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대 대법원장님들 중 세상을 떠나신 초대 대법원장이시던 가인(街人) 김병로 원장과 조진만 3~4대 대법원장을 추억해 본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1887~1964)
가인선생은 전라북도 순창(淳昌)에서 태어나시고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8세 때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고 면암 최익현 선생의 의병부대에서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주의가 팽배하는 것을 보고 1910년 일본 유학을 떠나 일본(日本)대학 전문부에 입학했고 1915년 명치(明治)대학 법학부를 마친 후 6년만에 귀국하였다. 그후 1919년 밀양지원 판사로 부임, 1년 정도 판사로 있다가 이를 사임하고 서울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11대 국회 김진배 의원이 지은 가인 김병로 참조).

그후부터 가인선생은 3·1운동 참가자, 임시정부 요인, 김상옥 열사, 6·10만세 사건 참가자, 광주 학생 독립운동 등에 참가하였던 우리 민족의 여러 사건에 직접 변호를 맡아 조선인의 민권투쟁과 독립운동 등에 앞장섰다. 이에 1931년에는 변호사 자격정지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때 가인 선생은 나라 없이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빗대어 가인(街人, 거리의 사람)이라는 아호를 스스로 지었다 한다.

가인선생은 정부 수립 후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앞장섰다고 한다.

그리고 가인선생은 청렴결백한 생활로도 유명하였는데 1950년대 박봉에 항의하는 판사에게 “나도 죽을 먹으면서 살고 있소. 조금만 더 참고 국민과 같이 고생해 봅시다”라고 일축한 적도 있었다. 또 “집무실에 놔둔 잉크가 얼었습니다”라고 하소연 하는 직원에게는 “하지만 영하5도까지 내려가기 전에는 난방이 안 돼요. 나라 찾은지 얼마 안 되니 우리가 청렴과 검소로 국가산업을 일으켜야만 합니다”라고 훈시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또 가인선생은 1952년 부산 정치파동직후 대법관들에게 사법부의 독립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법조인은 물론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가인선생은 퇴임하면서 “그동안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되는 일은 전국 법원 직원들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인데 인권옹호를 위한 사건처리에 신속을 강조한 것이 그러하고,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보수로 살라고 한 것이 그러했다. 또 나는 전 사법 종사자들에게 굶어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그랬다”면서 법조인의 청렴결백을 재차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이 청렴결백을 몸소 실천하고자 검소한 한복 두루마기를 입으시고 운동화를 신고 불편한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셨다. 그때 그 복장은 사법부의 아우라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당시 우리 법조인들은 가인선생을 무척 존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상 법조인으로써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인선생은 퇴임 후에도 박정희 정부의 반대 세력인 민정당의 윤보선 대표와 함께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힘을 쏟았으나 현실정치의 벽을 넘지는 못하였다. 이제 사법부의 수호신이셨던 가인 선생의 옛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3~4대 조진만 대법원장(1903~1979)
제3~4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던 백천(白川) 조진만 선생은 1903년 경기도 인천광역시 중구 운북동(현재 영종도)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경기 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3·1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가 일경(日警)이 요구하는 반성문 제출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던 강골기질이었다. 그후 독학으로 공부하여 1923년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법대)를 졸업하였다.

선생은 1925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1927년 해주(海州)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평양(平壤), 대구(大邱)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하였다. 1943년 변호사를 개업하였다가 1951년 제5대 법무부장관을 역임하고, 1961년부터 1968년까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사정부가 군정 초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당시 대법원장에 임명된 조진만 원장에 대해 “중요 정책에 관한 것이니 선고 기일을 연기하라”는 공문을 보내오는 등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곤 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조 원장은 이러한 공문이 오면 당신의 책상서랍에 쳐넣고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아 법관들이 소신껏 재판하도록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또 조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어려워 할 정도로 직언과 바른말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68년 대법원이 동백림(東伯林) 간첩단 사건 피고인 중 12명에 대해 증거불충분 등을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였을 때 ‘애국시민회’라는 유령단체의 비난 벽보가 나붙은 적이 있었다.

이때 조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사건은 정의의 보류인 사법부에 대한 정면 도발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법관들이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없다. 반드시 주모자를 찾아 처벌해 달라”고 항의하였다. 이와 같이 조 원장은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조 원장이 1961년 취임하기 전까지는 법원의 판결문이나 조서 등은 일제시대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판결문에도 한자(漢字)와 한글을 혼용(混用)하여 썼다. 판결서명도 판사들이 붓으로 먹물을 찍어 했다. 그 시절 판사 책상위에는 벼루집에 벼루와 먹 그리고 붓이 갖추어져 놓여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장문의 판결을 서기과에 내려 보내면 담당 입회서기들이 분량이 많은 판결문들은 등사하여 편철한 후 담당재판부나 재판관의 서명 날인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조 원장의 취임 얼마 후부터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판결은 모두 한글로 타자화했고, 조서도 일체 한글로 써야 했으며 판결 서명도 붓으로 하지 않게 되었다. 상당히 능률적으로 업무처리가 대체된 셈이다. 법원 업무를 한글전용시대로 이끈 셈이다. 그 당시에는 참으로 놀라운 변혁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는 재판이 전산화되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으므로 새로운 전자소송시대를 맞이한 셈이다. 이 또한 재판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조 원장은 법관들에게 “법관은 공정을 의심케 하는 모든 언행을 삼가야 하겠기에 사생활도 여러모로 제한, 금지되어 친구 내지 가족들에게서 동떨어진 외톨이가 되는 것도 사양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법관은 돈벌이 하는 직업이 아니라 봉사하는 직업입니다”라고 연설하면서 법관의 자세를 강조하였다.

그뿐 아니라 조 원장은 청렴하고 강직한 분이었다. 사생활도 검소하였다. 대법원 출·퇴근으로 배정된 승용차를 마다하고 지프차량을 이용했는데 퇴근하던 중 종로구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차량고장으로 난처하게 되자 차에서 내려 걸어서 혜화동 공관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다.

주변에서는 조 원장은 철저하게 신념을 가지고 자기자신을 학대한 생활을 했던 분이라고들 말했다. 변호사 시절에는 서울 제일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한 일도 있다. 조 원장은 공직에 있을 때나 재야 변호사로 지낼 때나 공·사생활이 분명했던 분이다. 또한 외부 청탁의 기고문이나 인터뷰 등 자신의 프로필을 알리는 세속적인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후진(後進) 법조인들이 기리는 뜻이 큰 것 같다.
그리고 조 원장의 자녀 중 조언씨와 조윤씨도 부친의 뒤를 이어 훌륭한 법조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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