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에서 보았던 그림 중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1830년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는 프랑스혁명의 대열에서 깃발을 들고 앞장서서 달리는 여신의 모습이 중앙에 그려진 들라크루아의 초대형 그림이다. 그 그림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하여 자유와 평등, 자주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법조의 깃발이 펄럭일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21일 재판관 8인 전원 일치 의견으로 박정희 유신시대의 긴급조치 제 1, 2, 9호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다른 촛불사건, 미네르바 사건 등에서는 기본권 보장의 범위에 다소간 이견을 보였던 재판관도 이 결정에서는 같은 의견이었다. 이미 우리가 쟁취한 자유민주국가의 이념과 확신을 역사적 성찰의 시각에서 재확인하는 것이어서 깊은 감동과 함께 전율을 느끼게 하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대법원에서 이미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판단한 바 있었고, 긴급조치와 관련된 형사재심사건의 하급심에서 여러 재판장이 유신시대의 험악한 인권유린에 대하여 사죄하는 마음을 표시하고, 피고인들에게 진정어린 위로의 말을 애써 남겼다. 그 판결에 이르기까지 밤잠을 못 이루었을 담당 법관의 고뇌와 결단을 생각하면, 그 판결이 비록 시중의 집회·시위에서 훤화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법조의 견결한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을 느낀다. 이런 재판에 참여한 젊은 검사들 중 어떤 이는 형식적인 유죄의견 개진을 거부하고 과감히 무죄 구형을 하면서,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30~40년 전 이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었다는데 대한 놀라움과 수치심과 각성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법조의 사명감과 현명함이 새삼 밝은 깃발이 되어 마음의 시야에 들어 왔었다.
법조인이 점점 많아지고 그 역할이 확대되면서 정치적,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끊이지 않아 국민이 법조를 바라보는 감정이 곱지도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낯뜨거운 저급한 사건, 추문, 이율배반 등은 법조 모두가 자기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여 끊임없이 극복하여 나가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법조 전반이 부패하거나 안일하거나 타락했는지 여부는 항상 그 실상을 파악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어떠할까’에 대하여 감히 단언하기란 어려운 일이나 잘못이 밝혀지면 언제든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도려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부정적인 면모와는 전혀 다르게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정진하면서 사표(師表)가 되어가는 법조의 인물들이 적지 않다. 존경을 받기에 합당한 원로 법조인들이 많고, 격려하고 성장시켜야 할 역동적인 젊은 법조인들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분들 가운데는 퇴임 후 무료법률상담에 임하는가 하면, 세상의 지위와 영달을 명백히 물리치고 의연히 가계도우미가 되어 자신을 낮추고 지내기도 한다. 어떤 이는 박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드러나지 않게 사회통합을 추구하고 공정한 판결을 얻으려고 심혈을 기울이기도 한다.
젊은 법조인들 중에는 비참하게 소외된 이들과 똑같은 공감으로 어려운 활동을 하고, 열악한 노동과 복지의 현장에서 실상을 파헤치고 개선책을 모색하며, 자유와 평등을 유린하는 어떤 상황에 대하여도 과감히 자신의 한몸을 던져 사회적 이슈로 상재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의 업무에 매진하는 나머지 자신의 투쟁과 성과가 법조의 명예와 권위를 높이는 깃발이 될 것인지 여부는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법조의 깃발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게 되려면 소수의 몇 사람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 몇 사람의 현자를 희귀족으로 외롭게 놓아두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그들이 앞장서고 같은 생각, 같은 행동으로 따라 나서는 수많은 동도의 역군들이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법조계 실패의 아픔은 몹시 쓰라리고 그 빈도도 적지 않으나, 여기저기서 성숙되고 의기가 내면화된 인물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고 들으며, 언젠가는 역사적인 법조의 깃발이 휘날릴 때가 오리라는 예감을 하고 있다. 공의가 하수처럼 흘러 사회가 평온하고, 정의가 실현되어 압제자나 불한당이 물러나서 마을에 웃음꽃이 필 때 법조의 깃발이 이 사회를 인도하고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언젠가 아니 불원간 남북한이 통일되어 통일국가의 법제가 시행될 때에 그 과도기를 신속하게 극복하고 질서와 안정과 화합을 일구어 낸다면, 그리고 합심하여 묵묵히 다듬어 나가고 있는 자유평등민주국가의 공력(功力)이 뒷받침되어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이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여 강대국이 각축하는 소용돌이 가운데에도 자주독립의 의연한 기치를 휘날리게 할 수 있다면, 그때는 법조의 청청한 깃발이 시민의 광장에서 함께 펄럭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법조의 깃발은 눈에 보이는 유형(有形)의 깃발이 아닐 수도 있다. 자유 평등 인권의 가치를 이해하고 투쟁하고 확립하고 수호하는 자의 눈에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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