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말해도 처벌”… 미투·공익제보 막은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되나
이주희·박주민·김용민 민주당 의원, ‘폐지’ 개정안 발의 이재명, 법무 장관에 “폐지 검토” 지시… “민사로 해결” 배드파더스·미투 땐 제보자들 되레 고소·고발된 사례도 “관건은 ‘균형’… 손배 기준 명확히·허위사실 처벌 강화”
진실을 말해도 처벌받을 수 있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폐지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관련 법안을 잇따라 발의했고 이재명 대통령도 폐지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어 오랫동안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표 ‘악법’으로 비판받아 온 해당 규정이 사라질지 이목이 집중된다.
22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주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2일 정보통신망에서 사실을 적시했다는 이유만으로 형사처벌 하는 조항을 삭제하는 내용의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또 같은 당 박주민·김용민 의원 등은 앞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골자로 한 형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개정안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삭제하고, 명예훼손의 경우 ‘고소가 있어야 공소 제기’가 가능한 친고죄로 바꾸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형법의 일반적 명예훼손 규정과 정보통신망법의 온라인 명예훼손 조항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삭제를 골자로 한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해당 범죄는 법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여당인 민주당에서 이같은 개정안을 잇따라 발의한 것은 이재명 대통령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검토할 필요성을 언급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정성호 법무부 장관에게 “이번 기회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폐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있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명예훼손이라고 하는 건 민사로 해결해야 할 일 같고 형사처벌 할 일은 아니”라며 “독일이나 해외 입법례를 참고해서 시간이 걸리지 않고 빨리 (개정)하면 좋겠다”고 밝혔다.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 규정은 1953년 형법이 제정될 때부터 존재했다. 정보통신망법에는 2001년 7월 해당 법이 개정되면서 신설됐다. 사실을 말해도 형사처벌 하는 것을 두고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며 공적 사안에 대한 정당한 비판과 감시 기능을 위축시킨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됐다.
대표적 사례로 ‘배드파더스’ 사건이 꼽힌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의 실명을 공개했던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수사·재판을 받아야 했고, 일각에서는 이를 ‘전형적인 전략적 봉쇄소송’이라고 비판했다. 전략적 봉쇄소송이란 고소·고발로 이슈 확산을 막고 사회·정치적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법적 대응을 말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나도 당했다”고 밝히며 문제 심각성을 알리는 사회적 운동이었던 ‘미투(MeToo)’에서도 피해 사실을 공개한 당사자들이 되레 고소당한 일이 수차례 벌어졌다.
OECD 국가 중에서도 사실을 말했다고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는 미국은 형사 명예훼손죄 자체가 대부분 폐지됐고, 공직자나 공인에 대한 비판은 ‘악의(actual malice)’가 입증될 경우 손해배상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 형법은 ‘타인의 인격적 가치를 저하시킬 수 있는 사실을 적시하고, 그 적시한 사실이 진실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행위자는 본 죄로 처벌한다’고 규정했다.
국제 인권기구들은 대체로 “명예 보호는 민사로도 충분하며, 형사처벌은 과도한 위축 효과를 초래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2011년 유엔인권위원회와 2015년 유엔 산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위원회에서는 한국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규정 폐지를 권고하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기 위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비범죄화 또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이들 기관의 설명이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손보려는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국회에서는 지난 10여 년간 폐지·수정 법안이 반복적으로 발의됐다. 하지만 번번이 “개인 사생활의 비밀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 등 반대에 부딪혀 논의가 진전되지 못한 채 대부분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헌법재판소 2021년 해당 조항에 대해 합헌으로 판단했다(2017헌마1113). 당시 헌재는 “명예는 회복이 어려운 인격적 가치이며 형사 처벌이 예방 효과를 가진다”고 했다. 하지만 재판관 4명은 반대의견에서 “자신의 표현행위로 수사·재판절차에 회부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축효과는 발생할 수 있고, 이후 수사·재판절차에서 마주하게 될 공익성 입증의 불확실성까지 고려한다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효과는 더욱 커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헌재에서도 당시 위헌 여부를 놓고 의견이 팽팽했고 당정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비범죄화를 추진하고 있는 만큼, 이번에는 해당 조항이 실제로 폐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지만 해당 규정 폐지에 대한 반대도 거세다. 특히 국민의힘은 오히려 처벌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종배·고동진 의원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법정형을 현행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 벌금’에서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 벌금’ ‘7년 이하 징역 또는 2억 원 이하 벌금’으로 상향하는 내용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각각 발의했다.
법조계는 관건은 ‘균형’이라고 강조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비범죄화 하기 위해서는 손해배상 기준을 명확히 하는 등 민사적 구제 수단을 강화하고 허위 사실에 대한 명예훼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등 조치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민사적 손해배상 기준을 보다 명확히 하고 피해 회복 절차를 강화해 형사적 공백을 보완해야 한다”며 “폐지 이후에는 ‘사실을 앞세운 악의적 폭로’가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는 만큼, 공익과 무관한 고의적 신상공개나 음해성 폭로를 처벌하는 별도 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가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