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원래 없었지만 한국경제가 세계화되어 가면서 자주 듣게 되는 서양 제도의 하나가 바로 ‘에스크로’란 어휘다. 우리말 법률사전에는 ‘(조건부)제3자예탁’으로 번역되어 있다. 해당 분야 업무를 취급 해보지 않은 독자분들께는 다소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에스크로(escrow)는 상거래시에, 판매자와 구매자 혹은 은행 등 금융제공자와 차입자 사이에 신뢰할 수 있는 중립적인 제3자가 중개하여 물품 또는 금융거래를 원활하게 끝맺음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서비스를 말한다.
현재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로는 그냥 원어대로 ‘에스크로’라 많이 불리우지만, 컴퓨터를 중국인들이 ‘전뇌(電腦)’로 번역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에스크로를 우리말 용어로는 ‘(동시)이행신탁’이라 번역하면 어떨까 싶다.
에스크로 제도는 계약의 양 당사자가 어느 장래 시점에 각자의 계약상 의무를 동시에 이행할 의무가 있는 경우 -예컨대 부동산 매매의 경우 매도인은 소유권 양도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매수인에게 인도하고, 매수인은 동시에 그 자리에서 매도인에게 대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을 터인데- 이런 경우 제3자인 Escrow Holder(혹은 Agent) 즉 ‘(동시)이행수탁인’이 동시이행에 필요한 각종 조건(예컨대 매수인 입장에서는 매도인의 권리서류나 목적 부동산에 하자가 없어야 한다든가, 또 매도인 입장에서는 매수인이 은행 대출을 받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 등 조건)의 완성을 책임지고 확보한 경우에만 계약을 마무리 짓는(escrow closing) 신탁계약 관계가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본 계약(Underlying Main Contract, 상기 예의 경우는 부동산 매매 계약)의 당사자가 신탁자가 되고, 에스크로 홀더(혹은 에이전트)는 수탁자가 되며, 신탁자로부터 수령하는 금전은 반드시 신탁계좌에 입금시켜야 한다. 또 이를 보호하기 위해 에스크로 회사의 인가나 운영, 신탁자를 보호하기 위한 주 정부 보험 가입 의무 등 에스크로와 관련된 제도는 에스크로 업무에 따른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소재지 주 정부의 엄격한 규제를 받게 된다.
따라서, 변호사가 에스크로 업무를 취급하는 뉴욕 등 미국 동부 제 주의 경우는 다소 다르지만, 서부에서 에스크로 회사와의 에스크로 계약을 초안하게 되는 신탁자 변호사 입장에서는 에스크로 회사의 선택이나 계약 초안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 이유로 첫째, 에스크로 회사란 일반적인 상업회사인 만큼 수탁 금원을 횡령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고(과거 로스앤젤레스 한인사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례임) 둘째, 계약 초안과 관련해서 앞서 이야기한 본 계약에 열거된 일체의 조건이 에스크로 에이전트에 대한 설명(Instruction) 형식으로 에스크로 계약서에 모두 반영이 되어야 하는데, 만일 하나라도 빠지게 된다든가, 또는 본 계약과 상이한 조건이 삽입되는 경우 본 계약이 우선하는지 혹은 에스크로 계약 조건이 우선하는지 같은 복잡한 법적 문제를 야기시켜 의뢰인에게 엄청난 손해를 일으키는 일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며, 비록 본질적 이슈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큰 금원이 에스크로 회사의 신탁계좌에 입금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이자가 붙는 계좌를 만들게 하거나, 조건이 성취되지 않아 에스크로를 취소하는 경우 양 당사자 간에 에스크로 회사에 대한 서비스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 등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미리 예상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동부 제 주에서 변호사가 에스크로 업무를 다루는 경우, 변호사는 에스크로와 관련된 금원은 반드시 변호사 신탁계좌에 입금 시켜야 한다.
일반적으로 미국 변호사의 의뢰인에 대한 변호사비 청구는 시간당 보수로 계산되기 때문에 사건 수임시 수령하는 의뢰료(Retainer Fee)도 일단 변호사 신탁계좌에 입금시켰다가 출금시키게 되는데(변호사비뿐 아니라 모든 소송비용 또는 보험금 수령 시 성공보수로서 변호사와 의뢰인이 일정 비율로 나누어야 하는 금원 등도 일단 신탁계좌를 거쳐야 함), 이때 입금과 출금 사이 기간에 발생하는 법정이자(상업은행이 중앙은행 예치금에 대해 수령하는 최저 이율)는 변호사나 의뢰인과는 무관하게 은행으로부터 직접 각 주의 변호사 협회로 보내져서 변호사 협회의 공익사업에 쓰이게 된다.
필자가 듣기에 아직 한국에는 변호사 신탁계좌 제도가 없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으며, 신탁계좌에서 발생하는 이자를 공익사업에 쓰지 못하는 것은 엄청난 기회 상실로 너무 안타깝다.
또한 미국 변호사 자격박탈 징계 사유 중 첫째가 신탁계좌 횡령인 것을 감안하면 한국에서도 의뢰인 보호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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