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 전, 변호사들을 포함한 방청객들은 각자의 이유로 다소 불안한 심정으로 앉아 있다. 개정시간이 된다. 정리가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라고 큰소리로 외친다. 법대 뒤에 있는 법관 전용 출입문이 열리고 판사들이 검은 법복을 입고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줄지어 들어온다. 착석한다. 일어서 있던 방청객들은 그 뒤를 이어 의자에 앉는다. 법정에서 매일 보는 풍경이다.
이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재판부가 있다. 의자에 앉기 전에 세 사람의 판사가 잠시 차렷 자세로 있다가 통일된 동작으로 머리를 숙여 방청석을 향하여 절도 있게 절을 한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아름답지 않는가. 옛날 영국의 시인 존 키츠는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다”라고 했다. 삭막할 수 밖에 없는 법정에서 이런 장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군주론을 쓴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공직에서 잘리고 하릴없이 집에서 빈둥거리게 된다. 어느 날 책을 쓰기로 한다. 가난한 마키아벨리는 집필실 같은 호화로움을 누릴 수 없다. 서재라고 부르는 조그만 방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 방에 들어갈 때 굳이 옷을 갈아 입는다.
그의 목소리로 그 이유를 직접 들어보자.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서재로 들어간다. 그 전에 흙이나 먼지로 더럽혀진 옷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는다. 예의를 갖춘 옷으로 바꿔 입고 고인들의 궁전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나는 그분들이 베풀어 주신 친절과 나만을 위한 진수성찬으로 새생명을 얻는다. 그곳에서 나는 부끄러움도 없이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 생전에 행한 행위의 이유를 묻는다.”
소수 언론사만이 정보를 공급하던 시절에, 그 정보 독점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정보의 왜곡이 만연하던 시절에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악인이 선인으로, 검은 것이 흰 것으로 둔갑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이젠 직접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됐다. 학벌이 밀린다고, 계급이 낮다고, 특별한 성취가 없었다고 무시당하던 사람도 무슨 이야기이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이젠 힘있는 사람들이 조심하게 됐다. 예전처럼 재벌급 인사라는 이유로 호텔 벨보이의 뺨을 때리고서도 뒤늦게 영혼없는 사과와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던 못된 관행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왓 어 원더풀 월드!
반면, 인터넷 세상에서 오가는 언어들을 보면 인간의 사악한 내면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못된 말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의 나쁜 쪽 창의력에 대해서 새삼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이유는 예의에 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종교 풍습에 불과하다. 예의는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각자 다른 능력을 타고 나는 것이 사람인 만큼 가진 것이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많이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을 업신여길 권리는 없다.
자본주의 이론을 만든 아담 스미스는 자원이 최적으로 배분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 시스템이 필요하고 시장경제 작동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시장경제 시스템을 통하여 부자가 된 자는 가난한 자를 인격적으로 무시해도 된다고 가르친 바는 없다.
본론으로 돌아가자. 법정에서 최고의 권력자는, 아니 절대 권력자는 재판부를 구성하는 판사들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나 권력자들도 해당 사건에서의 재판부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든 고참 변호사들도 젊은 판사들 앞에서 최고의 존칭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그런데도 절대 권력자인 판사들이 일동 차렷 자세를 취한 다음 머리를 정중하게 숙이면서 방청석을 향하여 절도 있게 절을 하고 조용히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면 잔잔한 감동이 인다. 판사인 나는 만인에게 평등한 법에 의하여 부여된 권력을 필요에 따라 최소한으로 행사할 뿐이지, 그것을 이용하여 이 법정에 나와 있는 사건 당사자 및 방청객들에게 군림할 생각이 없다는 표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떤 법조 선배님은 “독초라도 한 줌의 햇볕을 쬘 권리는 있다”고 갈파하셨다.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게 되면 그것이 예의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예의야말로 그 사람의 진정한 경쟁력이 된다. 가장 사람다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