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학교에 5기들이 새로 들어오니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진다. 개강총회, 학회와 동아리 모임, 동문회 등으로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모이니, 변호사 시험 준비로 인해 무거웠던 학교의 공기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이제 막 로스쿨 생활을 시작한 5기들은 선배들에게 수업 추천을 받거나 공부 방법을 물어보느라 바쁘다.
1학년들을 보며 지난해 3월을 떠올린다. 새로이 들어선 길이니 여기저기 눈 돌릴 데가 많았다. 이 책이 좋은지 저 책이 좋은지 수도 없이 고민하고,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학회라면 다 참석해보고, 다른 동기들에게도 참 관심이 많았다. 생동감 있어 좋았으나 이것저것 다 맛보는 사이 잠시 방향감각을 잃었다. 특히 다른 동기들에 대한 관심은 눈 깜짝할 사이 그들과 나 사이의 비교의식으로 이어져 나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두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특히 2학기에 갑자기 가지게 된 로스쿨에 대한 회의감은 그 정도가 다소 심했는데, 하필 기말고사 바로 전날 그러한 상태에 빠졌다. 1년 중 마지막 시험쯤 되니 허리가 아프기 시작해 1시간을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약해지고 슬그머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왜 나는 이렇게 내 몸을 깎아가면서 여기에 있어야 하지? 이런 삶이 옳은가?’ 혼자 끊임없이 묻다, 그리고 울다 잠들었다.
내가 만약 2년 전에 로스쿨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수도 없이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곳에서 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금이 나오는 과정에서 정제는 필수조건이다. 풀무질을 세게 해서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불로 연단하는 그 과정이 없으면 정금이 나올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로스쿨을 다니는 1년 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상했지만, 그런 곳이기에 난 더 깨끗해지고 단순해질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자랑삼아왔던 것들이 무의미해져서 현재의 나에 집중할 수 있었고, 정말 중요한 일에 힘을 모으지 못하게 방해하는 잡다한 생각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안락한 의자가 아닌 풀무불 속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로스쿨에서의 1년 동안 난 삶의 본질을 붙잡고 본질 아닌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는 법을 훈련했다. 2년 전 이 길을 선택하면서, 앞으로는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땐 그 다짐이 단순한 선언에 그쳤는데, 지나고 보니 로스쿨 생활은 그 다짐을 구체적 삶으로 실현해가기 위해 비본질적인 것들을 버리는 훈련과정이었다. 특히 무엇보다 시간이 금인 이 곳에서 시간에 쫓김 없이 힘든 친구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는 것, 내 공부시간을 쪼개어 다른 친구들이 볼 수 있는 요약서를 만드는 것 등은 내 편의대로 시간을 사용하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가능했다.
그런데 3월. 새삼스레 5기와 덩달아 들뜬 나는 1년간 배설물로 여기며 힘들게 버렸던 것들을 다시 주섬주섬 줍기 시작한다. 아닌 척 하면서 또 새로운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고 이 얘기 저 얘기에 귀가 솔깃한다. 그래서 3월은 나에게 ‘기억투쟁’이 필요한 때이다. 인간에겐 망각의 축복이 있어 정말 중요한 사실들을 자꾸 잊기 때문이다. 그 연단의 시간을 거치며 무엇을 붙잡기로 했는지, 이곳에 대한 깊은 회의감에 빠졌을 때 무엇을 위해 다시 이곳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는지 힘써 기억해야 한다.
3월…열심히 달리기 위해 한참 시동을 거는 때이다. 그러나 그 달음박질이 허공을 향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투쟁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여기저기 휘둘리며 방향 없이 흘러가지 않고, 내가 처음에 붙잡은 그 가치와 본질을 따라 필요하다면 거슬러서라도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학기에 아픈 허리로 인해 망친 그 첫 시험을 치르고 나와 엉엉 울 때, 친구가 말했다. “나도 지난 시험 때 한 과목을 완전히 망쳤는데,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험을 했기에, 후에 열심히 노력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 소외계층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겠구나 하는….”
그 친구의 말을 들으며 난 로스쿨 3년을 통해 내가 얻어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로스쿨 3년 동안 단순히 변호사 자격증이나 학점만을 얻어갈 것이냐 그것을 넘어선 어떤 것을 얻어갈 것이냐. 나는 내 삶의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나의 성장’을 얻어갈 것이다. 그것을 위해 지금은 기억투쟁을 해야 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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