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오늘은 펑크난 신문의 한켠을 메꾸기 위하여 너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문의 한 구석에서 벌어지고 있는 젊은 변호사들의 갈등과 어려운 현실을 너랑 공유하고 싶어 몇 자 적는다. 우리 신문에는 ‘로스쿨 통신’이란 로스쿨 학생들의 고정칼럼이 있단다. 지금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은 ‘변호사 사회’에서 소수이고, 약자들이란다. 그들에게 나름의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언론의 책무이기에 이 코너가 만들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전 편집인 시절에 만들어진 코너이다. 난 이 코너를 보면서 신문의 외연을 법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까지 넓힌 좋은 기획의도라고만 막연히 생각했었단다.
그런데 며칠 전 그 ‘로스쿨 통신’에 대하여 그 칼럼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정확하게는 그런 칼럼을 게재하는 우리 신문에 대하여 항의를 하는 젊은 연수원 출신 변호사의 편지가 내 책상에 올려졌다. 참, 표현이 그렇다는 것이지 협회에 상임이사들의 별도의 책상은 없다. 사실 친구야, 신문내용에 대하여 비난하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편집인 입장에서 보면 환영할 일이다. 2만5000부나 발행되는 우리 신문이 그저 협회의 기관지 구실만 하면 좀 창피하지 않겠냐! 그 젊은 친구 항변의 요지는 로스쿨 학생들의 계속적인 불평이나 넋두리만 늘어놓는 글을 우리 신문에 계속 실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검토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칼럼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그 코너가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의 어려움,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 변호사도 되지 않은 학생들의 일상적인 수필코너가 되어버렸더라. 신문에는 변호사들의 비슷한 수필코너가 많은데 로스쿨 학생들의 수필코너가 뭐가 잘못이냐고 재항변하면 할 말은 없다만 그래서 사실 이번에 이 코너를 포함한 많은 수필성 칼럼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예정이다. 그리고 로스쿨 출신 젊은 변호사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분명 우리 신문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편집위원으로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영입했다.
“그래서 뭐?” 라고 너는 묻겠지. 그래, 내가 너에게 하고픈 말은 이런 우리 내부사정이 아니라, 이번 계기로 젊은 변호사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보았더니 연수원 40기 이후 변호사들과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의 반목과 반감, 갈등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연수원 출신 변호사들은 로스쿨 출신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고 있고, 실제 그런 면이 있고, 로스쿨 변호사들은 젊은 변호사들뿐만 아니라 전체 변호사들로부터 ‘서자취급’을 당하고 있어 엄청난 불만이 있고, 또한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로스쿨변호사협의회’가 구성된 것도 그런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냐.
사실 변호사 업계의 위기의식은 젊은 변호사들만의 고민은 아닌데 친구야 넌 모르지? 넌 여전히 우리 변호사들이 노력한 것에 비하여 많이 누리고 산다고 생각하지? 네 마음 다 안다. 그렇지만 우리 후배들은 정말 그런 것 같지 않다. 도리어 고생한 것에 비하여 현실은 냉엄하다. 그에 더하여 사법연수원 시스템이 존치된 상태에서 로스쿨이 도입되다 보니 양쪽의 젊은 법조인들, 즉 로스쿨 출신은 세상에 없는 새로운 개념의 변호사로서 시대를 개척해야 하는 나름대로의 고충이, 연수원 출신들은 또 그 나름대로 위기감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좁아진 진로에 더하여 출신성분에 따른 반감과 반목까지 보너스로 받아야만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하다. 친구야! 솔직히 그들의 반목이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 마음이 아프고, 선배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느낌의 문제는 멋있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냐! 자신들은 그렇다는데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대책 없이 위로하거나, 비난하면 감정의 골은 더 깊이 파이니 말이다. 그런 것을 다 알면서 왜 이런 편지를 너에게 쓰냐고? 대책은 세우고 편지를 쓰고 있냐고?
친구인 너에게, 그래도 법조인을 친구로 두어 조금이라도 우리 세계에 대하여 애정을 가진 너에게,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우리의 젊은 법조인들의 어려운 현실을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공유하고 싶은 것뿐이지 내가 무슨 거창한 해결책이나 위로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젊은 친구들에게나, 그리고 너와 나에게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이 말을 전하면서 편지를 마감하고 싶다. “오로지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이들이 보는 것을 알 수 있다.”
먹고사는 이야기 하다가 예술이야기로 급반전했다. 친구야! 내 이야기에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우리 만나 예술 한판 때리자. 고매한 오페라 감상 말고, 둘이 노래방에 가서 서민적 예술 한판 하자. 그러면 이 답답한 마음이 좀 풀리지 않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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