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조카 녀석이 유치원생 꼬맹이 때였다. 내 직업이 변호사라고 하자 “그럼 이모가 땅땅땅 하는 거야?”라고 묻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아이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자 조카 녀석은 판사봉을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그러니까 이모가 땅땅땅 하는 거냐고?”라고 다시 묻는다. 그제서야 감을 잡고 “아…이모가 땅땅땅 하는 건 아니고, 사람들이 땅땅땅 하는 곳에서 억울한 일이 없도록 도와주는 거야”라고 설명해주었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종종 조카 녀석의 말을 떠올리곤 했는데, 최근 정말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잔설이 채 녹지 않은 3월 초 연세 지긋한 어르신 한분이 법률상담을 오셨다. 결혼한 지 35년이 넘었는데 최근 아내가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하고 도무지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간통으로 처벌하려면 어떤 증거를 가지고 와야 하느냐며 준비해온 다이어리에 꼼꼼히 메모하기 시작하셨다. 일흔을 앞둔 어르신께서 뜬금없이 부인을 간통으로 고소하겠다는 말씀에 잠시 당황한 내가 부인을 의심할 만한 구체적인 근거라도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아직까지 이렇다 할 근거는 없지만 간통이 분명하다며 확신에 차 있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증거자료를 가지고 오시라고 말씀드렸더니 잘 알았다며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고 상담료 5만원까지 지불하고 가셨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그 어르신은 일주일 간격으로 오셔서는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셨고 그때마다 나의 답변을 초등학생이 받아쓰기 하듯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메모한 후 돌아가시는 것이 아닌가. 그 어르신이 네 번째 다녀가신 후 이번에는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한분이 찾아오셨다. 그런데 상담을 시작하기도 전에 바리바리 싸오신 보자기를 풀어 상담 테이블 위에 하나씩 올리시는 것이 아닌가. 보자기에서 나온 것은 손수 만드신 누룽지, 폐식용유로 만든 재활용 빨래비누, 김치를 비롯한 반찬 한 봉지씩이었다. 젊은 친구들 표현을 빌리자면 ‘이건 멍미?’ 더 당황스러운 건 할머니께서 곧이어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정말이지 멘붕지경이었다. 간신히 할머니를 진정시키고 보니 앞서 네 번이나 다녀가신 어르신의 부인이었다. 할머니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남편의 다이어리를 우연히 보았더니 내 사무실에서 상담한 내용이 꼼꼼히 적혀있더라는 것, 할머니가 가만히 있으면 내가 할머니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할 것 같아서 진실을 밝히고자 오셨다는 것이었다. 그 할머니는 환갑을 넘긴 연세에도 병원 세탁실에서 일하며 100만원 가량의 월급으로 생활비를 대고 환자들이 남긴 밥을 얻어다 누룽지를 만들어 끓여먹고 병원 식당에서 나오는 폐식용유는 재활용 빨래비누를 만들어 쓰고 남은 반찬도 얻어 부식비를 아끼는 등 평생을 고생만 했는데 정작 남편이라는 작자는 자신을 의심하며 술을 마시고 직장에까지 찾아와 자신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등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생활비를 안주시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가 아파트 경비로 일하고 있지만 결혼해서 지금까지 제대로 생활비를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단다. 할머니는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어 딸은 출가했으나 아들이 미혼이라 아들만 출가시키면 이혼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남편이 이렇게 나오니 자신도 더 이상은 못 살겠다며 나에게 이혼판결을 내려달라고 하셨다. “아이고 어르신. 저는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고요…”라고 설명을 드렸으나 막무가내시다. 한참을 끙끙댄 후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까지인지 찬찬히 말씀드리자 재판을 걸어서라도 이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셨다. 일단 알았으니 돌아가셔서 할아버지와 의논해본 후 해결이 안 되면 다시 오시라고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 할머니가 방문한 다음날 이번엔 할아버지가 사진 한 장을 들고 또 오셨다. 할머니 사진이었다. 할머니가 왔었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할머니가 오신 건 맞지만 부정행위를 하지 않으셨으니 괜한 의심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랬더니 만면에 안도의 미소를 머금으시더니 “변호사님이 그렇다면 믿고 가겠다”고 가셨다.
아뿔싸! 며칠 후 이번엔 어르신 부부가 함께 내 사무실을 방문하셨네! 할아버지는 이혼을 못 하겠다고 하시고 할머니는 이혼을 하겠다고 하신다. 할머니는 이참에 할아버지의 못된 버릇을 없애달라고 하신다. 그래서 할아버지께 “부인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 근거 없이 부인을 의심하고 괴롭히시면 이혼사유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하시고 생활비도 지급하셔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변호사님이 시키는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신다. 머쓱해진 내가 “그럼, 4주 후에 뵐까요? 하하하!”라고 하자 그러자며 돌아가셨다.
변호사가 ‘땅땅땅’하는 직업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가끔은 ‘땅땅땅’도 필요하리라. 이번 기회에 중재법을 다시 들춰보기도 했지만 원리원칙 따지는 것이 성가시다. 아직 4주가 지나지 않았다. 어르신 부부가 잘 사셨으면 좋겠다.

/노경희 변호사
kikiru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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