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 소재한 정치경제리스크컨설턴시(PERC)는 최근 아시아 각국의 부패지수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서 관심을 끄는 내용은 한국이 아시아 선진국 중 부패의 정도에서 최상위에 속하며, 지난 10년 중 가장 높은 부패지수를 기록하였다는 것이었다(한국의 부패지수는 6.98점으로 측정되었는데, 이는 6.83점의 태국보다 더 부패한 것이며, 7.79점을 기록한 중국을 간신히 제친 것이다).

위 보고서의 신빙성은 때마침 전 국세청장과 전 국가정보원장이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됨으로써 충분히 소명되었는데, 이들의 활약이 없었어도 위 보고서의 신빙성을 의심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받은 돈의 규모만 따지자면, 위 전직 공무원들의 혐의는 애교에 가깝다. 우리는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약 7년의 기간에 9500억 원(1982년의 일반회계예산은 약 9조6000억원이었다)에 이르는 금품을 받은 분을 여전히 모시고 산다.
게다가 그분은 전 재산 29만원으로 해외여행과 골프를 즐기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을 행하고 계신다. 30만 달러를 받고 구속까지 된 공무원은 비교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분이 이룩한 업적에 후생가외(後生可畏)는 어림없는 일이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은 불가능하다.
어찌되었건 그분은 9500억원 중 2205억 원이 직무관련성 있는 뇌물로 인정되어 추징 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나머지 7295억원은 직무와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직위와도 무관한가.
대통령의 직무는 대통령의 직위에 있을 때 비로소 수행할 수 있다. 직위가 없으면 직무도 없는 것이다. 그분이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불과하였다면 9500원을 받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단언컨대 모든 뇌물은 받는 사람의 직위와 관련이 있다.
실제로 요즘의 트렌드는 구체적 직무와 관련하여 돈을 주지 않는다. 그 방면에서 선도적인 재벌기업은 명절 때마다 수천만 원에 이르는 떡값을 돌리는 방법으로 고위직 검사들을 관리해왔다.
이 돈이 직무와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나, 떡값받는 검사에게 공정한 직무집행을 기대할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떡값을 받는 순간 ‘직무집행의 공정과 이에 대한 사회적 신뢰’라는 뇌물죄의 보호법익은 이미 침해된 것이다.

최근 구속된 전직 국세청장 사건에서는 공직자에 대한 기업의 진화된 관리기법이 드러났다.
대학동기의 연줄로 국세청 간부에게 접근하여 스폰서 관계를 맺고, 술과 내기골프 등으로 친분을 다졌다. 그 간부를 통해 청장 취임 축하금조로 30만달러가 넘어갔다. 청장은 재임 당시 해당기업 오너의 3560억원에 이르는 탈세 정황을 포착하고도 이를 무마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축하금 30만달러와 탈세 무마와의 대가관계를 캐고 있으나, 입증이 쉽지 않을 것이다. 스폰서 관계에서 돈을 받는 경우는 대가성이나 직무관련성을 입증하기 어렵고, 그 틈에서 공직자의 부패는 창궐한다.
이러한 부패의 고리를 끊어 줄 것으로 기대했던 김영란법(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안)이 핵심 규정이 훼손된 채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당초의 원안은 공직자가 100만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으면 대가성이나 직무관련성을 따지지 말고 형사처벌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무부 등의 반대로 직무관련성이 없는 경우에는 받은 돈의 2배 이상 5배 이하의 과태료만 물리도록 수정되었다니, 아직도 우리사회는 뇌물에 너그럽다.

앞서 소개한 보고서에서 가장 청렴한 국가는 싱가포르다. 부패지수가 0.74점이니, 한국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한때 공무원의 부패로 국가 기능이 위협받던 싱가포르는 강력한 부패억제정책과 더불어 태형을 도입하였고, 아직까지 시행하고 있다. 태형이 부패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계량하기 어려우나, 싱가포르 국민은 부패를 방지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의 부패는 심각하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지금 김영란법으로 제동을 걸지 못하면, 태형을 도입해야 수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정녕 우리의 인권 수준을 중세로 되돌려야 하겠는가. 국회에서 김영란법의 원안통과가 절실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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