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일보에 입사하던 1999년말, ‘조중동’이란 용어가 막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국일보를 포함하는 ‘4대 일간지’란 말은 이미 옛말이었다. 부채는 수백억 누적되어 있었고 기자들은 경쟁지보다 훨씬 적은 월급으로 생활고를 겪기도 하였다. 취재원들은 말끝을 약간 흐리며 “한국일보가 말입니다… 예전엔 잘나갔었는데…” 했었다.

사실 기자를 그만 두고 법조인으로 전향한 것도 깜냥이 못 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던 게 크지만, 이런저런 사정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한국일보, 그곳은 내 초년병 시절의 꿈을 묻어둔 친정 같은 곳이다. 변호사가 되어서도 아직 변협신문을 기웃거리는 것도 그런 빛바랜 꿈의 찌꺼기들이 남아서일지 모르겠다.

그 친정 식구 같은 한국일보 사람들을 시댁 같은 곳에서 만났다. 재판을 마치고 나오는데,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사잇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다. 사주가 회사에 200억원 손해를 입혔는데도 고발 두달이 되도록 검찰이 소환조사를 미루고 있다며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타사 기자들이 취재를 하는 기묘한 장면이었다.

기자들이 거리에서 기자회견을 한 것은 갈 곳이 없고 기사를 쓸 곳도 없어진 탓이다. 6월 15일 회사는 파업상황이 아님에도 용역을 동원하여 기습적으로 편집국을 폐쇄해 버렸고 기사 집배신 시스템에서 말 안듣는 기자들의 아이디도 삭제해 버렸다. 기자들은 편집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회사가 입주해 있는 한진해운 1층 바닥에서 기거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리고 안에서는 통신사 기사로 도배된 ‘짝퉁 한국일보’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묻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홍 판서 홍길동 나무라듯, 세상에 전횡을 부리는 사주가 그뿐이 아니거늘, 신문사 하나쯤 어떻게 되는 것이 뭐 그리 대수더냐?
그러면 나로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사사로운 소회가 아니더라도, 한국일보는 존재의 이유가 있는 신문이라고….

‘조중동’이란 말이 유행한 이래로 일어난 현상이 우리나라 신문의 이념적 양극화이다. 포털에서 기사 제목만 봐도 오른쪽 신문이 쓴 건지, 왼쪽 신문이 쓴 건지 쉽게 알 수 있다. 오른쪽, 혹은 왼쪽에 속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은 뉴스의 홍수 속에서 정작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막막하다. 오죽하면 진보신문과 보수신문을 찢어 반쪽씩 갖다 붙여 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겠는가.

10년 전 기자실에서도 이미 이념적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선명한 보수신문의 기자가 내 옆 자리에서 데스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내던지듯 전화를 끊더니 “이걸 쓰기엔 내가 아깝다”고 했다. 회사가 ‘밀어줘야 하는’ 보수 우익단체의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 단체는 막무가내 시위와 주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반대쪽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선명한 진보신문의 출입기자는 “시민단체들이 어찌나 간섭을 하는지, 무슨 기사를 어떤 주제로 몇 단으로 써달라는 주문까지 한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제각기 귀담아 들을 부분이 있지만 현장의 기자들이 스스로 쓰고 있는 기사에 대해 한심하다고 느낀다면 도를 지나친 것이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기자로서 제일 먼저 드는 느낌은 의외로 안도감이었다. 나는 저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구나….

적어도 한국일보는 그렇게 정치적 입장을 정해놓고 기자들을 곤란하게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한국일보의 기치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이었고 그것은 독특한 조직문화에 의해 든든하게 뒷받침되고 있었다. 한국일보에선 부장 등 상급자에게 ‘님’자를 붙이지 않는다. 모름지기 기자는 권위에 굴복해선 안 된다는 취지에서다. 회의 시간에 새까만 후배가 삐딱하게 고개를 젖힌 채 “부장!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하면서 딴지를 거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어쩌면 불편부당은 오른쪽 손님도 놓치고 왼쪽 손님도 놓치는 스마트하지 못한 포지셔닝일 것이다. 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이념대립상황에서 이런 신문 하나쯤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빨리 기자들이 만든 진짜 한국일보를 받아볼 수 있기를, 전직 한국일보 기자로서, 또 균형을 잡아주는 신문 하나쯤은 필요하고 여기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뜨겁게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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