전, 이도원 회장님의 주문 사항은, 건물은 안전해야 한다는 것,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그래서 진도 7의 지진에도 끄떡없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내구성 문제인데, 그 건물은 최소 300년 이상, 그 이상으로 1,000년까지라도 온갖 비바람과 풍상에도 견뎌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안락함과 아울러 최대한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국내외의 저명한 건축가들이 회장님의 요구 사항에 맞춰서 설계도 초안을 제시했지만 회장님의 까다로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회장님은 그 미술관의 설계자로 김규현 부장 (그 당시)을 지목한 것이다. 물론 그는 이 건물의 완성 이전에는 젊은 나이에 그저 평범한 설계사에 불과하였다. (그는 회장님이 어떻게 자신을 지명하였는지, 끝내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그 후, 회장님과 수행비서, 계열사인 건설회사의 설계 담당 상무, 김규현 등이 함께 회장님의 마음에 드는 건물을 찾기 위해 세계 일주 건축기행을 한 것이다. 그들 일행은 먼저 일본으로 갔다. 그 다음 미국으로 갔고, 남쪽으로 브라질로 갔으며,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들이 주로 관찰한 건물은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수상자들이 설계한 유명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고 또 성당이나 교회,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다.
교토의 국립 근대미술관․가와자와의 21세기 현대미술관․시마네의 고대 이지모 박물관․나오시마의 현대미술관․샌프란시스코의 드 영 미술관․세인트루이스의 퓰리처 미술재단․휴스턴의 메닐 컬렉션․휴스턴 미술관의 오드리 존슨 백 빌딩․시애틀 미술관․워싱턴 D.C.의 조지프 H. 허시혼 미술관 및 조각 공원․뉴헤이븐의 바이네커 희귀 서적 및 원고 도서관․신시내티의 로이스 엔드 리처도 로젠탈 기념 현대미술센터․뉴욕 로워 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신 현대미술관․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오클랜드의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박물관․상파울루의 브라질 조각 미술관․국립 상파울루 박물관․리우데자네이루의 니테로이 현대미술관․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포르투의 세럴비스 현대미술관․프랑크푸르트의 근대미술관․프랑크푸르트의 장식미술 박물관․묀헨글라트바흐의 압타이베르크 박물관․뮌헨의 괴츠 미술관․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스위스 줌비티크의 성 베네딕트 예배당․로마의 아라파치스 박물관․파리의 그랑 루브르, 오르세 미술관,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국립 성서박물관, 조루주 퐁피두센터.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의 그 화려한 고딕식 또는 바로크식 궁전, 성당들.
단순한 건물과 검소한 장식이 특징인 칼뱅주의 교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 북동부에 있는, 동방 정교회의 수많은 수도원이 산재해 있는 아토스 산으로 갔다.

그러나, 어떤 건물도, 지금까지 살펴 본 수백 개의 건물 중에서 어느 것 하나 회장님 마음에 쏙 드는 것은 없었다. 그때까지 6개월여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일행은 점점 지치고 싫증이 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가보기로 한 곳이 아프리카, 그것도 사하라의 사막 지역이었다.
그리고, 모로코의 남쪽 도시 우아르자자테 근처 사막에서 대리석과 사암석으로 된 건물의 잔해를 발견한 것이다. 6각형의 주춧돌과 밑동만 간신히 남아있는 원형 대리석 기둥과 사암석으로 쌓아올린 건물의 외벽 일부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전문가라면 그 건물의 규모와 구조를 어림잡을 수 있었다. 마침내 회장님은 그 건물에 필이 꽂혔다. 그러나 그 건물은 오랫동안 역사에서 사라졌었다. 그 건물은 신의 분노인 지진으로 무너진 후 그 잔해는 사막의 모래더미 속에 파묻힌 채 잊혀졌던 것이다.
그 건물은 풍요로운 오아시스에 건설된 것이다. 그때 수로를 연결하여 운하를 만들고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 도시에서 사막의 부족민들을 통치했던 왕은, 왕의 거처인 궁전과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던 제단이 있는 신전, 왕릉 등이 어떤 원대한 계획에 따라 연결되어 있는 일군의 건물들을 축조한 것이다.
건물의 외벽은 원래 짙은 장밋빛이었거나 진홍색이었을 것인데 오랜 세월에 의해 빛이 바래있었다. 그리고 내부에는 거대한 미로의 흔적이 남아있고 이상한 상형 문자가 부조로 새겨진 내부 벽에는 채색 안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들 부족은 색채를 매우 중요시 여긴 것 같다. 그 건물들은 탁월한 설계와 건축 솜씨에 따라 지어진 것이고 그 신전은 성소였으므로 부족민들의 의무적인 순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후 급변에 따른 오랜 가뭄과 기근, 엎친 데 덮친다고 지진까지 일어나서 왕국은 몰락하고 지금은 그 폐허의 유적만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이천 년 동안 모래언덕 밑에 묻혀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사막에 모래 폭풍이 맹렬하게 불면서 모래언덕이 날아가자 그 허물어진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회장님이 말했다.
“이제서야…… 이제 찾은 거라네. 인간은 흙으로 태어났으니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흙의 색깔, 황토색이야 말로 근원적인 색, 신의 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건물들은 원래 그 색깔이었던 거야. 나는 오래된 유적을, 잔해를, 그 그림자를 보면서…… 그 희미한 건물의 윤곽과 벽에서 사라져 가는 색채를 바라보며 슬픔을 느끼고 동시에 기쁨을 느끼는 거야. 벽을 구성하고 있는 희끄무레한 돌덩어리에는 영겁처럼 느껴지는 세월의 무게감과 함께 그 어떤 장엄함을 느낄 수 있지. 그것은 가혹한 환경에 대항하고 흘러가는 시간에 저항했던 거야.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처럼. 그러나 황량한 사막의 한가운데 쓸쓸하게 방치되어 있어서 슬프고,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을 끌면서 영감을 느끼게 해주니까 기쁜 거야.
그리고 말이지, 자연이란 신이 창조한 것이고 건축물의 형태는 자연을 모방한 것에 불과한 거야. 이 건물은 자연을 완벽하게 본 딴 것이고, 그러니까 이 건물을 설계하고 완성한 고대인들은 신을 경배했던 신실한 인간들이었어. 그러나 그들은 천재였어. 그래서 신이 규정한 수학의 법칙과 기하학의 황금비율을 완벽하게 재현하게 되었지. 예술에 있어서 독창성이란 게 있기는 한 거야? 독창성이란 게 태초로, 자연으로 회귀하는 거지.
나는 건축 전문가는 아니지만 건축에는 아주 관심이 많았지. 지금도 말이야. 잘 알고들 있겠지만…… 나는 대학을 안 나왔으니까 건축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기회는 없었던 거야. 그러나 나는 원래 건설업으로 시작했고 그곳에서 잔뼈가 굵었거든. 그리고 우리 회사의 본사 건물은 물론이고, 수십 개 계열 회사의 건물, 심지어 전국 곳곳에 있는 수백 개의 공장과 창고를 지으면서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깐깐할 정도로 관여를 많이 했지.
그러나 진짜 마음에 드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네.
주로 일본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네. 우리나라에는 건축 관련 책이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눈이 짓무르도록 읽은 거지.
하지만 이번 미술관은 특별한 거야. 아주…… 시대를 초월해야 하니까. 한 천 년쯤은 견디었으면 좋겠구먼.
규모가 큰 건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멋지고 독특한 것은 아닌 거지. 나는 큰 것에 대해 언제나 의혹을 갖고 있지. 어느 철학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큰 것’ 앞에서는 숭고의 감정을 느낀다고 하였어. 그러나 그가 말한 큰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상상력으로 도저히 측정이 불가능한 절대적인 크기, 다시 말하면 신이나 우주를 말하는 거였어. 건물은 건물일 뿐이야, 때로는 예술품으로 승격할 수도 있겠지만. 건물에서 숭고함까지 느낄 필요는 없겠지.
우리는 중세와 근대의 성당들을 지겹도록 살펴보았지만 지나치게 높고, 길고, 크고, 화려했지. 다른 성당보다 장려하고 웅장하게 보이도록 쓸데없이 경쟁을 하였던 거야. 인간들이란 게 본래 그런 거지만.
그런데 건축계의 루소주의자였던 르 코르뷔지에의 주장이 타당한 거야. 좋은 건물의 기준으로 튼튼하고 살기 편한 것을 첫 손가락으로 꼽았어. 그가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인 마르세유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했거든. 그는 성 베드로 성당도 베르사유 궁도 한심한 건물로 보았다네. 그들 성당 건물에서 조화와 균형이라는 건축의 원칙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형태나 형식을 복사하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었던 거야. 자연과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절제미가 없거든.
모든 게 자연과 부합하여야만 하지. 인간적인 규모를 갖춰야 하므로 알맞고 적당해야만 하는 거야. 그의 모듈러 이론이 그런 걸 거야.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고 나서 미묘한 윤곽선이 있어야 하지.
그러나 안토니 가우디는 세상에는 직선이 아니라 목질이나 근육, 힘줄처럼 곡선 형태가 넘쳐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건 아니야, 곡선만큼이나 직선도 넘쳐나지. 바르셀로나의 경이로운 건축물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기괴한 건물이라고 할 수 밖에 없어. 그렇다고 프랭크 라이트가 설계한 원 또는 나선형이라고 불리는 원형의 건물,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도 내 마음엔 들지 않아. 또 말이지, 대량 생산한 컴퓨터 모형으로 설계한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도 나는 아니라고 보는 거지. 석유 채취 시설과 같은 외관을 가진 퐁피두센터도 별로인 거야.
그것들은 약간 창조적 아이디어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독선과 아집을 가진 인간들이 만든 거지. 모두가 치밀하게 계산된 지나치게 인위적이지, 인위적. 건축의 본질을 외면하고. 그건 쓸데없는 허영, 인간의 허영에 불과한 거지.
미술관 설계에서 약간의 새로운 영감과 창조적 모방이 필요하겠지. 그 폐허는 폐허지만 가슴이 뭉클할 만큼 아름답거든. 그러나 그 속에는 우리들이 도저히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꽁꽁 숨어 있을 거야. 건축가는 그걸 찾아내야만 하는 거야.
그러니까…… 뭐지…… 그렇지. 미래주의자들인가, 미래파인가. 달은 과거이고 지구는 현재이고 태양은 미래라고 규정했어. 그들은 달빛이 창백하고 나른하다고 해서 고리타분한 과거의 역사, 전통과 관습을 달빛에 비유하고 달빛 죽이기를 선언했어. 옛것을 완전히 버려야만 새것이 태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지. 그러므로 과거에서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차근차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옛것을 새것으로 완전히 대체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므로 이 과정은 연속이 아니라 단절에 불과한 것이고, 연장이 아니라 비약이고, 발전이 아니라 혁명이라는 거지. 그들은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고 외쳤어. 참으로 어리석고 잔인한 자들이지. 불효막심한 녀석들 같으니라구.
달빛은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지는 않지만 은은하기는 하지.
시간이 인간의 주인이라네. 그래서 인간은 시간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거야. 기나긴 시간의 역사에서 찰나에 불과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거야. 다시 말하면, 현재는 유일한 실재이지만 현재는 곧바로 과거로 돌아가니까 그 실재는 결국 부재라고 할 수 있겠지. 따라서 과거와 미래만이 있는 것이고 과거는 미래의 토대인 거지.
내가 예를 하나 들 수 있지. 레오나르도 다빈치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을 거야. 이탈리아에서 쓰는 1유로 동전의 뒷면에 나오는 벌거벗은 남자의 인체도를 말하는 거야. 그 그림의 제목이 바로 ‘비트루비우스 인간’이지. 비트루비우스는 다빈치 보다는 500년 전 로마 시대 건축가인데 그가 서양 건축학의 고전인 ‘건축십서’를 썼고, 다빈치의 인체도는, 그가 아무리 천재라고는 하지만 그 책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인체도는 그 책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거든.
그리고 또 하나의 예를 들 수가 있지.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말이야……. 그가 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근대 과학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명저 중에 명저이지. 그러나 뉴턴은 이 책이 고작해야 성경시대에 이미 나온 고대의 지식을 재발견한 것에 불과하다고, 죽을 때까지 확신했던 거야.
그러므로 달빛 죽이기는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는 존속 살인인 거지. 달빛은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런 거야. 과거란 달처럼 찌그러진 모습이 아닌 거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평화롭게 공존해야만 한다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사물들, 인간들, 신들 그러니까 모든 존재들이 서로 순서대로 또는 뒤죽박죽 연결되고 얽혀서 거대한 바퀴가 되고 바퀴는 무한정 굴러가다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며 순환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
“회장님의 건축 철학은……? 한없이 깊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렇지만…… 혹시 회장님은 풍수지리를 믿지는 않으신가요?”
“내가 믿는다고 또는 안 믿는다고 말하기가 곤란하구먼. 풍수지리란 게 건물 짓기가 좋은 땅을 고르는 거니까 말일세.
어쨌거나 나의 건축학 개론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구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 부장이 말이야. 현재로선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지만…… 어떻게 하든 설계도가 완성되기만 하면 시공에 대해서는 걱정할 게 없을 거야. 설계하는 쪽에서 감리나 감독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우리 건설회사가 완벽하게 할 거니까. 이미 최고의 기술자들을 교섭해 놓았지.”
그들 일행이 귀국한 후 일주일쯤 지나 회장님과 다시 만났다.
회장님의 소박한 집무실에서.
회장님은 평소처럼 뿔테 안경을 쓰고 있고 여전히 친절하고 쾌활하게 보인다. 그러나 늙어서 주름 진 얼굴의 혈색은 창백해 보였다. 특별히 대그룹 회장으로서의 카리스마가 넘치지도 않았고 뒤축이 닳은 20년 된 구두를 아무렇지 않게 신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어딘가 모르게 어수룩하게 보인다. 그는 다정하면서도 업무 처리에 있어서는 무자비했고 자아도취적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말할 수 없이 가장 큰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고 약간 은둔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므로 천문학과 점성술, 신비학, 고대 건축, 인도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회장님이 말했다.
“이 건축물을 맡을 건축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네. 지금까지 자천타천으로 얼마나 많은 건축가들이 몰려들었는지…… 그들이 설계 초안을 제출했지만 하나도 쓸모가 없었지. 어떤 건물은 너무 겉모양에만 잔뜩 신경을 썼던 거야. 어떤 것들은 남의 것을 노골적으로 그대로 베꼈고. 건물 내부에 동선이 거미줄처럼 지나치게 얽혀 있고. 볼품없이 부적합하고.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이류 아니면 삼류 건축가들이지. 그런 자들에게 시달릴 만큼 시달렸다네.”
“회장님의 까다로운 취향을 누가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탁월한 독창성과 상상력이 필요하겠지요. 더욱이 회장님은 효율성과 건축비까지 까다롭게 따질 것이니까요.”
“지금까지 당신이 만나 본 건축주들은 어땠어?”
“저에게 일을 맡긴 건축주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요. 지독하게 까다롭게 구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런 사람이 오히려 낫습니다.”
“어째서?”
“그만큼 건축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거지요. 그리고 건물에 대해 애착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제 경험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그 건물을 아주 사랑하지요. 미술관을 구상하신 건…… 오래되었습니까?”
“글쎄 말일세. 악덕재벌도 뭔가 문화 사업을 해야 하지 않겠나. 국민들의 눈이 있는데…… 그래서……”
“그러니까 그 땅은 일찍부터 미술관 용도로 매입하신 거군요?”
“내가 그건 알고 있다네. 건축과 미술은 다르지 않는가. 건축에는 장소가 절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지. 집을 지으려면 땅이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그림은 마음대로 옮길 수 있는 거지.”
“미술관이 완공된 다음엔…… 어떻게 채우시겠습니까?”
“그건…… 도대체 걱정하지 말게나. 내 비밀창고에는 지금 2만 점에 가까운 그림, 조각, 사진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다네. 국립현대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게 고작 8천여 점에 불과하지.
솔직히 말하겠네…… 당초에는 그림을 사놓으면 오른다고 생각했지. 부동산처럼 말일세. 실제 몇 배씩이나 상승했다네. 그리고 꿩 먹고 알 먹는다고…… 세금내지 않고 감쪽같이 재산상속을 하는 데에는 그림만큼 좋은 게 없지.”
“그런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못난 자식 놈들한테 넘겨줄 생각은 없다네. 결국 국민들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겠나. 그리고…… 죽을 때까지 모든 재산을 풀어서 작품들을 계속 모을 걸세. 특히 무명작가의 작품을 비싼 값에 살 걸세. 그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나.
나는 세계적 사립 미술관인 일본의 모리미술관이나 미국의 게티센터 이상으로 키울 거야. 우리나라에도 반듯한 세계적 미술관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군요.”
“아무래도 김 부장이 우리 회사로 옮겨오는 게 좋겠어. 내가, 당신이 설계한 건물들을 모두 자세히 살피고 나서 심사숙고했지.
다시 말하면 건설사의 설계 파트 책임자로 말이야. 아니면 설계 사무소를 따로 차릴 수도 있겠지. 당연히 즉시 상무로 승진시켜줄 것이고…… 계속 순조롭게 올라갈 수 있을 거야.”
“회장님께서……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전 아직 멀었습니다. 더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전 다만 건축 여행에 동행했을 뿐입니다. 회사의 지시였으니까요.”
“당신은 건축가이면서 사막 전문가이니까 안성맞춤이었지. 그런데 당신네 회사는 상황이 썩 좋지 않다고 들었네만…… 요즘 건축계가 엄청난 불황이거든.”
“전 큰 회사의 관료주의적 조직 체계에는 맞지 않습니다. 큰 회사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회의를 거듭할수록 집단적으로 지혜를 모으고 개인적 편견이나 이기적인 생각은 서로 양보하여 조화롭게 일하는 게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서로 양보하는 게 아니라 윗사람의 일방적 지시와 감독만 있을 뿐입니다. 그게 관료주의의 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하는 집단적인 작업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게 되지요.”
“나는 평생 동안 사람을 보는 데 이골이 났다네. 미안하네만…… 김 부장을 많이 관찰했다네. 그래서 잘 알고 있지. 우리가 함께 여행을 했었지 않나. 그 여행은 늙은이에게는 아주 힘들었다네. 강행군이었지. 어쩐지 초조한 심정이었거든. 하지만 건축에 대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당신을 뼛속까지 이해하게 되었지.”
회장님이 책장에서 양주병을 꺼냈다. 그리고 맥주잔에 반 쯤 채워서 건네주었다. 술잔 속의 얼음이 달각거리면서 서서히 녹아 사라졌다.
회장님이 말했다.
“우리 술 한 잔 하면서 긴장을 풀자고…… 그렇지 않은가? 지금 이야기가 약간 길어질 것 같으니까…… 술을 한 잔 하면서…… 너무 심각할 것은 없으니까. 심각하면 이야기가 꼬일 수 있다네.
김 부장은 술을 무척 좋아하지. 역시 술은 아프리카 사막에서 밤에 마시는 게 최고였지. 사막에서 보는 찬란한 별무리들은 참으로 아름다웠어.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그때 많이 마셨고 너무 많이 취했었지.”
회장님과 김 부장이 동시에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회장님이 말했다.
“나는 거절당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네. 나의 제안을 거절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 나는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지. 그래서 당신네 건축 사무소가 우리 그룹에서는 단 한 건도 일거리를 따내지 못하도록 작용할 수 있다네.”
“힘이 세다는 것, 강하다는 것, 더 크다는 것 등등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다 차지하지요.”
“그렇다네. 그래서 그걸 평생 추구한 거라네. 왜…… 기를 쓰고 돈을 벌었겠나.”
“그렇지만…… 힘을 작용하는 것은…… 저에게 그 힘을 사용한단 말씀인가요?”
“글쎄…… 그렇다는 말일세. 내가 때로는 무지막지하게 무식하지 않은가. 내가 빈농 출신이고 무학인 사실은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걸세. 우리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 고조 할아버지도 대대로 가난한 집안에 무학이었지.
나는 자라면서 스스로 글을 깨우쳤다네. 그리고 그때부터 눈에 보이는 글은 닥치는 대로 모조리 읽었지. 그러니까 우리 같은 미천한 가문에서 내가 태어난 게 기적이 아니겠는가. 하기사 가난한 목수 집에서 예수가 탄생하기는 했네만. 그렇지 않은가?”
“격세유전이 있으니까요. 가끔 옛날 일들을 돌아보십니까?”
“그렇게 지독했던 과거 말인가? 다 지난 일인데…… 그렇지 않은가? 새삼 무얼? 나는 그 시절 공사판에서 온갖 상스러운 욕설을 다 배웠다네. 지금도 가끔 화가 나면 원색적인 욕설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지. 그리고 그때부터 여자를 알았다네. 그러니까 그때 벌써 여자에 대해선 알아야 할 것은 죄다 알아버린 거지. 그렇지만 말일세, 술은 말술을 마셨지만 약물에는 절대 손을 대지 않았네. 그건 인간을 절대적으로 타락시키니까.
당신의 경우는 어떻나? 내가 알기로는 어머니가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을 팔아서 당신을 잘 키웠더구만.”
“그렇지요? 어머니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전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가슴이 떨리거든요. 어쨌거나 어머니 덕분에 그럭저럭 공부를 끝까지 할 수 있었지요.”
“김 부장의 경우는 나보다는 훨씬 나았다는 거야. 물론 시대 상황이 그렇기도 했지만……. 내가 자라온 환경이 웬만했다면 나는 역사학자나 인문학자가 되었을 걸세. 시인이 될 수도 있었을 거야. 그러나 어림없었지.
나는 밑바닥부터 시작했다네. 어렸을 때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거든. 집도 없이 떠돌며 굶주려 본 경험은 없었겠지.”
“네. 너무 고생하신 어머니 덕분에…… 오랫동안 건설 공사장에서 일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네.”
“그때 무슨 일이 가장 힘들었었나요?”
“돌덩이나 벽돌을 한 짐 지고 비계를 오를 때면…… 허리가 끊어지고 어깨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네. 밤이면 온 몸이 쑤셔서 잠을 자지 못하고 끙끙 앓았지.”
“그런데 공사장 인부였던 사람이 돈이 하늘까지 닿을 만큼 재벌이 되었군요. 그게 어떻게 가능했죠? 부정한 수단을 쓰지 않고 가능했을까요?”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네.”
“돈 그 자체가 목적이었단 말입니까? 그래서 죽으면 하늘나라로 가지고 갈 건가요?”
“오해는 하지 말게. 돈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네. 오직 수단이라고.”
“회장님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목적이 있기는 한가요? 과시하고 싶었겠죠. 남들에게 보여주면서 깜짝 놀라게 만들고 싶었겠죠. 과대망상증이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은가요?”
“돈을 버는 데도 일종의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거든. 돈이 돈을 번단 말이지. 나는 남들이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땅을 매입해서 몇 십 배로 불렸지. 그걸 알게나. 그건 정당한 투자이지 투기가 아니라네.
내가 이 세상을 저주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이 필요했다네. 그런데 말일세, 돈이 바로 힘이지. 자본주의 사회는 돈으로 지배하는 거야. 그것뿐일세.”
“그래서 회장님은 성공하신 건가요?”
“내가 성공했는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는 없다네. 나 자신은 실패한 인생으로 간주하지. 정직하게 살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늘 열등감과 수치심을 느끼지……
그러나 성공에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네. 그러면 추진력과 힘이 따라오지. 나는 무섭도록 일했다네. 하루에 15시간씩이나…… 난 실패도 많이 겪었다네. 계속 성공가도를 신나게 달린 게 아니라니까…… 물론 지독하게 일해도 실패한 사람이 태반인데 난 운이 좋았다네.
그런데 건축가로서 당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명성? 건축업계에서 확고부동한 선두자리?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돈을 원하지.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저는 일 자체를 사랑합니다. 건축가 일을 하고 싶은 겁니다. 내 방식대로 일하는 것이지요. 저는 일에 완전히 집중하는 몰입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는 배고픔, 피로, 근심 걱정, 불안 강박 등 모든 것이 제 의식에서 사라지지요. 그리고 그때 창조적 정신이 발현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명성이나 감탄은 필요 없지요. 그건 부담이 될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위대한 건축가로 칭송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걸 일본말로 오타쿠라고 하지 않겠어? 그러면…… 화제를 조금 돌려볼까? 지금도 그렇게 여전히 데생과 회화에 관심이 많은가?”
“그렇습니다. 그렇지요, 뭐.”
“건축가가 반드시 그림을 그려야 할까?”
“저는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지요. 형태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사물의 내부로 들어가서 사물의 본질과 생명력을 캐내야 하니까요.”
“훌륭한 화가가 아니면 조각가가 될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걸로 밥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건축 쪽으로 눈을 돌렸겠구만. 그런데…… 뭘…… 그렇게 그린단 말인가?”
“사물과 풍경, 환경, 무엇이든지 끄적이지요.”
“인물도?”
“가끔이지만 꼭 그린다면 여성의 육체를 주로 그립니다. 여성의 부드러운 형태, 윤곽선, 성애에 대한 환상을 그리지요. 그건 곡선과 비례, 균형을 연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몸은 완벽하게 좌우 대칭이니까 아름다운 거예요.”
“당신의 취향을 짐작해본다면 관능적이고 풍만한 육체를 좋아하겠군. 그게 바로 원초적이지. 그러니까 비쩍 마른 것은 쓸데없는 장식인 거지. 그래서 아프리카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네.”
“회장님께서도…… 아프리카를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요? 아프리카에는 원초적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가끔 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그러니까 폐허가 된 팀북투의 먼지투성이 길을 지도책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무작정 걷는 꿈을 꾼다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난 단 한 번도 태양의 도시나 뉴아틀란티스 같은 유토피아 도시들을 꿈꿔 본 일이 없다네.”
“회장님은 여전히 행복하실 텐데 왜 그런 꿈을 꾸게 될까요? 그런 꿈은 제가 꾸어야 하는데요.”
“행복이란 게…… 대개는 철딱서니 없고 인생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허투로 사는 바보 같은 인간일수록 그걸 따지지 않겠나. 어쨌거나 가끔 돌이켜보지만 내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네.
정밀한 시계 장치의 톱니바퀴처럼 항상 쫓기듯 살았으니까. 돈이 너무 많으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지. 세끼 밥만 제대로 먹을 수 있다면 물질적 풍요는 인간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네. 내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네.
그런데 늙으면 힘이라든가…… 지배라든가…… 다 쓸데없는 거야. 그러니 나를 부러워하지 말게.”
“저는 어서 빨리 늙고 싶은데요. 나이가 들수록 지혜가 쌓이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지지 않겠어요? 세상을 보는 시야도 한층 넓어지고요?”
“어림없는 소리…… 더욱 더 어린애가 된다네.
오히려 김 부장이 부럽지. 아직 젊지 않은가. 그리고 자기가 목표로 추구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말일세, 사막 여행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사막에서는 그리지 않는가? 또는 사막을 대상으로 그리지 않는가?”
“사막을 경외하니까요. 손이 마비되고 떨려서 도저히 그릴 수가 없습니다.”
“사막을…… 경외한다고? 사막이 신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말이야. 신의 형상을 그린 적은 있었나?”
“전 아직 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찾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형상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화가는 자유로워서 좋을 겁니다. 그러나 건축은 많은 제약이 따르지요. 건축주의 요구 사항도 많을 뿐만 아니라 건축적 윤리에 따라야 하니까요.”
“그 건물이 하늘을 향해 치솟을 필요가 있을까? 주변의 건물들을 위협하듯이 내려다 볼 텐데……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거야. 나는 신 또는 왕의 권위와 지배를 위한 건축물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을 짓고 싶다네. 누군가는 장식은 죄악이라고 했다네. 최소의 장식만 필요하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건물의 주제의식은 평범한 사람들 또는 침묵하는 다수 대중을 위한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신이나 영웅,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 혹은 회장님을 위한 것이 아니란 것이죠. 그러려면 훨씬 개방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옳소! 옳소! 우리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네! 나는 이 미술관이 세상의 일부가 되게 할 거야!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거지!”
“저는 언제나 건축의 순수주의에 끌립니다. 그래야만 건물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건축에 대한 편견은 없습니다. 반드시 현대적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양식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땅을 존중한다네. 건물 터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막다른 언덕에 다다르게 되지. 도심 한복판에 있는 건물들은 빽빽한 빌딩 숲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눈에 잘 띄지 않지 않는가. 내가 죽기 전에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그 건물을 보고 싶군. 진짜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있는 걸 말일세. 그러나 그걸 보면서 소름이 돋을 필요까지는 없다네.
우리는 지금 번영의 시기이지만 언젠가는 틀림없이 쇠락이 찾아올 거라네. 돌고 도니까 말일세. 그러나 이 건물은 튼튼해서 모든 걸 견디고 살아남아야 한다네.”
늙은 회장님은, 문득 누구나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찬란하게 빛나는) 젊은 건축가의 눈빛을 살펴보려고 지긋이 쳐다보았다. 김규현은 부끄러운 듯 눈길을 아래로 깔았다.
“그럼,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보아도 될까? 나는 오랫동안 수면제를 복용하고 있어. 도대체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서 잠을 이룰 수 없다네.
지난밤에 꿈을 꾸었지. 그게 악몽인지 그냥 꿈인지 분간할 수가 없네. 사막의 모래 언덕들 사이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에 세워진 건물을 폭풍이 불면서 모래 언덕이 무너져 내리고 삼켜버렸거든. 우아르자자테의 왕궁이 그랬을 거라고.”
그는 당초의 예상을 뛰어넘는 그 제안에 두려움을 느끼고 정중하게 거절하기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새삼스럽게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깨끗하고 검소했고 결벽증이 느껴지는 공간. 벽 쪽에는 그림 한 점 걸려있지 않고 장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 순간 혀가 굳어버린 듯 말더듬이처럼 멈칫거렸다.
“회장님의 배려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명성 있는 건축가가 아닙니다. 아직 풋내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저희 회사를 떠날 수 없지요. 회사 사람들은 키워줬더니 떠난다고, 배신감을 느낄 것입니다. 저는 선배들로부터 알맹이가 되는 것들을 많이 배웠지요. 어깨너머로 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계한 것들은 적당한 크기의 아담한 건물들뿐이었습니다. 제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지요. 회장님의 까다로운 주문 사항을 소화할 자신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회장님이 원하시는 건물을 설계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가장 완벽한 것이란 죽음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내 설득이 부족했단 말인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그렇지, 그렇고말고. 당신은 회사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니까…… 김규현의 이름으로 독립해서 설계도를 작성할 수 있게 된 것 아니겠어?
김 부장은 언제나 자기 생각대로 하는 거야? 신은 신이면서도 가끔은 자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 같던데.”
“제가 이번만, 이번만 하면서 버티다 보니 조금씩 제대로 그리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에 집중하는 것이지요.”
“나는 타인의 인정에 연연해하지 않는 사람, 연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해 하는 사람, 칭찬 받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을 찾고 있는 거야. 그런 거야. 그런 사람은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맡은 일을 묵묵히 완수하고, 다시 말하면 일에 몰입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만족감을 느끼는 거야.
그런 사람일수록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고 완벽하게 해내지. 오직 자기 일에만 아주 강렬한 열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그는 너무 부담스러웠는지, 평소에 어떤 질문에도 말을 더듬는 것처럼 신중하게, 느릿느릿 대답하는 그의 대답이 더욱 느려졌다.
“……. 저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 회장님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고 정평이 나있습니다만 이번만은 틀린 것 같습니다.”
“난생 처음이야. 내 주위에는 잘난 사람이 너무 많다네, 질릴 정도이지. 하지만 오늘은 괜찮은 날, 그렇지 아주 좋은 날인 것은 틀림없구먼. 평생 동안 그런 좋은 기회를 거절하는 사람은 못 봤으니까. 정 그렇다면, 나는 김 부장을 귀찮게 할 생각이 없네.
건물이란 한 요소와 다른 요소가 균형을 맞춰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 아니겠나. 나의 주문 사항은 오직 그런 정도라네. 나는 아무 조건도 걸지 않겠네. 건축에 관한 한 무조건 김 부장한테 일임하겠네.”
“저도 다른 조건은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평면도와 입면도, 투시도 등 모든 걸 제시하고 자세한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때는 회장님께서 질문을 하실 수 있고 마지막으로 주문 사항을 지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 설계를 최종 승인하신 후에는 설계 변경은 있을 수 없습니다. 회장님이 머리에 그리고 있던 모습이 아닐 경우에도 말입니다.
제가 그걸 완성하기까지는 설계도를 열 번 쯤은 고치고 나서……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작업 과정에서 설계도 초안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설계대로 공사를 해야만 합니다. 공사 과정에서 제멋대로 설계 변경을 하는 걸 수없이 보아왔거든요. 그런데 우선 먼저 검토 위원회에서 이러저러한 말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내가 바로 원하는 조건일세. 그들의 의견에 대해서는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고 장님이 되고 말걸세. 만에 하나 설계에 변경이 있게 되면 나는 그걸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말걸세. 그리고 필요하다면 공사 감리도 그쪽에서 담당해도 상관없다네.
그럼 다 됐어.
필요한 자료는 회사에서 언제든지, 얼마든지 제공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 예산은 절약해야겠지만 최대한 허용하겠네.”
“제가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떤 건물도 흉내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독창성에 목을 매달지도 않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독창성 자체를 위한 독창성은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게나. 난 건축 비평가들의 쓸데없이 날선 비평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그러나 남한테서 꼭 훔칠 게 있거든 훔치게. 모방하지 말고 말일세.”
“그렇게 하겠습니다. 과감하게 훔치겠습니다.”
“다만…… 너무 궁금할 테니까…… 내가 자주 공사 현장에 나타날 걸세. 그러나 그 뿐이지 공사에 간섭하진 않을 걸세. 나는 지금 그것이 완공된 모습을 어서 빨리 보고 싶을 뿐이네. 그게 완공이 되면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가 될 걸세. 하지만 준공식에는 안 갈 거야. 그건 나를 위한 신전이 아니니까.”
“전 그때 잠깐 외국에 나가 있을 겁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거든요.”
“자네는 그럴 거라고…… 알고 있네.”

그는 길고 완만하게 굴곡진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서 올라갔다. 언덕 꼭대기에서 잡초만 무성하고 가자자리에 벌거벗은 몇 그루 버드나무들만 서 있는 넓은 대지와 맑은 푸른 하늘과 강을 바라보았다. 강 건너 도시의 거리와 건물 옥상에 황혼의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밤이면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시커먼 형체의 대지는 정적에 싸여 있었다. 아쉽게도 밤하늘에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문득 창백한 하늘에서 지상으로 쏟아져 내릴 듯 이울어가며 명멸하는 사막의 별무리들이 그리웠다.
그는 건물이란 그것이 자리 잡고 있는 땅의 일부이니까 벌써 열 번 넘게 찾아왔고 그때마다 정성들여 스케치하고 메모를 하였다. 그러고 나서 설계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설계 작업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났지만 제도실에 앉아 도면을 앞에 놓고 신속하면서도 능수능란하게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도면을 채우는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제도용 T직각자를 대고 무작정 선들을 이리저리 긋거나 뭉툭해진 연필을 들고 의미 없는 낙서들만 끄적일 뿐이다. 무수한 밤들을 지샜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우아르자자테에 다시 갔다. 배낭만 메고 훌쩍 떠났다. 일생일대의 설계 작업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시작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때는 설계도의 전체적인 윤곽이 꿈속에서처럼 매우 흐리고 불투명했다. 다만 그 건물은 수직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수평으로 눕혀야 한다는 것만 결정된 상태였다. 형태와 구조, 건물의 질감, 색상은? 그러나 백지의 종이 위에서 어떤 감각적 꿈틀거림도, 충동도, 욕망도, 환상도, 섬광도, 의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무기력하여 막막하고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제도판 앞에만 서면 팔은 돌처럼 굳어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까 모든 걸 철저히 파괴하고 해체해야만 할 것이다. 모든 걸 증오하고 왜곡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본능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보다 더 다르게 생각하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한다. 주제를 찾아야한다. 그리고 보다 분명하게, 보다 정확하게, 보다 격렬하게 다시 만들어야 한다.
……끝까지 오세요 떨어질 것 같아요 끝까지 오세요 너무 높아요 끝까지 오세요 그들은 왔고 우리는 그들을 밀어 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날기 시작했다…….
그는 그 폐허 옆 사막에 마치 고행을 하는 수행자처럼 천막을 치고 물과 빵만 먹으며 한 달을 보냈다. 그 폐허의 영혼과 신과 교감하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영적 교류를 통해 어떤 영감을 얻고자 했던 것일까? 사막에 파묻혀 있던 폐허를 2,000년 동안이나 지켜온 그 신은 지금 그에게 환영을 보여주고 어떤 계시를, 예언을, 암시를, 예술을, 주술을 내릴 수 있을까? 그 영감은 마법과 같은 힘을 갖고 있을 것인가?
사막에서 바람은 항상 기묘한 조화를 부린다. 지중해의 계절풍은 작은 언덕처럼 쌓여있던 바닥의 모래 무더기를 멀리 날려 보내버렸다. 자신이 수백 년 동안이나 쌓아 놓았던 모래를 말이다. 그래서 폐허의 정면 오른쪽 귀퉁이에 돌바닥이 군데군데 어렴풋하게 들어나 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깊은 호기심 때문에 모래를 쓸어내고 돌바닥을 두드려 보았다. 그러자 아래 지하공간으로부터 희미하게 공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힘겹게 금이 간 돌바닥을 들어내고 비록 고르지 못하고 여전히 모래가 발밑에서 서걱거리는 완만한 계단을 따라 왼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밑으로 내려갔다. 손전등의 불빛 속에서 일직선으로 뻗은 계단을 내려서자 낮은 천장의 긴 터널이 뻗어있고 그 끝에 동굴 같은 것이 보였다. 아직 그렇게 멀리까지 온 것 같지는 않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리 감각을 잃은 것이다. 그는 암흑의 심연에 빠진 느낌 또는 존재의 공허 속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동굴 속은 매우 음산하다. 오싹한 느낌. 깊은 동굴이 내뿜는 공포와 신비감. 천장에는 거미줄이 촘촘하게 얽혀있고 새까만 괴물의 모습을 한 거미들이 가늘고 긴 다리를 건들거리며 느릿느릿 기어 다니고 바닥에는 사막 쥐와 전갈, 지네, 개미 떼 등이 재빠르게 지나다닌다. 벽면에는 온통 빙 둘러서 다양한 동물 조각상들이 부조로 새겨져있다. 그 동굴 속에는 처음에는 뭔지 알 수 없는 하얀 돌무더기들이 모래에 묻혀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들은 수많은 사람 해골과 뼛조각이었다. 손전등의 예리한 불빛이 하얀 해골을 한 망가진 얼굴을 훑었다. 해골들의 눈구멍 속에 있었던 빛났던 눈동자들은 이미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해골과 뼈에는 예리한 쇠로 찔린 흔적이 남아있다. 그것은 꿈도 아니었고 환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도 아니었고 바로 신비한 것이고 신성함이었다. 그는 그때 온몸이 거의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 말했다. 2,000년 동안이나 여기 계셨군요. 누굴 기다리고 있었나요. 저 멀리, 이 세상 끝인 동양에서 온 사람을……. 당신들은 불멸성을 획득한 신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이제 끝났습니다. 죽음 대신에 빛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세상의 왕’도 타지마할의 공사가 끝났을 때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무어인의 조상들이다. 스페인에서 알람브라 궁전을 지었던 무어인들의 조상.
그들은 이 폐허의 유적을 설계하고 건축 공사를 담당했던 건축가, 공사현장의 감독관 그리고 공사장 인부, 노예들이었다. 그 건축물이 완공되자마자 왕은 그들 전부를 죽이도록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 건물의 비밀이나 시공기술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건 봉인된 신의 비밀이어야만 했다. 그 건물을 설계하고 총감독했던 위대한 건축가는 아주 흔쾌한 기분으로 집행자의 칼날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는 말했을 것이다. 폐하, 저는 기쁜 마음으로 먼저 갑니다. 폐하, 우리 폐하, 감사합니다. 저 신성한 것이 마침내 축성을 끝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마땅히 죽어야 하지요. 폐하께서는 만수무강하십시오.
이 편집증 환자는 침묵과 명상 속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시도하였다. 건축가가 항상 비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지요. 완벽을 추구하는 일은 미친 짓이 아닐까요. 어떻게 대자연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상력에 제한을 두지 않는 독창적인 건축정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 예술가적인 영혼과 심장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저에겐 오래 전에 그것이 고갈되어 버렸던 것이지요. 벌써 말입니다. 저에게 오직 건축의 본질만을, 생명력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순성과 간결성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는 지금 기교나 장식,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다시 강박증에 시달리고 신경과민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카타르시스와 함께 헌신과 열정을 불러일으켜 주십시오. 제가 이 일을 끝마쳤을 때 가슴이 텅 비고, 슬픈 느낌이면서도, 행복함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어떤 장엄한 목소리가 말했다.
“네가 이것만은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모래에 묻혀서 폐허가 되었지만 그때는 오아시스였었지. 999개의 샘에서 물이 솟구쳐 나와 생명수를 공급했으니 99만 그루의 대추야자나무와 올리브나무들이 녹색의 성벽처럼 오아시스를 두르고 있었고, 울창한 농장에는 무화과, 오렌지, 살구, 포도와 갖가지 열대 채소가 자라고 있었으니 새들과 나비들과 꿀벌들이 끊임없이 날아다녔지. 천국이 따로 없었지. 숭고했고 장엄했고 평화스러웠어.
그 건물의 기초를 쌓을 때 나는 수천 마리의 양들과 낙타들 그리고 수백 명의 인간을 땅속에 매장하였느니라. 건물의 무게를 지탱하려면 땅의 신에게 산 재물을 바쳐야만 하였다. 나는 오직 그 훌륭한 건물이 가혹한 기후를 견뎌내고 끝내 무너지지 않고 영원하길 빌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신의 분노를 잠재울 수가 없었으니……
그 성전은 멀리서 보면 우뚝 솟은 사막의 모래언덕처럼 자연스럽게 보였지만…… 그렇지, 너무 자연스러워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 했었지……. 한낮의 태양 아래서는 눈부시게 하얗고, 해가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석양 속에서는 분홍빛이거나 빨간색, 마침내 노란색이거나 푸른색이었고, 저녁 해와 함께 서쪽으로 떠나갈 때 그 색채들은 흐느끼며 환호하고 슬픈 노래를 불렀고, 땅거미가 완전히 질 때부터는 완벽한 암흑이었고, 달이 뜨는 밤이면 창백한 얼굴이었고, 여명의 동이 틀 때 즈음에는 핏빛을 띄었지. 이곳에도 가끔 비가 내리거든…… 정말 가끔. 휘몰아치는 비가 잠깐 동안 소용돌이치며 거친 자갈땅에 쏟아진 거지. 그럴 때는 어두운 뇌운 사이로 희미하게 어른거렸지. 번갯불이라도 번쩍이면 그 불빛에 붉게 타올랐고…….
이 성전은 검게 그을린 주춧돌만 남았으니 어쩌겠느냐. 그 모든 것이 침묵과 고독 속에 남아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러갔으니 나는 그 시간들을 기억조차 할 수 없느니라. 전체적으로 구조물은 돌로 된 둥근 기둥들에 의해 떠받쳐지고 둥근 기둥마다 촘촘한 간격으로 들보가 올려져있었지. 그러나 건물의 구조와 형태에 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느니라. 그 설계도를 복원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게야. 사색에 몰두하라. 그리고 상상력의 날개를 마음껏 펼쳐라. 그러면 내 가슴 속에 그 넓이와 형태가 환하게 떠오를 것이다. 왜! 아니겠느냐!
그리고 말이다…… 건물이 완공된 후 나는 마지막 희생 제물이 되었느니라. 그게 나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왕의 지엄하신 분부에 따라 흑인 노예의 빛나는 칼날이 어지럽게 눈앞을 어른거렸던 것만은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느냐.”
사막의 낮은 지독히도 더웠다. 그는 사막 여행가였으므로 이를 참고 견디는데 익숙하였지만 그러나 사막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한 달이 지나자 공포와 두려움에 쌓여서 일시적으로 정신착란에 빠지고 환각과 환상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축복이 있으라, 축복이. 그날 밤 초승달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자신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는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서 최면 상태와 같은 황홀경에 빠졌다. 그는 목구멍에 무슨 덩어리가 걸려 있는 것 같은, 배 속과 모든 내장이 꼬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가슴이 메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는 가슴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흥분을 간직한 채로 귀국했다.
그는 설계도면에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서 세밀한 손놀림으로 자신의 집중력과 인내력을 시험했다. 그리고 다른 곳을, 멀리 있는 것을 바라보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선택했다. 그는 계속적으로 몰입했다. 그 시간 동안 자신이 하는 일을 잊어버렸다.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진 것이다.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린 무아無我, 망아忘我, 허심虛心의 상태가 되었으니 연필을 쥔 손이 전혀 내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손은 설계도면에서 저절로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느리게 빠르게. 때로는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흐뭇한 감정이 온몸을 타고 흘러 내렸다. 하지만 건물이 어느 정도 완성되고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쯤 그는 아연실색하였다.
그 건물은 그의 독창성인 아이디어에 따라 창조적으로 설계한 것이 아니라 우아르자자테 건물의 완벽한 재현에, 몇십 배로 확대한 것에 불과하였으므로 의문의 여지없이 진정한 모사품이었다. 그러므로 그 폐허의 유적에서 묻어나는 울림이나 감동, 소리, 무게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니 그는 자신의 건축 미학에 따라 현대적으로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폐허의 외형과 윤곽선과 이미지와 일치하되 건축 재료는 현대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설계를 한 것이다. 그는 색에 극도로 민감하지만 황토빛 사막색을 특히 좋아했고 건물 내부에는 물 흐르듯이 흐르는 고불고불한 미로를 좋아했다. 다만 기술적이고 세부적인 사항은 회장님이 기본 설계를 할 당시 넌지시 요구한 사항을 충분히 반영하였는데 그들 사이에 견해 차이는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한 의견 일치를 본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은 결국 복제품밖에 만들지 못할 거였다. 어떻게 인간이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예술이나 문학, 건축에서 순진한 의미의 창작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는가. 원래 진정한 창조 행위는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이어서 오직 신만이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산 또는 재생산할 뿐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말했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의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신은 그 신비한 비밀을 그대로 내뱉는 법이 없다. 모호하고 다의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그래서 오독할 수밖에 없는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막에 밤의 어둠이 내리면서 모래바람이 가볍게 회오리를 일으키며 대지를 휩쓸고 지나가는 소릴 들을 수 있었다. 초저녁 밤하늘에는 어느새 쏟아져 흘러내릴 만큼 무수한 별들이 반짝일 것이다. 밤이 깊으면 금실과 은실의 은하수로 수놓은 하늘에는 노란색인 레몬빛 별들도 있고, 핑크빛이나 초록빛 혹은 파란빛이나 물망초빛을 띠는 별들이 저마다 빛나리라. 지금 모래무덤 속에 누워있어서 그 마지막 별빛을 볼 수 없어서 너무 유감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밤하늘에 빛나는 무수한 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이번 여행에서처럼 그 별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인 적이 없었다. 밤하늘에서 수많은 작은 미소들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위안을 얻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가서 티끌처럼 작은 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 작은 별은 빛이 너무 희미해서 지상에서는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 저녁, 그녀는 여자의 몸뚱아리에 불과했어. 흔들리는 검은 머리가 얼마나 탐스러웠던가. 나는 얼마나 헐떡거렸던가.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강렬한 육체적 욕망이 나를 덮쳤었다. 나는 그녀를 눕힐 수 있었고 원피스의 단추를 풀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연거푸 독한 술잔을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었고 그 일시적 통증 같은 욕망을 가라 앉혔다. 나는 여전히 경계선을 넘을 수 없었다. 개뿔이나 그게 순수한 사랑이었다고? 솔직해지자고. 그것은 자기 억제가 아니라 자기기만에 불과했던 거야.
밤의 한기가 담요를 덮고 있는 삐쩍 마른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 지독한 추위도 이제 마지막이야. 그는 지금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숨을 가냘프게 호흡하고 있었다. 이 순간 부드러운 모래더미 위에 허깨비 같은 몸을 뉘이고 결국 성취하지 못할 꿈을 되새기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한심하였다.

이곳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곳에 있으리라. 그곳에 있는 것이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있으리라. 이곳에 있는 것과 그곳에 있는 것이 차이가 있다고 보는 자는 영원히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길을 걸으리라.
참된 마음만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으니, 그곳은 이곳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나는 죽기 바로 전에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진리의 빛을.
깨달음과 함께 오는 확신의 순간.
자신이 옳다는 절대적 믿음이 불현듯 밀려오는 순간.
순수한 사랑, 순수한 창작물에서 순수란 무엇인가? ‘순수한’ 또는 ‘순결한’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 신인들 지고지순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혼탁한 인간의 삶에서 그게 어떤 깊은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순수는 실체가 없는 허울이다. 그것은 지나친 사치이다.
가면. 위선. 자기기만.
남녀 간의 사랑이 무엇이었던가? 정열적인 불꽃? 고통과 이별? 그러나 나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헌신을 꿈꿨던 것인가? 오로지 정신적인 사랑. 육욕의 억제. 금욕, 금욕적 투쟁, 극기와 자기희생. 개뿔이나 그게 무슨? 사랑은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건축가 역시 영원히 지속되는 아름다움의 원천, 실존적 본질인 원형,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이 설계했을 그것을 모방해야만 하는 것이다. 신이 바로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미지의 세계이고, 그래서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절대선이고 완전함의 표상이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고, 재
작성일:2016-05-26 10:59:04 121.135.238.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