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홍기 변호사/법무법인(유한) 에이펙스 대표변호사
민홍기 변호사/법무법인(유한) 에이펙스 대표변호사

공전(空轉)되는 사건을 포함하여 2~3건의 기록을 들고 오전 10시경 그 당시 서소문에 있던 서울민사지방법원(그 때는 지방법원이 민사와 형사 2개로 나뉘어져 있었다) 법정에서 순서가 되기를 한참을 기다린다. 도중에라도 나이 많으신 선배 변호사님이 들어오면 순서를 양보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실제로 꽤 많은 원로 변호사님들은 법정에 들어오셔서 진행 중인 재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진행하기도 하였다. 재판장을 포함하여 순서를 기다리던 변호사 어느 누구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변호사들이 빠져나가고 난 후, 겨우 순서가 돌아와 그야말로, ‘번개 불에 콩 구워먹듯’ 오전 재판을 끝내고, 법정을 나선다. 바로 사무실로 돌아가기가 아쉽고, 혹시 친분있는 동료 변호사라도 만날까 하여 당시 대법원(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옆 건물 2층에 있던 ‘변호사공실’(현재 법원에 설치되어 있는 ‘재판준비실’과 비슷한데, 휴게실에 좀 더 가깝다)에 슬쩍 들러본다.

그곳에는 머리에 서리가 아니라 눈(雪)이 내려, 쳐다 뵙기가 눈(目)이 시린 원로 선배 변호사님 두세 분이 벌써 재판을 끝내고 앉아서 한담을 즐기고, 다른 분들은 바둑판을 앞에 놓고 수담을 나누시고 계신다. 쭈뼛쭈뼛하며 다가가 무조건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를 한다(마음속으로, ‘저도 변호사거든요!’ 하면서).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맞아 주시는 그 얼굴이 마치 친할아버지 같다.

“영감(그 당시에는 손 아래로 보이는 후배 법조인을 보면, 선배님들은 꼭 그렇게 불렀다), 변호사를 하면서는 항상 감사해야 하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누구한테요?”

“예를 들자면, 영감이 원고 대리인이라면 피고한테 감사해야 한다는 말이지.”

“원고가 아니라, 피고한테요?”

“영감, 의뢰인인 원고 말대로라면, 피고가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주장을 하며 원고의 정당한 청구를 거절 하고 있는 셈 아닌가?”

“그렇지요.”

“그런 어리석은 피고 덕에 사건을 수임할 수 있었으니, 변호사로서야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럼, 피고 대리인라면, 원고에게 감사해야 하겠군요! 되지도 않는 소송을 걸어 주어 사건을 수임하게 되었으니 말이죠.”

“아니지, 영감 잘 생각해보게. 원고가 직접 소를 제기한 경우에는 피고도 만만하게 보고 나중에 결과야 어찌되든 대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저 혼자 재판을 하지 않나? 허나, 원고가 변호사를 선임해서 소를 제기하거나, 중간에라도 변호사가 선임되면, 피고는 ‘어이쿠, 안 되겠군!’ 하며 변호사를 수임하게 되니, 이번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원고 주장을 가지고 소를 제기하였거나 맡아 주신 원고 대리인에게 감사하여야 하지.”

“아하! 그렇군요, 그렇군요!”

“그러니, 법정에서는 항상 상대가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더라도, 그 덕에 사건을 수임한 것이니 절대로 언성을 높이거나 인상을 써서는 안 되고, 늘 온화하게 미소로 응대하여야 하네. 물론 법정 밖에서도 마찬가지지! 요즘 젊은 영감들은 이런 간단한 法理(?)조차 깨닫지 못한 것 같아.”

“선배님, 그래서 며칠 전 한 선배님께서 법정에서 나오시면서 ‘변호사가 말이야, 當事者化가 돼 가지고, 이거야 어디……’하면서 혀를 끌끌 차신 거로군요.”

“當事者化! 바로 그거야. 대리인인 변호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지. 사건에서 제3자인 변호사가 當事者化되어 흥분하고, 언성을 높이고, 준비서면 등에서 상대방 나아가 상대방 변호사까지 싸잡아 험한 표현을 써가며 비난하고, 심지어 재판에 지기라도 하면 의뢰인과 함께 담당재판부까지 원망을 하고, 이래서야 어디 쓰겠나?”

“그래도, 열심히 하려다 보면, 의뢰인의 주장을 믿고, 그의 사정과 처지를 동정하게 되다 보니, 그런 것이려니 하고 이해할 순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변호사란 사람이 몇 푼의 수임료와 자신의 인격을 바꿀 순 없지 않은가?”

“연수원 수료하고 나서, 곧바로 변호사 하려니 힘들어요, 사실.”

“그 점은 이해하네, 곳간이 차야 예절을 아는 법이긴 한데……. 허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네만, 변호사 일을 해서 받은 수임료로 큰 부자가 되긴 어렵네. 하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처자식 배곯게 하는 일 또한 없을 것일세. 나라에서 변호사 자격을 주면서 최소한 그 점은 해결해 준 셈이네. 자넨 젊으니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네, 그러니 절대로 서두르지 말고 ‘무리’하지 말게. 그리고 남들이 돌보지 않는 것에도 늘 따뜻한 관심을 가지시게. 허허, 내가 너무 주책을 떨었구먼.”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것으로 난 내가 변호사로서 배워야할 변호사의 法理를 다 배웠다.

 

 

/민홍기 변호사

법무법인(유한) 에이펙스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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