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회화대전 등 입상한 실력파, 은퇴하면 그림그리며 살 것
지회 중심 강원회, 강원회 중심으로 다시 뭉쳐 한목소리 내겠다
의정부 법원 관할 철원, 춘천 법원 강원회 소속으로 돌려받고파

대한변협신문에서는 직선제 협회장 출범을 기념하여 14개 지방회 회장들에 대한 마라톤 인터뷰를 실시하고 있다. 이제 그 끝이 보인다. 14명 중에서 3명이 남았다. 강원회 회장, 경기북부회 회장, 인천회 회장이다. 박신애 편집장이 인터뷰를 담당하다가 그만둔 이후 신문편집위원회 위원들이 돌아가면서 인터뷰를 이어 오고 있는데 편집위원회 위원들에게 지방에 내려가 인터뷰를 부탁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 남은 세분에 대해서는 공보이사인 내가 인터뷰를 하기로 하였다. 그 세분 중 나의 첫 인터뷰 대상이 바로 강원회 회장 박수복 변호사다. 박수복 회장을 강원회 사무실이 아닌 산에서 만났다. 표면적으로는 회장님과 나의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생각하니, 그는 산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그를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났다면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박수복 회장을 강원도의 산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정확하게는 그의 주말산행 팀에 내가 합류를 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 다들 산을 찾듯이 나도 산을 좀 타다가 무릎에 부담이 된다는 핑계로 산행을 접은지 꽤 되었다. 그래서 완전 동반산행이 아니라 그의 팀이 하산할 때 내가 합류하는 방법을 택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하여 산을 약간 오르면서 무슨 말로 인상적인 나의 첫 인터뷰를 시작할까 고민을 해보았다. 그래서 고른 첫 질문이 “왜 서울에서 변호사 잘하시다가 춘천으로 가셨죠?”였다. 그가 연수원 14기이니 그 당시는 지금과 비교하면 변호사의 황금시대다. 그의 고향이 강원도 홍천이기는 하지만 부인이 행시에 붙은 보건복지부 공무원인 것을 고려하면 의외의 선택이다. 대답은 솔직하고 심플했다. “주위 사람들이 고향에 내려가서 정치를 하라고 권해서 겸사 겸사 춘천으로 내려가서 개업을 했는데 조금 준비해보니 정치는 나와 맞지 않아서 정치에 대한 꿈은 접었어요.” 그와는 일전에 지방회 회장님들과 상임이사간 상견례 할때 악수를 한 것과 이번에 함께 산행을 하고 내려와 막걸리를 마신 것이 우리 만남의 전부이지만 그가 정치를 비켜간 것은 잘한 선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을 어디에서 만나서 이야기 하는지에 따라서 유효적절한 질문은 참 많이 다르다. 내가 강원회 회장님을 만나러 달려간 것이니 변호사회 회무에 대한 질문을 많이 준비했다. 그런데 산행길에 그런 질문들은 부적절해 보이거나 뒷전이었고, 내가 날린 두 번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상당히 발걸음이 가벼우신데 산을 좀 타셨나요?” 그는 함께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면서 부처님처럼 웃으면 답한다. “1993년에 첫 종주를 완수하고 지금까지 백두대간 종주를 3번이나 했으니 산 사나이라고 할 수 있겠죠.” 백두대간 종주는 보통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 대간의 구간을 끊어서 등산하는 것이니 인내와 체력 그리고 함께 등산할 도반도 필요한 대형 프로젝트다. 그래서 평생 한번 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는 그 백두대간 종주를 세 번이나 한 것이다. 오늘 산행에 오른 분들도 함께 백두대간을 등산하던 팀이란다. 그의 말을 듣고 앞서가는 백두대간 일행들을 보니 강원회 회장님보다 연배가 많으신 분들이 더 많은데 사람들이 달라 보인다. 아마 산이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사실 인터뷰하러 평일날 춘천까지 내려오는 것이 쉽지 않아 아무 생각없이 “주말에 가볍게 산행이나 하면서 인터뷰 하시죠”했던 것인데 그를 변호사회 사무실이 아닌 산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둘이서 산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생각하니 박 회장의 수더분한 스타일로 봐서는 그는 산행과 하산 후에 즐긴다는 술자리 이외에는 특별한 취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예의상 물었다. “본업빼고, 산행빼고 평소에 즐기시는 비장의 카드는 없나요?” 그의 눈이 처음에 산을 물을 때보다 더 빛났다. 우리가 이 대화를 주고 받을 때 쯤에는 거의 하산하여 냇가에 앉아 땀을 식힐 때다. “매주 산에 가서 과음을 하니까 집사람이 임의로 문화센터에 그림강좌를 접수하고 다니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울며 겨자먹기로 그림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산보다 그림에 더 빠졌어요.” 그러면서 자신이 그린 그림 몇 점과 전시회 사진을 보여준다. 취미 수준의 그림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 그림들이 예사롭지 않다. 내가 그림은 조금 본다. 그래서 추궁을 했더니 이미 한국회화대전 등에 몇 번 입선을 했단다. 한두 번만 더 수상을 하면 공인된 화가가 되는 것이다. 재미난 것은 지금 보건복지 비서관으로 청와대에 근무하시는 사모님도 작가 수준의 그림 실력자라고. 두분이 부부 공동전시도 계획하고 있다. 지금 청와대에 근무하시는 사모님이 너무 바빠 그 시기가 좀 늦어질 것 같단다.

사실 그가 무척 부러웠다. 작년에 드라마작가가 되어 보겠다고 작가과정 초급반을 듣다가 나의 한계를 느끼고 반포기한 나에게 그의 삶의 두축 ‘등산’과 ‘그림’은 매력적인 인생의 후반기 막강 장비로 보였기 때문이다. 은퇴하고 전문 작가로 나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질문을 드렸더니 이 장면에서는 겸손하지 않다. “그러지 않아도 변호사 수가 많아서 다들 먹고살기 힘든데 기회가 되면 빨리 그림이나 그리고 산이나 오르면서 살려고 합니다.” 말을 느리게 하고, 어눌하게 하는 것 같은데 그 말에 힘이 있다.

이제 산행을 마무리 하고 산초입의 막걸리 집으로 옮겨 인터뷰를 이어간다. 나머지 일행은 삼겹살집으로 가고 우린 인터뷰를 마치고 합류하기로 하였다. 산행도 마쳤고, 술기운도 도는 김에 이제 변호사 사는 이야기 좀 하자면서 화가가 아닌 강원회 회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로스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강원대 로스쿨과 사이가 좋으세요?” 그는 로스쿨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대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돈없는 사람들도 변호사가 조금은 쉽게 되는 방식인 사법시험제도도 존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연수원 40기 이후 변호사 중 춘천에 개업한 사람은 없는데 로스쿨 1기 변호사 몇 명이 개업해서 고전하는 것을 보면서 선배변호사로서 청년변호사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뾰족한 방법이 없어 미안하다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강원회는 전체 변호사 수가 100명 정도로 아주 적은 규모의 변호사회이고, 다시 춘천, 원주, 강릉과 속초, 영월로 각 지회들이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강원회가 있는 춘천에는 약 30명 정도의 변호사만 있다. 그래서 강원회는 대한변협이나 서울회처럼 매주 상임이사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몇 번 이사회를 개최하여 주요한 결정을 하고, 회무는 지회 위주로 가족적인 분위기로 운영되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려는 마음으로 강원회에 대하여 회장으로서 바람은 없는지 물었다.

“강원회는 다른 큰 도시와 비교하여 매우 가족적인 분위기의 변호사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강원도도 이제 각 지회 변호사 수가 늘어나면서 강원회라는 동질성보다는 각 지역의 특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들의 입장을 이해는 하지만 우리가 강원회라는 이름으로 뭉쳐야, 다시 각 지방변호사회가 대한변호사협회라는 이름으로 단일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하나 더 첨언하자면 법원과 협의해야 하는 사항이지만 의정부 법원 관할로 되어 있는 강원도 철원을 이제 춘천법원으로, 강원회로 돌려받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스스로 이런 복잡한 세상사는 이 좋은 경치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화제를 바꾼다. 나는 이날 백두대간팀과 어울려 아주 흥겹고 행복한 술을 마셨다. 인터뷰를 마치고 술기운을 느끼며 서울로 돌아오면서, 나는 강원회 회장을 만나고 온 것이 아니라 산악인이자 화가인 대인(大人)을 만나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꽃보다 술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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