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2011. 1. 13. 선고 2008다88337 판례평석

1. 사실관계와 쟁점
국내은행인 이 사건 취소불능 신용장의 개설은행은 외국의 매입은행이 선적서류를 제시하면서 신용장대금의 지급을 청구하자 여러 가지 하자 사항을 들어 대금지급을 거절하였고, 이에 매입은행이 개설은행을 상대로 신용장대금 지급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 개설은행은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모두 패소하였다(대한변협신문 제457호 판례평석 참조). 개설은행은 이 사건 신용장의 상품명세에는 ‘KL’이라고 되어 있음에 반하여 제시된 상업송장에는 ‘KLS’라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상품명세가 일치하지 않음을 이유로 신용장대금의 지급을 거절한 것이다. 이전 평석에서는 이 사건 사실관계와 주요 쟁점에 대해서 소개했으나, 이번에는 은행의 서류조사 의무와 엄격일치 원칙과 그 예외를 중심으로 판례평석을 진행할 예정이다.

2. 판결요지
매입은행에 의하여 제시된 선적서류가 신용장조건과 문언대로 엄격하게 합치하여야 한다고 하여 자구 하나도 틀리지 않게 완전히 일치하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자구에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 차이가 경미한 것으로서 문언의 의미에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거나 단지 신용장에 표시되어 있는 상품의 기재를 보완하고 특정하기 위한 것으로서 신용장조건을 전혀 해하는 것이 아님을 문면상 알아차릴 수 있는 경우에는 신용장조건과 합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그 판단은 구체적인 경우에 신용장조건과의 차이가 국제표준은행관습에 비추어 용인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야 한다.

상품명세와 관련해서 이 사건 신용장에는 ‘KL’이라고 기재된 반면 상업송장에는 ‘KLS’로 기재되어 있는 경우에, ‘KL’ 또는 ‘KLS’는 아라비아 숫자 다음에 위치하면서 등유(KEROSENE) 또는 석유(GASOIL)와 수량을 표시하기 위한 전치사 “OF”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KL’ 또는 ‘KLS’가 상품의 중량단위이지 상품명세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문면상 쉽게 알 수 있고, 상품이 원유라는 것을 감안하면 ‘KL’과 ‘KLS’는 모두 킬로리터(Kiloliter)를 표시하는 단위로 해석될 수밖에 없으므로, 위 단위 기재의 불일치는 같은 단위에 관한 다른 표현을 혼용하여 사용한 것일 뿐 신용장조건을 해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

3. 판례평석
가. 형식적 문면 조사
신용장거래에 있어서는 신용장 개설은행이나 선적서류의 매입은행 등에게 서류조사의무가 부과되어 있지만 그 의무는 문면상(on their face)의 형식적 조사에 그치는 것이지, 실질적인 조사, 예컨대 서류의 유효성이라든가 상품의 현존 여부 혹은 서류발행인의 신용상태 등에 관한 실질적인 조사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용장거래는 상품거래와는 별개 독립한 순전히 서류상의 거래이다. UCP 600 제4~5조는 신용장거래의 대원칙인 독립·추상성 원칙을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은행의 조사의무는 신용장거래의 이와 같은 특성을 반영하여 상품거래의 실제와는 관계없이 서류에 대한 조사에 국한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은행의 서류조사의무에 관한 UCP 500 제 13조 a항은 은행은 모든 서류를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with reasonable care) 그들이 신용장조건과 문면상 일치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조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UCP 600 제2조는 서류제시에 있어서 일치하는 제시(Complying presentation)란 적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당해 신용장의 조건들, 이 신용장통일규칙 및 국제표준은행관습(ISBP)의 규정들과 일치하는 제시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제14조 a항은 개설은행(확인은행) 또는 지정은행은 서류가 문면상 일치하는 제시인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하여 서류만을 기초로 하여 그 제시를 조사하여야 한다고 규정하며, 제15조 a항은 개설은행은 서류의 제시가 일치한다고 결정한(determines)경우에는 지급이행(honour)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제16조 a항은 개설은행(확인은행)이나 지정은행은 제시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한 경우에는 지급이행 또는 매입을 거절할 수 있다(may refuse to honour or negotiate)고 규정하고 있다.

나. 은행의 상당한 주의의무

은행은 신용장조건과 서류의 일치 여부를 서류의 문면상 엄격하게 조사하여야 하나, 서류에 관하여 실질적인 조사까지 하여야 할 의무는 없다. 그렇지만 은행은 상당한 주의를 다하여 서류를 조사하여야 한다. UCP 600에서는 UCP 500 제13조 a항의 상당한 주의의무가 불명확하고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이유로 삭제되었지만, 삭제 여부를 떠나 은행 또는 은행원으로서의 상당한 주의의무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상당한 주의(reasonable care)는 어느 정도의 주의를 말하는 것인가. 주의(care)는 과실(negligence)의 반대개념이다. 주의를 태만히 하면 과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당한 주의는 추상적, 획일적으로 정해져 있는 정도의 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문제가 된 특정한 상황에서 통상인(reasonable man)으로부터 보통 기대할 수 있는 정도의 주의를 가리킨다. 즉 합리적이고 신중한 보통 사람이 모든 경우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기울이는 정도의 주의라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우리 민법상 소위 자기재산에 대한 것과 동일한 주의의무로 볼 수는 없고, 신용장 업무에 종사하는 은행원에게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정도의 주의의무, 즉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 정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은행의 서류조사의무는 자신의 청구권을 행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므로, 그 법적 성질은 거래 상대방에게 부담하는 의무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지는 의무에 불과하여 간접의무 또는 자기의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행의 서류조사의무는 진정한 의미의 채무(schuldrecht liche pflicht)가 아니라 일종의 책무(obliegenheit)라고 할 수 있다. 책무가 채무와 다른 점은 채권자에게 이에 대한 이행청구권, 소구, 집행가능성 및 의무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청구권이 주어지지는 않으나 채무부담자가 책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에는 법률상의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신용장거래의 경우 은행이 서류조사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신용장대금의 지급을 청구하거나 상환을 청구할 수 없는 법률상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 은행의 서류조사의무와 엄격일치 원칙

신용장거래의 기본 원칙이 서류에 의한 거래이므로 은행은 제시된 서류가 신용장조건과 일치하는지를 조사 확인하여 신용장조건과 문면상 엄격하게 일치함이 판명되어야 지급 등을 한다는 원칙을 엄격일치 원칙(the Docirine of Strict compliance)이라고 한다. 따라서 엄격일치 원칙은 은행의 서류조사의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신용장조건과 서류가 엄격히 일치하는지 여부를 조사하기 위하여 은행에게 서류조사의무를 부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은행은 서류를 조사함에 있어서 서류와 신용장조건이 일치하는지 여부의 판단에 자유재량권이 전혀 주어져 있지 않고 오직 엄격일치 원칙이 적용될 뿐이다. 은행은 제시된 환어음과 서류 등을 면밀히 점검할 의무가 있다. 그리하여 제시된 서류가 신용장조건과 일치하면 지급약속을 이행하여야 하고, 만약 불일치할 경우에는 신용장에 의한 지급약속을 이행할 필요가 없다. 제시된 서류의 신용장조건과의 엄격한 일치가 은행의 지급의무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라. 엄격일치 원칙의 예외(실질적 일치 원칙)
엄격일치 원칙을 지나치게 강요하게 되면 그것은 너무나 경직되고 형식적인 것이어서 신용장거래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원칙은 완화하거나 예외를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점진적으로 실질적 일치원칙이 확립되었다.

UCP 500은 신용장이 요구하는 모든 서류가 문면상 신용장조건과 일치(in accordance with)하여야 한다는 총칙적 규정을 두고, 다시 상품명세에 관하여는 제37조 c항에서 “상업송장에 있어서의 상품명세는 신용장의 그것과 일치(correspond with)하여야 한다. 다른 모든 서류에 있어서의 상품명세는 신용장의 상품명세와 모순되지 아니하는(not in consistent with) 일반용어(general terms)로 기술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결국 UCP 500은 상품명세에 관한 한 송장만을 기준으로 삼아 그것과 신용장과의 일치 여부에 의하여 결정하도록 하고, 송장 이외의 서류 예컨대 선하증권이나 보험증권 등에 있어서는 신용장과 모순되지 않는 한 일반용어로 기재하여도 무방하도록 하여 엄격일치 원칙을 상당히 완화하였다. 즉 실질적 일치 원칙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다만 UCP 600 제14조 e항은 상업송장 이외의 서류의 경우 상품, 용역 또는 이행(performance)의 명세는 신용장에 명기된 이들 명세와 상충되지 아니하는 일반용어로 기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상품 이외에 용역 또는 이행을 추가하였을 뿐이고 UCP 500 제37조와 큰 차이점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국제표준은행관습 제6조는 「일반적으로 인정된 약어, 예컨대 ‘Limited’ 대신 ‘Ltd’ ‘International’ 대신 ‘Int’, ‘Company’ 대신 ‘Co.’, ‘kilos’ 대신 ‘Kgs’나 ‘kos’, ‘Industry’ 대신 ‘Ind.’, ‘manufacturer’ 대신 ‘mfr’, ‘metric tons’ 대신 ‘mt’ 또는 그 반대어 등의 사용으로 인하여 서류가 불일치한 것으로 되지 아니한다」, 제24조는 「신용장에 따라 제시된 서류는 결코 상호 모순된 것으로 나타나서는 아니된다. 이 요구는 자료내용이 동일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류가 모순되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제27조는 「서류상 상세한 수리적 계산은 은행의 조사 대상이 아니다. 은행은 단지 신용장과 기타 요구된 서류에 대한 총액을 조사할 의무만 부담한다」, 제28조는 「오자 또는 입력착오는 그 발생한 단어 또는 문자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는 한, 서류를 불일치한 것으로 하지 아니한다. 예컨대 machine 대신 mashine, fountain pen 대신 fountan pen, model 대신 modle 이라고 하는 상품명세는 서류를 불일치한 것으로 보지 아니한다. 그러나 model 321 대신 model 123이라고 하는 명세는 입력착오로 보지 아니하며, 이는 불일치 한 것으로 본다」라고 각기 규정하여 엄격일치 원칙을 완화해서 실질적 일치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4. 결어
이 사건 엄격일치 원칙의 예외 또는 완화와 관련한 이 사건 설시 내용은 오랫동안 내려온 대법원 판례의 내용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특별히 새로운 것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UCP 600 제2조가 국제표준은행관습의 규정과 일치하는 서류의 제시를 규정하고 있고, 신용장통일규칙과 국제표준은행관습이 국제적인 상관습법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 만큼 위에서 인용한 국제표준은행관습 제6조, 제24조, 제27조, 제28조 등을 근거 법률로 제시했어야 한다. 또한 원유의 중량단위인 Kiloliter의 단수 약자는 ‘KL’이고 복수 약자는 ‘KLS’라는 점에 대한 명확한 설시도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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