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노래하고, 난 그녀 위해 노래 만들고 / 하루 종일 아름다운 시 읽는다네. / 건초더미 우리 집에 남몰래 누워 있으면 / 아, 인생은 아름다워라 6월이 오면.”
영국 시인 로버트 브리지스의 시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6월은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인생의 아름다움만을 노래하기에는 좀 복잡한 달이다.
300만명의 한국인의 목숨을 요구한 한국전쟁이 발발했고(1950. 6. 25), 전두환 독재 정권에 맞선 6·10 항쟁의 봉화가 올랐으며 (1987. 6. 10), 수십년 분단을 뒤로 하고 한국의 대통령이 직접 평양으로 날아가 북한 최고 지도자의 영접을 받았고(2000. 6. 13) 하루 아침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수백 명의 생명이 흙더미에 묻혔다(1995. 6. 29).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여대생 임수경이 지구를 반바퀴 돌아 평양에 나타나 “전대협은 평양에 도착했습니다”를 부르짖은 것도 6월(1989. 6. 30)이었다.
그 무수하고도 굵직한 사건들 가운데 1949년 6월 5일 결성식을 갖고 출범한 한 단체를 살펴 보자. 단체의 이름은 국민보도연맹이었다.
단체를 이끈다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선우종원, 오제도, 정희택 등 해방 공간과 정부 수립 과정 결에서 좌익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 온 ‘사상 검사’들에다가 총재는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효석, 고문으로는 국방장관 신성모가 좌정했다. 지도부 면면으로 보면 에누리없는 우익 단체였지만 그들이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은 우익들이 아니었다.
‘보도(保導)’라는 단어를 살펴 보면 그 뜻은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뜻이다. 국민보도연맹 지도부가 보호하고 지도하고자 했던 이들은 바로 좌익들이었다. 즉 한때의 실수(?)로 좌익의 대열에 들었던 이들을 보호하고 지도해 올바른 길로 이끌겠다는 포부였다. 물론 속내에는 이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뿐 아니라 그 인적 인프라를 활용해 지하로 들어간 좌익의 뿌리를 뽑겠다는 계산도 들어 있었다.
전 남로당원들을 비롯하여 어쩌다 인민위원 감투를 썼던 촌로들, 친구 따라 강남 갔던 순진한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다투어 가입을 했고, 공무원들의 성과주의 경쟁이 덧붙여지면서 보도연맹원의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마치 요즘 교회들의 전도자 자랑처럼 “우리 고장에서는 이렇게 많은 좌익이 ‘보도’됐어요”의 취지로 보도연맹원들을 불려 나간 결과였다.
불과 1년만에 보도연맹은 연맹원 30만을 헤아리는 거대 조직이 됐다. 그 가운데 진짜 좌익 출신은 20퍼센트도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순진하고도 얼뜬 얼굴의 농민들이었다는 것이 보도연맹원 모집책들의 진술이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면서 이 보도연맹원들의 명단은 그대로 처형자 명부로 변해 버렸다. 전쟁 발발 당일 요시찰인물 체포령이 떨어졌고 6월 30일에는 보도연맹원을 소집, 구금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윽고 벌어진 것이 보도연맹원 대학살이었다.
그 이전 좌익들의 민간인 학살과 범죄에 대한 대응이라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학살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의해 선도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경기도에서 경황없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원들을 미처 해치우지 못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한국군과 경찰은 미군이 경악하여 뜯어말릴 만큼 자국민들을 살해하고 매장했다. 법도 없고 절차도 없었다.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보호하고 계도하겠다는 선언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자기 마음대로 낙인을 찍은 후 그 낙인에 따라 수십만의 생명을 암흑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은 전시(戰時)를 감안하고 백보를 양보해도 국가적 범죄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보도연맹원 중에 이른바 골수 좌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심각한 중죄인이더라도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헌법 27조 1항)’는 헌법의 보호로부터 외면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법치국가가 아니었던가.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현충원에 그득한 호국 영령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1949년 6월 5일 결성된 한 단체의 희생자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호국영령들이 지키려고 목숨을 걸었던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인간의 존엄’일진대 그 수조차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운 생명들을 먼지보다 가볍게 취급했던 역사를 도외시한다면 저 호국 영령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그런 민주주의를 위해 죽었는가.”

/김형민 S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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