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인 열전 ①

인권변호사 조영래의 삶


조영래는 1947년 3월 26일 대구에서 출생, “방천가의 빈민가”를 옮겨 살다가 서울에 가족이 이사왔으나 가난은 여전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천재 소년이었다.

1965년 3월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 입학하여 전국에 이름을 날렸다.

고학으로 쪼들리는 시간 속에서도 고등학교 3학년 때는 한일회담반대시위를 주동하여 정학처분을 받기까지 하였다. 부정한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적 학생활동을 계속하였다. 1969년 2월에 졸업할 때까지 한일회담 반대, 삼성재벌 밀수규탄, 6·7부정선거규탄, 삼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공명선거쟁취 등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서울법대가 학생운동의 본거지처럼 되었다.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중에 전태일분신사건이 발생하였으며 그 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피신생활을 하면서 3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전태일 평전 -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여 출간하였다. 민중과 대학과 교회가 연결되어 정치권력에 저항한 전태일 사건에 조영래는 평생토록 스스로 “제2의 전태일”처럼 살고자 했다.

1971년 2월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재학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기소로 1년 6월의 옥고를 겪었으나 또 다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6년 가까운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1980년 3월 이른바 ‘서울의 봄’ 때 수배가 해제되어 사법연수원에 재입학하고 1982년 2월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35세라는 나이로 늦게 변호사를 개업했다.

1984년 9월 서울의 대홍수 때 망원동 유수지의 배수갑문이 무너져 한강물이 역류해 일대 5천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 그는 국가와 서울시를 상대하여 2,000여 가구 수재민의 소송을 맡아 심혈을 기울여 3년여의 법정투쟁 끝에 승소로 이끌었다. 우리 사법 사상 최초의 주민집단소송이었다. 대한변협의 인권위원으로 인권보고서 집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독재정권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실었고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으로 인권수호를 주장하는 힘있는 글도 많이 발표하여 글을 잘 쓰는 변호사로 알려졌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설에도 간여하였다.

그 후 1985년부터 각종 노동사건의 변론에 골몰하였고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사건의 변론으로 몸을 혹사했다. 보도지침사건 변론, 진폐증 보상사건 등 노동, 빈민, 공해, 학생관련 사건 등을 맡아 열성적인 변론을 해 왔다. 그야말로 눈부신 활동이었으나 자신도 말했듯이 괴롭고 무리가 가는 사건들 처리라는 격무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학생운동가, 반독재투쟁가, 인권변호사, 문필가였다. 그러나 그는 1990년 9월 초순 청천벽력같이 폐암 3기의 진단을 받고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같은 해 12월 12일 43세로 타계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불태워 간 빛나는 정신 그리고 그의 연구 및 행동의지, 정의를 향한 정열은 시민이 바라는 법조인상으로 영원히 남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울대 안경환 교수도 이러한 조영래 변호사의 삶을 자료로 남기기 위해 ‘조영래 평전’을 펴냈다. 그 내용은 1. 성장 2. 학생운동과 조영래 3. 전태일과 함께 10년 4. 인권변호사 조영래 5. 좌절과 새 길의 모색 6. 인간 조영래로 구성되어 있으며 격동의 역사에 ‘분별있는 열정’의 삶을 살다 간 지성인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 김이조 변호사·서울지방변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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