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사진 왼쪽)는 TV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 우연찮게 ‘너목들(너의 목소리가 들려)’이라는 드라마를 알게 되었다. 한국저작권 위원회 외래강사로 몇년 째 활동 중이라 선생님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러 갔었다. 강의 중 재미삼아 요새 즐겨보는 드라마를 물으니 ‘너목들’이라고 했다. ‘왈가닥 장변’ ‘멋진 차변’ 어떻고 하기에 강의가 끝나고 검색을 해보니 연관검색어가 상당했다. 쭉 훑어보았더니 국선전담변호사가 주인공인 법정드라마였다. 그동안 법조를 소재로 한 드라마는 인기가 없었던 만큼 이렇게 반응이 좋다니 놀라웠고, 필자 같은 사람을 소재로 한 것이 무척 반가웠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드라마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VOD 서비스로 몇 편을 몰아본 후 팬이 되어버렸다. 같이 보자고 졸랐다. 무늬만 법정드라마일 뿐 사랑타령이나 하겠지, 법정공방이라고 해봐야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겠지 등등 부정적인 이유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나 드라마 안 보는 것 알잖아, 싫어” 한마디로 끝냈다. 그런데 가끔 필자가 참여재판 끝내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몇 마디 던졌던 합리적 의심, 모두 진술, 배심원 선정 이런 이야기를 아내가 드라마에서 봤다는 것이다. 아내도 필자가 법원에서 참여재판 하는 것을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한 두 차례 본적이 있어 법정이 돌아가는 대강의 프로세스는 알고 있는데 드라마의 법정 표현이 꽤 현실적이고 소송 당사자들의 공방과 심리를 잘 표현했다는 것이다. 한번 보기로 했다. 참여재판을 본격적으로 다룬 10회와 11회만 아내와 같이 보았다.
허, 이거 꽤나 현실적인걸. 드라마 피디나 시나리오 작가가 이쪽 계통의 밑바닥 정서를 상당히 잘 꾀고 있는 것 같았다. 참여재판이 보통 배심원 선정부터 판결 선고까지 하루에 모두 끝나기 때문에 법정에서 예상되는 여러 가지 스토리 흐름을 미리 상정하여 공격하고 방어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꽤나 잘 묘사했다. 아니 오히려 필자가 4년 동안 수십 건의 참여재판을 진행해오면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배울 점도 많았다.
백미는 10회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장변이 피해자 민준국이 살아있다고 주장한 부분이었다. 막상 그 장면을 보고서는 역시 너도 결국은 드라마구나, 극적인 반전을 위해 현실적인 설정은 멋대로 희생시키는구나 싶었다. 참여재판은 모든 주장과 증거를 준비기일에 모두 밝혀야 하고 그렇지 않은 전혀 새로운 주장과 증거는 본 재판에서 차단되기 때문이다. 쯧쯧 혀를 차면서 11회를 돌렸다. 그런데 재판장이 양 당사자를 법대로 불러서 준비기일에 주장하지 않았다고 난색을 표했고 검사도 같은 주장을 했다. 그런데 차변이 양해를 구하면서 다만 증거는 기존의 증거대로 하겠다고 해 간신히 재판장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많이 놀랐다. “이런 것까지 표현할 줄이야.” 필자도 올해 초에 했던 참여재판에서 준비기일에 일부 주장을 하지 못한 것을 본 기일에 한 적이 있었다. 기존의 강간상해 무죄주장(간음 한참 전에 이뤄진 상해는 인정하나 간음은 합의 하에 하였다)에 더해 준강간과 상해의 경합범으로 주장(강간을 하였더라도 상해 당시 강간의 고의는 없었다)하는 정도는 기존 주장에 부가적인 수준이라 판단하여 본 기일에 주장했으나 재판장으로부터 주의를 받았었다. 배심원들은 강간상해는 무죄, 준강간과 상해의 경합범은 유죄로 만장일치 평결을 내렸으나 재판부는 강간상해 유죄판결을 내렸었다. 필자의 주장이 페어플레이에 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배심원단은 5:4로 팽팽이 갈렸지만(실제는 단순 다수결로도 유무죄 평결을 내린다) 재판부가 오히려 그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판결이 나왔다.
그 두편을 보는 동안 합리적 의심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도 등장하였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는 증명…. 사실 재판을 하면서 형사법 대원칙이 무죄추정인지, 유죄추정인지 필자 스스로도 고민에 빠진 적이 많을 정도로(고백컨대 필자도 가끔 유죄추정에 기대 일을 편하게 하고자 했던 적이 있다) 실제 실무는 합리적 의심을 너무 엄격히 해석하여 쉽게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코끼리 퍼즐은 실제 법정에서 검사 측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는 증명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 퍼즐이 코끼리냐 아니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코끼리가 앞발로 사람을 밟고 있는 것까지 증명해야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는 증명이라니 솔직히 장변에게 한방 먹은 것 같았다. 저 코멘트를 실제 법정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 즐거운 상상을 하며 TV를 껐다. 앞으로 너목들 같은 양질의 법정드라마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필자도 아내와 공유할만한 부부간의 취미거리가 또 하나 생길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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