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해마루 종합법률사무소‘에서 본격적인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고 그해 말 안산에도 법무법인을 설립했다. 당시 안산은 반월시화공단이 있는 공단도시로 노동자들이 많아 인권·노동 등과 관련한 법률 수요가 많았다.
그러나 법원과 검찰청이 없는 지역은 사실상 변호사가 없는 무변촌으로 안산도 마찬가지였으며, 당시 ‘해마루’ 법무법인은 안산시 최초의 법무법인이었다.
변호사를 시작하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 가입하였고, 2004년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서 첫 공직을 맡기 전까지는 수년 간 주로 노동과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들을 맡았다.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민변 노동위원회와 언론위원회 회원 등을 거쳐 2003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 활동을 통해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국가폭력에 의해 저질러진 의문사를 밝히는 데 힘을 쏟았다. 이는 이전에 노동과 인권분야 등에서 펼쳐온 변론활동의 연장선상이었다.
필자가 맡았던 많은 사건 중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남편에게 살해당한 수지킴이라는 한 여성이 남편의 거짓증언과 안기부의 공작으로 간첩이 되어야 했던 ‘수지킴 사건’이다. ‘수지킴 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국가가 조직적으로 개입해 한 평범했던 여성을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이었다.
수지킴 사건을 맡은 것은 대한변협 인권위원으로 재직 중이던 2000년 봄이었다. 유족들을 대리하여 형사 고소하였고 검찰은 살인죄 공소시효 완성 직전에 혐의자를 구속기소하였다.
유족들이 국가 등을 상대로 한 민사소송의 경우 살인 혐의는 이미 형사판결에서 확정된 사실을 인용하면 되므로 중요한 논점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의 조직적 은폐에 책임을 묻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런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법률적 다툼은 소멸시효를 둘러싸고 벌여졌다.
재판부는 1987년 국가가 저지른 불법행위를 모두 사실로 인정하였다. 다만 원고들은 피고의 소멸시효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경우 원고들의 청구가 기각될 것을 염려해 1987년 사건 발생 당시의 불법행위가 2001년까지 계속됐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다행스럽게 재판부는 “위법행위를 한 국가가 그 위법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가 이제 와서 그 위법을 몰랐던 원고들에 대하여 소멸시효를 주장한다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상 도저히 허용되지 않고, 따라서 이 사건의 청구에 대한 소멸시효는 원고들이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게된 2001년 11월 13일부터 그 기간이 개시되는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시하였다. 결국 국가의 막중한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형식적 소멸시효가 완성된 사건일지라도 국가에 일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소멸시효이론이 정립되었다.
‘수지킴’ 사건을 통해 얻어낸 성과에도 불구하고 개별사건의 법률상 청구에서 소멸시효를 배제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국정원진실위원회’ 등 과거사 정리 관련 위원회들의 활동으로 지난 시기 국가가 국민에게 저지른 많은 불법행위들의 진실이 드러났고,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이 배척되었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최종길 서울대 교수 사건, ‘울산보도연맹’ 사건, 부마항쟁 사건 등에서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과거를 올바르게 정립하지 않고 올바른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또한 역사는 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발전한다. 대한변협과 민변에서 여러 가지 공익적 활동을 펼쳐온 데에는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해철 변호사·민주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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