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시론] 입증책임원칙의 남용과 소극적 오판

2025-11-24     김주영 변호사
△ 김주영 변호사

입증책임이란 어떤 권리 또는 법률관계의 존부를 판단함에 필요한 사실을 법정에 현출된 일체의 자료에 의하여도 결정할 수 없을 때 법원이 어느 당사자에게 불리하게 판단함에 따라 그 당사자가 입게 되는 불이익을 의미한다. 민사재판에 있어서 어떠한 사실이 증명되지 않을 경우라도 법원이 진위불명이라는 이유로 재판을 거부할 수는 없기에 입증책임원칙은 민사소송법의 핵심 원칙에 해당한다.

입증책임의 소재가 다투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일반적으로 입증책임의 분배원칙은 단순하다. 민사소송에서 원고는 청구원인사실의 입증책임을 부담하는 반면 피고는 항변요건사실의 입증책임을 부담한다. 따라서 민사재판에 있어서 당사자들의 변론은 결국 자신이 입증책임을 부담하는 요건사실에 관한 증거를 최대한 확보하여 법관으로 하여금 해당 사실을 인정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심증을 형성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입증책임원칙이 그 존재 의의를 살려서 적정한 재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요건사실의 입증에 필요한 증거가 법정에 충분히 현출될 수 있어야 한다. 민사법정에 증거가 충분히 현출되지 않는다면 입증책임원칙은 진실을 가진 쪽이 이기는 대신 증거를 가진 쪽이 이기는 재판이 되게 하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다. 증거를 가진 쪽이 입증책임을 지는 상대방의 입증을 방해함으로써 진실에 반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양극화의 심화, 디지털화로 인한 정보의 집중, 기술격차의 확대로 인해 대기업, 플랫폼으로 대변되는 강자와 개인, 소비자로 대변되는 약자 간의 정보 비대칭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정보비대칭이 낳는 증거편재현상의 시정되지 않을 경우 입증책임원칙은 약자에게 가혹하고 부당한 결론만을 강요할 뿐이다.

둘째로 법관들이 자유심증주의에 입각에서 적극적으로 사실인정을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 민사소송법 제202조는 “법원은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조사의 결과를 참작하여 자유로운 심증으로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라 사실주장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판단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민사소송법은 법관들이 사실주장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적극적으로 판단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법관이 시시비비를 적극적으로 가리려 하지 않고 걸핏하면 진위 불명이라는 이유로 입증책임원칙에 의존하려 한다면, 입증책임원칙은 법관이 입증책임 당사자에게 불리한 판결을 강요하는 손쉬운 도구로 작용할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법관들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전문화되는 분쟁구조 하에서 모르는 영역에 적극 개입하면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심리적 부담을 느끼기 쉽다. 그래서 가급적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소극적 판단할 유인이 크다. 즉 어떠한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기 보다는 ‘단정지을 수 없다’는 식의 소극적 판단으로 회피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 또한 입증책임원칙의 남용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영미식 디스커버리제도를 갖고 있지 않아 증거를 가진 상대방에게 해당 증거를 제출하도록 강제할 수단이 미약하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증거의 우세함(preponderance of evidence)’이라는 증명도 기준을 채용하는 영미와는 달리 ‘고도의 개연성(highly likelihood)’이라는 기준을 채용하고 있다. 즉 영미에서는 입증책임을 지는 자가 ‘어떤 사실이 부존재한다기보다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정도’의 증거를 제출하여 배심원들에게 ‘50%+α’의 확신만 심어주면 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입증책임을 지는 자가 법관들에게 십중팔구 즉 ‘80%에서 90%’의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고와 피고가 증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제출하는 능력에 큰 차이가 없다면 오판 가능성은 정규분포를 형성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원피고를 오판 위험에 동등하게 노출시키는 ‘증거의 우세함’ 기준이 보다 정의로운 결과를 가져오는데 증명도의 수준에 관한 우리 판례는 입증책임을 지는 자에게 너무 불리하다.

입증책임은 주로 권리 구제를 원하는 개인, 약자가 부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 민사소송제도는 이들에게 강자가 가진 증거를 확보할 수단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에게 80~90%의 고도의 개연성 수준으로 입증하라고 하니 법적 구제가 이루어져야 할 사안에서 구제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소극적 오판’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

입증책임원칙은 소극적 오판을 하게 하는 구실로 남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입증책임원칙이 남용되지 않도록 법정에 충분한 증거가 현출될 수 있도록 하는 디스버리제도의 도입, 자유심증주의하에서 요구되는 증명도 수준에 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

/김주영 변호사
법무법인 한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