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고교시절에 마이클 조던으로 대변되던 NBA 농구와(당시는 인터넷과 유선이 편성되지 않았을 시절이라 비디오 테입으로 보거나 주말에 가끔 녹화방송을 했던 것 같다), 청소년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슬램덩크’ 만화를 탐독한 후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필자에게 누군가 ‘대학교에서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다면 사법시험 공부를 제외하고 농구를 한 것 말고 특별히 무엇을 했노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필자는 법대가 아닌 사범대 출신인데 당시 사범대 농구장에는 농구장 옆에 학생식당과 매점이 위치해 있고, 당시 낙성대에서 운행하던 유일한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었으며, 기숙사와 가까워 사범대 농구장은 농구를 하는 학생에게는 인기가 상당히 많은 장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농구를 하려는 사람에 비해서 농구대 등이 부족하여 사범대 농구장에서는 올코트 5 : 5 농구경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반쪽 코트에서 주로 4 : 4로 농구를 했었는데, 소위 ‘떨어지기’라는 농구경기였다. 위와 같은 농구는 정식의 농구가 아님은 물론 간혹 스포츠 용품업체나 대기업에서 주관하는 3 : 3 길거리 농구와도 다른 그야말로 이색적인 경기였다.
떨어지기 농구는 한 팀이 4명이고, 5반칙 퇴장과 같은 규칙도 없었고, 슛동작시 파울을 했을 경우 부여되는 자유투도 없었으며, 3점 슛도 없었고 오직 1점씩 가산이 되고, 보통 15점을 먼저 득점하는 팀은 계속해서 농구를 하고, 진 팀은 빠지고, 기다리던 팀이 다시 도전하는 형식의 경기였다. 위와 같은 떨어지기를 누가 고안했는지 현재로서도 알 수 없지만, 당시 필자가 다니던 대학교에서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사대 농구장에서 떨어지기 농구를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간혹 사대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무 그늘에서 농구를 구경하는 여학생이 있을 경우 시합은 특히 과열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가 군대가기 전에는 취업이나 학점에 대한 경쟁이 덜했고 필자는 농구를 하느라,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수업을 빼먹는 소위 ‘땡땡이 치기’도 흔했고, 특별히 땡땡이 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교수님도 으레 대학생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며 매번 철저히 출석 체크를 하지 않았던 것이 당시 일반적인 분위기였던 것 같다.
필자는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입대를 하였는데, 1년 정도 군생활을 하고 상병이 되어 첫휴가를 받아 학교를 처음으로 찾았는데, 같이 농구를 하던 유00이라는 선배가 당시 금색 마그마 오토바이에 스포츠 고글을 쓰고 나를 사대 농구장으로 데려가서 함께 몇 시간 농구를 했었다. 그 선배는 나보다 더 열정적인 농구광이었는데, 나는 군인 신분이 아닌 그 선배의 자유, 농구실력, 오토바이와 고글 모두 내가 열망했던 것이었다. 당시 우리가 계속 이겨서 상당히 지치고 배가 고플 때 즈음에서 선배의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땀에 젖어 몸에 열이 났지만, 해질 무렵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올 때의 선선함과 군대에서 느끼지 못하던 노을이 깔린 구름의 풍경은 아직도 뚜렷이 기억난다.
필자는 군대에서 IMF를 상당 기간 보냈고, 그 사이 인터넷이 보급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복학 후 교수님들의 출석 체크가 엄격해 졌고, 본인이 대학 시절의 낭만으로 여기던 ‘땡땡이’를 후배들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나는 이런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복돌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사대 농구장의 떨어지기 농구였고, 나는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농구를 참으로 많이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농구를 조금 덜 했더라면 좀 더 일찍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않았을까하는 거만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대학교 시절 나의 추억이다. 필자가 최근 모교를 오랜만에 가게 되었는데, 나의 소중한 추억의 장소는 현대식 건물과 다른 농구장으로 바뀌어 있었고, 더 이상 나의 소중한 기억 속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도 사대 농구장에서 떨어지기 농구를 하는지 정말 궁금하다.

/이돈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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